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11월 28일 <사진의 작은 역사> +1
우주
/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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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1931)
그동안 벤야민의 글들을 읽으며 그가 무엇을 발견하려 했는지 여러 번 확인했다. 그는 ‘표면적 역사’ 속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던 ‘사람들’을 찾으려 했다. 즉, 승리자의 역사 속에는 등장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을 불러내어 ‘명명’함으로써 그들에게 ‘말할 권리’를 주고자 했다. 벤야민의 이런 관심은 「사진의 작은 역사」에도 드러난다. ‘사진’이라는 ‘기술의 진보’가 과연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방대한 자료들을 교차하고 검증함으로써 성찰하고 그 안에서의 의미를 발견한다. 앞서 우리가 읽었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영화’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와도 맥을 같이 한다. 즉, 사진이라는 기술적 진보에 의한 ‘아우라’의 상실이 대중의 (정치적) 생각을 바꿀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이’에 존재하는 ‘감추어진 사람들’을 발견하여 숨 쉬게 하려는지 살펴보자.
1. 벤야민이 초창기 사진사(史)에 주목하는 이유
벤야민은 힐, 캐머런, 위고와 나다르가 활동하던 초창기 사진사 10년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 시기는 아직 산업화되기 이전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사진은 대목장의 예술과도 같은 것이었다고 말한다. (사진술이 시장을 점령한 것은 명함판 사진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대략 1930년대였을 듯하다.) 이 시기는 사진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을 제기하기 위해 중요하지만 오해받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라이프치히 신문』같은 곳에서는 사진술을 신적인 예술가를 끌어내리는 신성모독이라고 보았다. 이런 시각은 새로운 기술의 도발적인 출현에서 예술의 종말을 논하는 속물적인 개념에 불과하다. 약 100년 가까이 사진의 이론가들은 물신적이면서도 반기술적인 예술 개념을 들먹이며 소모적인 논쟁을 해 왔다. 1839년 물리학자 아라고가 다게르의 사진을 보고 한 연설에서 이런 소모적인 논쟁과는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진술을 자연을 관찰하는 데 응용한다면 앞서 사진술을 통해 얻었던 것들보다 더 많은 발견들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2. 다게르와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의 사진 속 무명의 인물, 배경, 부동 자세의 영향
다게르의 사진은 카메라 옵스큐라에서 빛에 노출된 요오드 처리가 된 은판이었는데 이 은판은 적당한 빛을 받아 회색의 상이 나타날 때까지 돌려야만 했다. 은판은 비쌌기에 케이스 속에 보관되기도 했는데 많은 화가들이 그 은판을 기술적 보조 수단으로 변모하여 사용했다. 70년 후 위트릴로가 파리의 시위 금지 구역의 집들을 그림으로 담아낼 때 사진엽서를 보고 그렸던 것처럼 영국의 초상화가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도 1843년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최초의 지역 총회가 열린 모습을 프레스코에 담을 때도 자신이 직접 찍은 수많은 초상 사진을 이용했다. 벤야민은 힐이 찍은 ‘무명의 사람들의 사진’ 때문에 그가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무명인은 회화 속에도 있었지만 두세 세대가 지나면 잊혀졌지만 사진에 찍힌 무명의 사람들에게는 그와는 다른 새롭고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있고 보았다.
「뉴 헤이븐의 생선 파는 여인」 속 여인의 무심하면서도 유혹적이고 수줍은 시선에는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가 남아 있다. 그것은 ‘예술’ 속으로 완전히 편입되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여인의 이름을 끈질기게 묻는 것과 같아서 침묵할 수 없는 무엇이 된다.
