[데리다] 힘과 의미작용 2- 후기
이정훈
/ 2017-12-10
/ 조회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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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이 아닌 글쓰기가 자유로운 빠롤에의 도달 가능성을 지니는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 세미나 참석자들, 는 이날의 논의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의문은 텍스트의 내용 가운데 다음의 것에서 연유하였습니다.
“시로서의 진정한 문학 언어가 가진 계지력,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로운 빠롤에의 도달 가능성이다…바로 글이 고지 기호로서 죽을 때 글은 언어로서 태어난다.” P.25.
“그런데 역설적으로 기록만이 – 비록 기록이 별로 그 일을 해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 시의 위력을 지닌다. 즉 그것의 기호로서의 무기력 밖으로 파롤을 분기시키는 힘을 가지는 것이다.” P.25.
그리고 이번의 논의는 이 문장들 뒤에 실린 문장들에 있는 단어들, “쓰려는 의지”, “마음의 성향” 등 을 끌어들이면서 보다 복잡해졌습니다.
“의미의 자유자재로운 조합은 자연인〮생영〮혼의 지역적인 한계 속에 언제나 감추어져 있는 의미 작용(고지 작용)을 넘어설 수 있는데, 이러한 한계 초과가 쓰려는 의지의 순간이다. 쓰려는 의지는 의욕설로부터 설명되지 않는다…글쓰기 행위는 반대로 의지의 의지 감각을 일깨운다. 요컨대 자유를.” p.25.
“쓰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 쓰고자 하는 의지. 왜냐하면 마음의 성향이 아니라 자유가, 의무가 문제 되고 있으므로. 쓰려는 의지는 존재와의 관계에 있어서, 마음의 성향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이고자 한다.” p.25.
저에게는 빠롤의 자유, 순수한 빠롤 등은 단어는 여전히 그 의미가 분명치 않은, 모호한 낱말들로 남겨져 있습니다. 우리끼리 논의를 하는 와중에 “쓰려는 의지”와 “의지의 순간” 이 두 단어의 의미를 서로 연관시키되 심층에서는 구분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원 선생님께서 지난 시간에 논의 되었던 “이중성” 단어의 개념을 끌어 들이면서 보다 심오한 설명을 제공하기도 하셨습니다.
“글을 쓴다고 시도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기가 가진 의도나 욕망으로부터 표류한다. Affectivity – 단어 ‘마음의 성향’ 가운데서 ‘성향’으로 번역된 것 – 로부터 관계되지 않는 차원이 있다. 지난 시간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용기 내지 그릇이 필요하다. 의미 아닌 필수 지점이 요구 된다. 기원에 있는 원종합, 기원이 자기 자체에 반복을 지니고 있다, 의미를 구성할 때 의미가 가능하게 하지만 의미 자체는 아닌 것, 에크리튀르이다. 에크리튀르는 떨어져 나오는 운동, 산종의 운동이다. 현전, 말하는 사람의 현전에 묶여 있지 않은 것으로서의 에크리튀르. 이는 주체의 의지가 아니며 욕망의 문제가 아니며 그런 점에서 Affectivity를 벗어났다.” (이상은 최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걸 받아 적은 것입니다. 받아쓰기의 특성이기도 한 기입자의 왜곡 가능성으로부터 실제 화자가 하였던 생각 또는 말들과 전혀 상관 없는 것들이 글로 실려 있음을 감안해야 할 것입니다.)