시인 다우텐다이의 아버지인 사진사 카를 다우텐다이가 약혼 시절 그의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에서도 비슷한 것을 찾을 수 있다. 그녀는 여섯째 아이를 낳고 자살했다. 이 사진에 나타난 그녀의 시선은 남편을 비켜서 뭔가 빨아들이듯이 불길하게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사람들이 충분히 오랫동안 사진에 침잠한다면 사진에 그림이 줄 수 없는 ‘마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사진사가 아무리 조작을 잘 하고 모델의 자세를 계획했다고 해도, 사진을 보는 사람은 사진 속에서 미미한 한 줄기의 불꽃, 즉 현실이 사진의 이미지적 성격을 완전히 태워버린 것 같은 우연과 여기와 지금을 찾을 수 있다. 또 사진 속에서, 이미 지나가버린 평범한 삶 속에서 미래적인 것이 오늘날까지도 깃들어 있는 장소, 우리가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의미심장하게 깃들어 있는, 눈에는 띄지 않는 그런 장소를 찾아내고 싶은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을 사진을 보는 사람은 느낀다.
카메라에 비치는 자연은 눈에 비치는 자연과 다르다. 다른 이유는 인간이 의식을 갖고 엮은 공간의 자리에 무의식적으로 엮인 공간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동안은 몰랐던, 사람들이 걸음을 걷는 순간의 자세를 사진은 고속 촬영이나 확대 등의 보조 수단을 통해 밝혀 준다. 충동의 무의식적 부분을 정신분석을 통해 알게 되듯이 이러한 시각적 무의식의 세계를 사진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기술이나 의학이 밝히려고 했던 구조적 특성이나 세포조직과 같은 것들은 원래 카메라에 더 친근하다. 사진은 이러한 자료에서 관상학적 측면들을 열어 보여준다. 사진은 가장 미세한 것 속에 사는 이미지의 세계로 백일몽에서 은신처를 찾았을 정도로 충분히 해석 가능하고, 숨겨져 있으면서도 백일몽처럼 거대해져서 표현이 가능해짐으로써, 기술과 마법의 차이를 전적으로 역사가 흐르면서 변하는 변수로서 가시화할 수 있게 되었다.
힐의 모델들 역시 그들에게 “사진의 현상”이 아직 “커다란 신비스러운 체험”이었다면, 어쩌면 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체험이 힐의 모델들에게는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를 짧은 시간 안에 드러내는 기계장치 앞에 서 있다는 의식뿐이었다고 해도 그렇다. 힐의 카메라가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물러서 있었으며 이를 대하는 모델들 역시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이런 태도는 사진사들이 카메라를 보지 말라고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최초로 복제된 사람들은 아무런 제목도 없이 선명하고 사실적으로 사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러한 초상 예술의 가능성은 그들이 신문을 사볼 수 없는 현재성으로 인해 사진 사이의 접촉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데 바탕을 둔다.
힐의 많은 사진들은 공동묘지에서 촬영되었다. 이 묘지는 담벼락에 둘러싸인 채 격리되어 있는 실내장식과 같으며 풀밭에서 솟아 나와 있는 묘비들은 벽난로처럼 속이 비어있으면서 내부에는 불꽃 대신 비명(碑銘)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이런 장소를 정한 이유는 초기의 사진판들이 감광도가 낮아서 옥외에서 햇빛에 오랫동안 노출시키면 안 되는 기술적인 한계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아우라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초기 사진술을 두고 오를릭은 사진이 지니는 단순성이 보는 사람들에게 잘 그려진 소묘나 초상화를 보는 것과 같은 강렬하고도 지속적인 감동을 주는 원인은 모델을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있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에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촬영방식은 모델들을 순간에서 벗어나 살도록 한 게 아니라 그 순간 속으로 들어가 살도록 했다. 촬영 시간이 오래 지속되는 동안 모델은 점차 사진과 친숙하게 되는데 이런 방식은 오늘날 스냅식 촬영에 의해 포착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대조적인 모습이다. 스냅 촬영은 크라카우어가 지적했듯 어떤 운동선수가 화보의 스타가 될 정도로 유명해지느냐 그렇지 않으냐를 결정하는 몇백 분의 일초에 일에 달려 있는 것이다.
초기의 사진들은 지속성을 갖게 되어 있다. 이 시기의 사진에는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찍었던 그룹의 군상(이런 그룹들이 사라진 것이 분명 19세기의 후반에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를 말해주는 가장 정확한 징후 중의 하나였다)뿐만 아니라 사진 속의 의상에 잡혀 있는 주름들까지도 지속성을 지니고 있다. 셸링의 초상 사진(162쪽)에서 셸링이 집고 있는 코트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초상 사진은 불후의 것으로 남을 것이다. 셸링의 코트가 주인과 어울려 이루는 형태들은 그의 얼굴에 진 주름살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3. 다게르 은판 사진 발명이 가져다 준 새로운 원근법
다게르 은판 사진이 발명된 시대에 그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야외화가 화가들에게 전혀 새로운 원근법을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사진은 회화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야 한다. 아라고는 조반니 바티스타 포르타의 초기 시도들을 염두에 두고 “대기의 불완전한 투명성에 의존하고 있는 효과를 두고 볼 때 숙련된 화가들조차도 암실에서 나타나는 영상의 모사가 그와 동일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4. 당대 사진술이 상업적으로만 이용되는 것에 대한 비판 및 초기 사진술과 당대 사진술의 차이
벤야민은 사진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다게르가 옵스큐라의 영상들을 고정시키는 데 성공한 순간 화가들은 사진기술자들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사진의 (상업적) 제물이 된 것은 미니 초상화였다. 이러한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짐에 따라 1840년에 이미 수많은 소형 초상화가들 대다수가 직업사진사가 되었다. 이들의 사진기술이 높은 이유는 생업의 영향도 있었지만 예술적 수련이라기보다는 수공업적 수련 덕분이었다. 서서히 이 과도기의 세대가 사라져갔다. 이제 장사꾼들이 직업사진사들의 자리에 몰려들었다. 음화(陰畵)수정기법이 널리 퍼지자 사진은 취미로 급격하게 타락했다. 이것은 사진앨범이 범람하기 시작한 때였다. 사진앨범들은 집안의 서늘한 곳이나 응접실의 선반과 작은 탁자 위에 놓였다. 이렇게 사용될 초상 사진을 찍기 위해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탁자, 머리 받침, 무릎대, 기둥, 커튼 등)이 놓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예는 카프카의 어린 시절 사진에서 찾을 수 있다. 한없는 슬픔을 머금은 카프카의 눈만이 이런 어울리지 않는 인위적인 장치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 카프카의 사진은 초창기 사진과 대조를 이룬다. 초창기 사진에 등장한 사람들은 아직 사진의 소년처럼 파열되고 신에게 버림받은 듯이 세상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들 주변에는 아우라, 다시 말해 사진을 보는 사람의 시선에 충만감과 안정감을 주었던 어떤 매질이 있었다. 이 아우라에 상응하는 기술적인 등가물, 즉 가장 밝은 빛에서 가장 어두운 그늘까지 이어지는 명암의 절대적 연속체도 있었다. 여기서도 옛 기술 속에 새로운 발명이 예고된다는 법칙이 증명되는데 즉 메조틴트 판화 그림들에서처럼 힐의 사진에서도 빛이 어둠에서 힘겹게 생겨나고 있다.
사진이 발명되던 당시에 들라로슈는 예전에 한 번도 이뤄낸 적이 없었던 귀중한 인상, 어떤 점에서도 전체의 안정성을 방해하지 않는 일방적인 인상에 대해 언급했다. 이 시기에 많은 단체 사진들이 활기 넘치게 함께 어울리는 모습을 포착했는데 이러한 모습은 잠시 동안 은판 위에 나타났다가 “원판촬영”이 생기자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구식이 되어 버린 타원형의 그림틀을 통해 근사하고 뜻 깊게 표현되는 것이 바로 이 분위기다. 그러므로 초창기 사진에서 예술적 완성이나 취미를 강조하는 것은 사진을 잘못 이해한 결과다. 사진사의 입장에서 보면 사진을 구성하는 공간들은 고객 하나하나가 상승일로에 있는 계급의 구성원으로서 부르주아 외투나 목도리의 주름들에까지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던 아우라를 지니고 등장했던 공간들이다.