최원 선생님이 말로 밝힌 것 다음으로 희음 선생님께서 “말하기는 여전히 주체와 관련 되는 문제일 것”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희음 선생님께서 말하기, 그리고 그것을 듣고 잠시 생각과 말을 멈추기는 보다 분명하게 인식할 만한 것이 생겼고 그 덕분에 어느 정도의 합의 가능한 수준으로 우리의 논의가 이르렀음을 예증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논의는 이 다음으로도 멈추지 않고 끊임 없이, 여러 방향으로 산발하며 튀어나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 본론에 보다 다가 서서 데리다가 말한 것들을 다루다 보면 ‘루세’에 대한 데리다의 평가를 듣게 됩니다. 루세는 어떠한 방식과 이념을 통해 작업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겠다고 선언하였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실상 결과물은 선언에서 명시한 목표에 절반에도 못 미쳤다고 평가합니다.(p.29.) 그리고 루세의 구조주의적 비평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루세를 겨냥하는 것을 넘어서서 구조주의적인 비평이라고 불릴 만한 비평방식을 견지해온 일군의 비평가 무리, 곧 구조주의자들 전체를 향하는 것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는 논의하는 가운데서 데리다가 ‘진정한 구조주의’에 대하여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부분을 짚어냈었습니다.
“구조주의자라 함은 먼저 의미의 조직에, 자율성과 고유한 균형에, 매순간 각 형체의 성공적인 구성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p.46.
반면에 데리다가 보기에 구조주의가 극단으로 전개된 “초구조주의”는 이러한 구조주의 원의미,또는 원래 의도를 왜곡합니다.
“가장 심각한 일은 우리가 ‘초구조주의’ 라고 위에서 지칭한 이러한 방법이 여기서 어떤 면에 의해, 구조주의의 가장 소중하고 가장 독창적인 의도와 모순되는 듯하다는 점이다.”(p.46.)
데리다의 구조 주의에 대한 견해에 이런 저런 생각들을 이어 붙이면서 논의는 서구 철학사에서 ‘구조주의’라고 언급할 만한 것들 가운데 몇몇 특색 있는 것들을 그 상이함을 인정하는 가운데 불러들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조주의적인 스피노자의 철학 그리고 알튀세르의 구조주의 등. 최원 선생님은 이야기 하셨는데, “알튀세르의 철학에 따르면 효과들이 구조를 만들어내며 요소들이 만들어낸 독특한 무엇인 구조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알튀세르의 구조주의와 데리다의 구조주의가 지닌 차이점에 대해서 말하셨는데, “Force, 힘의 문제에 대해서 사고하며 (구조주의를) 비판한 것은 데리다이다. Force를 강조하는 데리다의 논의는 미학적인 영역으로 상당히 지근한 거리로 까지 접근하는 것으로 보인다. 알튀세르와 데리다 모두 구조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다른 것들을 집어내서 비판했다는게 흥미롭다.”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최원 선생님과 다르게, 구조주의를 비판하였기에 또는 비판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일련의 유사성에 주목하면서 논의를 전개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라캉, 데리다, 들뢰즈 등에게서 비슷한 점들, 구조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려는 노력의 일환들에서 나타나는 비슷한 점, 유사한 점들이 있었다. 글쓰기에 한정에서만 보면 예술주의, 예술에 집중된 논의를 데리다에게서(만) 들을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예를 들어 비평과 관련해서는 들뢰즈와 상당 부분 통하는 말들이 있다고 본다.” 특히나 다음의 구절을 읽으면서 ‘이런 저러한 점들이 유사하다’ 라는 생각에 보다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비평은 힘을, 선을 이동시키는 운동을 포용할 정도로 운동을 선들의 우발적 사고나 현현으로서가 아니라 운동을 운동으로서, 욕망으로서, 그 자체로서 포용할 정도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글쓰기로까지 가지 못할 것이다.” P.50.
아쉽게도 제가 생각으로 미치지기에는 저곳은 너무나 높고 아득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 - 이 문제가 점유하고 있는 인식론 상의 위상 또는 중요성을 배제하더라도 이는 분명히 흥미로운 사고 거리임에 틀림 없기에 이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고자 합니다 - 은 당장에는 과제로 남겨두어야 하겠습니다.