아우라는 원시적인 카메라의 단순한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 초창기에 대상과 기술은, 뒤에 이어지는 쇠퇴기와 분리되는, 정확하게 대응하고 있다. 광학이 발달하자 음영을 완전히 극복하고 현상들을 거울처럼 기록할 수 있는 도구들이 생겨났다. 아우라는 집광도가 높은 렌즈들을 통해 음영이 추방되면서 영상에서 밀려나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가 점점 더 타락해감으로써 그 아우라가 현실에서 밀려나게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5. 아제의 사진과 아우라의 뜻
사진에서 결정적인 것은 사진사가 그의 기술과 맺는 관계다. 예를 들어 아제의 사진이 있다. 아제의 파리 사진들은 초현실주의 사진의 선구들이다. 그는, 최근의 사진술이 이룩한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한 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상을 아우라에서 해방시키는 작업을 개시하였다. 그는 소멸된 것과 못 쓰게 된 물건에서 소재를 찾았다. 따라서 그러한 영상들은 이국적이고 화려하고 낭만적인 도시 이름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 영상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물을 빨아들이듯이 현실로부터 아우라를 빨아들인다. “그렇다면 아우라란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리 떨어진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
6. 아우라 파괴가 대중에게 갖는 의미
사물을 자신에게 아니 대중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상태에 있는 일회적인 것이든 그것을 복제를 통해 극복하려고 하는 성향과 마찬가지로 현대인들의 열정적인 성향이다. 대중이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상 속에서, 아니 복제물 속에서 전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날이 제어할 수 없이 증가하고 있다. 화보가 들어 있는 신문이나 주간 뉴스 영화가 제공해주는 모사는 상과는 구별된다. 모사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상은 일회성과 지속성이 서로 밀접하게 엉켜 있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에서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의 지각이 갖는 특징이다. 이 지각은 세상에 있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나 커진 나머지 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에서도 동질적인 것을 추출해낼 정도다.
아제는 칸칸이 구두들이 늘어서 있는 신발장, 아침부터 저녁까지 손수레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파리의 안뜰, 식사 후의 식탁과 치우지 않은 채 널려 있는 식기들, 5라는 숫자가 건물 벽면 네 곳에 크게 써 있는 5번지의 성매매 업소를 놓치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이 모든 사진들이 공허하다는 점이다. 파리 성곽의 포르트 다퀘유 성문, 호화로운 계단, 안뜰, 카페 테라스, 테르트르 광장도 비어 있다. 이 장소들은 아무런 정취도 없이 말끔하게 치워져 있다. 이러한 성과물 속에서 초현실주의적 사진이 세계와 인간의 유익한 소외를 준비하고 있다. 그러한 소외는 세부 내용을 밝혀내기 위해 모든 은밀한 것들이 제거되는 장을 정치적으로 훈련된 시각에 열어 보여준다.
이러한 새로운 시각은 상업화된 관습적 초상 사진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대신 독일의 사진작가 잔더의 전시회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잔더는 농부와 백치에서 시작하여 가장 높은 문명의 대표자들까지 온갖 계층과 직종의 사람들을 사진으로 관찰하여 보여준다. 그의 관찰은 선입견 없이 이루어졌고 대담하면서도 섬세하다. 즉 괴테가 “대상과 자신을 내밀하게 일치시키고 또 그럼으로써 본래의 이론이 되는 어떤 섬세한 경험이 있다”고 말한 의미처럼 섬세하다. 잔더와 같은 작품들은 하룻밤 사이에 예기치 못한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 우리에게 닥쳐올 수밖에 없는 권력의 변동들은 사람들의 관상을 파악하는 능력을 키우고 날카롭게 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필요한 일로 만들곤 한다. 사람들이 갖는 여러 가지 정치적 입장은 그의 성장 배경 속에서 나온다. 잔더의 작품은 일종의 훈련용 지리부도와도 같다.
7. ‘사진으로서의 예술’의 가치와 의미
예술로서의 사진의 미학이 논쟁이 되었던 데 비해 ‘사진으로서의 예술’은 그동안 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예술작품들을 사진으로 복제하는 작업이 예술의 기능에 끼치는 영향은 체험을 “카메라의 노획물”로 만드는 사진을 다소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보다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 우리는 누구나 하나의 이미지, 특히 조각물이나 심지어 건축물까지도 현실 속에서보다 사진 속에서 훨씬 더 쉽게 포착된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예술적 감각의 몰락과 현대인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기 쉽다. 그러나 복제 기술의 발달과 함께 위대한 예술 작품에 대한 이해도 동시에 변화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위대한 예술작품들은 집단적 구성물이 되었고 너무 강력해졌기에 그것들을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축소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기계적인 복제방식들은 일종의 축소 기술인 셈이다. 그런 기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작품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지 하지 않는다면 그 작품들을 이용할 수 없게 된다.
오늘날 예술과 사진의 관계를 특징짓는 것이 하나 있다면 예술작품들의 사진촬영으로 인해 그 둘 사이에 생겨나게 된 아직도 해소되지 않은 긴장(상업과 예술 사이)이다. 조형예술에서 사진으로 옮겨 온 사진작가들, 기회주의적 계산을 하거나 우연한 경로로 아니면 편의를 위하여 전업한 것이 아닌 사진작가들은 그들의 발전 경로 때문에 오늘날 사진이 처해 있는 예술 상업화의 경향으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되어 있다. 사진이 잔더, 제르멘 크룰, 블로스펠트와 같은 사람들이 제시하는 연관관계에서 떨어져 나오고 관상학적, 정치적, 과학적 관심에서 해방된다면, 사진은 “창조적”이 된다. 이런 시각은 이들의 사진을 싸구려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물신화되고 유행으로 받아들여지게 만든다.
브레히트는 자본주의적 상황 때문에 현실을 읽어내는 일이 더더욱 어려워졌다고 하면서 이런 상황에서는 '뭔가를 구성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즉, 사진술적 구성의 선구자들을 키워낸 것이 초현실주의자들의 공적과 흡사한 것이다. 1855년 (세련되지 못한 이념 화가였던) 앙투안 비에르츠가 사진을 두고 했던 과장된 환영사에서 오늘날에도 하나의 의미를 추출할 수 있다. “다게르의 사진이 예술을 죽일 거라고 생각지 말라. 다게르의 사진이, 이 거인 같은 아이가 성장하면, 그의 예술과 강점이 모두 펼쳐지는 날에는 천재는 갑자기 손으로 그 아이의 목덜미를 잡고서 ‘이리 와! 너는 이제 내 거야! 우리는 함께 일하게 될 거야’라고 큰 소리를 외칠 것이다.” 그에 비해 4년 뒤 보들레르는 『1858년의 살롱』에서 사진이 산업이고 사진은 학문과 예술의 시녀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들레르와 비에르츠의 생각과 달리) 사진은 점점 더 재빨리 스쳐 지나가는 은밀한 이미지들, 그 충격이 관찰자의 연상 메커니즘을 정지시키게 될 이미지들을 붙잡을 것이다. 이 자리에 사진의 표제가, 사진을 모든 삶의 상황을 문자화하는 일에 포괄시키는 그 표제가 들어서야 한다. 그 표제 없이는 모든 사진적 구성은 불확실한 것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덧- 카프카의 어린 시절 사진 첨부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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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님의 댓글
우주아까 앞 부분이 이상하게 올라가서 다시 올렸습니다. 내일 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