3. 데리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몰고 가면서 후설의 현상학도 비판합니다. 극단적인 구조주의, 오늘날의 구조주의 이론은 데리다가 보기에 철학사에서 현상학과의 의존 관계를 통하여 발전하였습니다. 만약 현대구조주의에서 부정해야 할 요소들이 현상학에 이미 내재하고 있던 것들이라면 극단적인 구조주의를 부정한 이유로 현상학과 그것의 원류인 후설의 현상학 또한 마찬가지로 부정하는 것이 데리다에게는 마땅한 수행해야하는 일 것입니다.
“현대 구조주의가 다소간 직접적으로 표명된 현상학에의 의존 속에서 확대 발전했다는 이 점이야말로 그것이 구조주의를 서구 철학의 가장 순수한 전통적인 경향에 편입하게 하는 데 충분하리라…그런데 현상학에서 강도나 힘의 사유를 가능케 하는 어떠한 개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방향만이 아니라 힘의 개념화도, 지향성[intentionality]의 내적(in)만이 아니라 긴장(tension)의 개념화도…힘은 대립되는 쌍을 기초로, 즉 현상학과 신비학 사이의 공모를 기초로 생각될 수 없다.” P.49.
최원 선생님께서는 이 대목을 짚으시고는 현상학을 비판하는 데 있어서 다른 방식의 논의가 데리다로 부터 나왔다고 말하셨습니다. 최원 선생님께서 이야기 한대로 라면 앞서 알튀세르가 후설의 현상학을 심급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진행하였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데리다는 형상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 가령 ‘힘’과 같은 것들을 사고함의 가능성을 후설의 현상학이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데리다는 이야기를 마치는 지점에서 ‘힘’이라는 단어를 비중 있는 개념어로 사용하며 언급하였습니다. 세미나의 논의도 데리다가 들려 주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따라가면서 자연스럽게 ‘힘’이라는 단어와 마주치게 되었고 그것을 주제로한 논의들을 주고 받는 것을 끝으로 이날의 업무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최원 선생님께서는 ‘힘’이라는 개념을 변별 기준으로 해서 유럽 및 영미권의 현대철학 양상을 정리해 보셨습니다. “힘과 유희는 대륙 철학과 분석 철학의 분기점이 되는데 이는 직관적인 사고를 중요시 할 것인가 개념적인 사고를 중요시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또 한편 분석철학과 다르면서 판단에서 직관, 유희, 예술적인 사고를 우선시 하지 않는 철학사조가 대륙에서 이단점을 가지고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프랑스 과학철학이다. 위 문제는 칸트철학에서도 앞서 나타나는 문제라고 하이데거는 파악하였다. 반성적, 미학적 판단에 경도 되어서 나간 사람들이 니체와 하이데거 등이다” 그리고 최원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남기시며 참석한 다른 분들의 흥미를 이끌었습니다. “그렇다면 데리다를 여기서 과연 사조의 어떤 부류로 편입시켰을 때 이로운 점이 있을까?
4. 이번 세미나를 통해서 많은 것들이 의문으로 남았지만 가장 강렬하게 의아한 것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데리다는 구조주의의 참의미를 언급하며 이를 이유로 루세의 비평방법론을 구조주의 원의미와 배치되는 극단적인 구조주의라고 판단하고는 이를 부정하는 비판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데리다가 루세를 비판하는 이 대목이 데리다 자신에게는 적용되지는 않을 말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지가 궁금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루세가 한 것이다.) ’예정된’ 목적론 도식에 의거하여 설명되지 않고, 그 도식의 동시성 속에서 알아볼 수 없는 모든 것을 우발적인 것이나 혹은 찌꺼기 정도의 지위로 격하시키고자 결정하는 점에서.” p.45.
자신이 루세를 비판하며 내세운 구조주의의 원의미 또는 참의미는 예정된 목적론 도식이 아니다. 또한 루세의 극단적인 구조주의를 구조주의의 우발적인 것이나 혹은 찌꺼기 정도의 지위로 격하시키고 결정한다는 입장, 이러한 불공정한 입장에서 데리다 자신은 비판하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데리다는 무엇을 어떻게 설명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명백히 밝힐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