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힘과 의미작용Force and Signification -Ⅰ
안지영
/ 2017-11-28
/ 조회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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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주의가 어느 날 물러가 버린다면, 그 구조주의자의 침입은 역사가에게 하나의 문제점 혹은 아마도 하나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런 식으로 지나간다면, 그는 속고 마는 것이다. 구조주의자의 침입을 대상으로 취급함으로써 그는 그것의 의미를 잊고 무엇보다 위태로운 것은 시선의 모험임을, 우리 앞에 놓인 어떠한 대상에 대해 질문하는 방법의 전환임을 망각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예상외로 그 중에서도 문학적 대상에 대해서 말이다.
아날로지의 방법에 의해: 보편적 성찰이 오늘날 언어에 관한 어떠한 불안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자극을 받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합의된 상황이다. 확실한 것은 기호에 관한 문제가 시대의 기호라기보다 그 자체를 넘어서거나 그보다 못한 것이라는 점이다. 기호 문제를 시대의 기호 문제로 몰고 가려는 것은 폭력을 쓰고 싶어 하는 것과 같다. 예상 외로 역사적이라 할 이 문제가, 언어의 기호가 되는 성질이 매우 불확실하거나 부분적이거나 비본질적이 되는 지점에 접근할 때에는 말이다. 구조주의자의 강박관념과 언어의 불안 사이의 아날로지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있어서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구조주의자의 입장은 오늘날 언어 앞에서의 또는 언어 내에서의 우리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순간들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역사의 기원으로서의 언어에 대한 놀라움이다. 역사성 그 자체에 의해서. 또한 발화의 가능성 앞에서 그리고 늘 그 안에서 마주하는, 알려진 놀라움의 반복은 세계 문화의 범위로 확대되었다. 이는 서구사상을 활성화시킨 사건으로, 언어에 관한 모든 문제와 마찬가지로 구조주의는 결국 고전적 사상사를 벗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조주의 현상은 그 안에 비반성적이고 자발적인 환원 불가능한 영역의 미덕이 있음으로, 사상의 역사가에 의해 취급될 자격이 있다. 이 가운데 문체 자체의 투명성이 아닌 모든 것은 취급될 자격이 있을 것이다. 무과실성에 속하지 않는 모든 것들.
우리는 현재 구조주의의 번영에 의존하며 살고 있으니 우리의 꿈을 비판하기는 너무 이르다. 꿈속에서 꿈이 의미할지도 모르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미래에 아마도 그 꿈이, 힘(force) 자체의 긴장인, 힘에 대한 주의집중의 이완으로 해석될 것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그 자체 안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하는 힘을 가지지 않을 때 형식은 매력적이 된다. 즉 창조할 능력이 없을 때 말이다. 이는 어째서 문학비평이 본질에 의해서건, 운명에 의해서건 어느 시대든 구조주의적인지를 말해준다. 문학 비평은 이제 자신이 힘과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분리가 작품에 관한 담론의 조건일 뿐 아니라 바로 작품의 조건이라는 것을 심오하고 엄숙하게 지적함으로써 그 힘에 복수한다. 힘의 어떤 쇠퇴 이후에야 작품에 대한 분석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구조주의적 의식은 과거에 대한 개념화(일반적 사유)로서 보편적 의식이다. 완성된 것에 대한, 구성된 것에 대한, 건축된 것에 대한 것에 대한 반성이다. 그 상황에 의해 역사적이고, 종말론적이고 어스름의 반성이다.
그러나 구조 속에는 형식과 관계와 배열(configuration)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계성, 그리고 언제나 구체적인 것인 전체성도 있다. 문학 비평에서 구조적 ‘관점(perspective)’은 “의문제기적이고 전체주의적”이다. 우리의 약함의 힘은 분리시키고 풀고 해방시키는 무능이다. 그리하여 전체성은 보다 명백하게 받아들여지고 파노라마와 파노라마그램(전망도)이 가능해진다. 사람들은 자각된 도식화와 공간화 덕에 힘들이 떠나버린 장을 용이하게 평면 위에서 둘러볼 수 있다. 결국 구조들의 기복과 윤곽은 의미의 생명력이라 할 내용이 중성화될 때 더욱 잘 드러난다. 조금 자연적 혹은 인공적인 어떤 재해에 의해 파괴되어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폐허가 된 도시의 건축물 같이 말이다. 구조는 더욱 명백하게 이해되기 위해 방법론적으로 위협될 수 있다. 이러한 조작을 흔들다(soucier) 또는 동요시키다(solliciter)라고 한다. 구조주의적 열정이 자체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탈구(dislocation)의 시대 동안이다.
이 ‘critical’한(비평적인/대단히 중요한) 해방 상태가 우리에게 보장하는 자유는 그러므로 배려이고 전체성을 향한 열림이다. 그러나 이 개방이 우리에게 감추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비춰주는 빛 속에서 감추고 있는 것은? 장 루세의 『형식과 의미, 코르네유부터 클로델까지의 문학 구조에 관한 에세이』를 읽으며 계속 묻게 된다.
루세는 물론 근친성과 소속(affiliation)을 인정한다. 바슐레르와 풀레, 스피츠, 레이몽, 피콩, 스타로뱅스키, 리샤르에 이르는, 그럼에도 『형식과 의미』는 고독한 시도로 보인다.
첫째로 숙고에 의한 차이에 의해 그렇다. 루세는 거리감을 취함으로써 오늘날 용인되고 존중되는 가치들 아래 감추어진 수수께끼를 드러나게 한다. 예를 들어 문학적 사실은, 언어가 의미와 일체를 이룬다든가 형식은 작품의 내용에 속한다든가 하는 명제들이 형식 또는 표현의 몹시 애매한 개념에 기대서만 수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상력의 개념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미와 문자 사이의 중개하거나 또는 그 둘을 종합하는 능력이자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의 뿌리요, 작품과 작품의 통일성에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과 내용’ 간의 구조적 틀과 공감의 애매한 기원으로서의 상상력은, 칸트에게는 이미 예술 그 자체였다. 상상력이란 그것이 만들어내는 작품들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자유이다. “상상력은 (생산적 인식 능력으로서) 실제의 자연에 의해 제공되는 물질에서 제2의 자연을 창조할 수 있는 강력한 행위주체이다.”(『판단력비판』) 비평가가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할 때 지성이 본질적인 능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상상력의 자유는 상상력이 개념 없이 도식화하는 그 점에 있기 때문이다.” 구조와 그리고 구조의 불가분한 통일체로서의 작품의 기원은 칸트나 루세에게도 수수께끼다.
창조적 상상력의 작용을 최대한 근접해서 포착하기 위해 결국 시적 자유의 보이지 않는 내면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작품의 눈먼 기원과 재통합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분리되어야 한다. 문학적 행위(글을 쓰거나 읽기)를 설립하는 이러한 전환의 체험이란, 다만 은유에 의해 가리키기밖에 못하는 식이 된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장소를 향한 비-장소(non-place)도 다른 세계도 아니고 유토피아도 알리바이도 아닌, 세계로부터 벗어남이다. “세계에 보태지는 한 세계”의 창조, 모든 것이 과잉(excess)인 세계가 문제되는 것이다. 과잉, 요컨대 그것은 모든 것이 언어 가운데 나타나고 산출되는 지점으로서 본질적인 무이다. 또한 블랑쇼가 우리에게 문학적 영감의 가능성 자체라고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순수한 부재만이―모든 현전이 예고되고 있는 모든 것의 부재― 영감을 일으켜 작품을 만들어 낸다. 순수한 책, 책 자체는 그 안에서 가장 대체될 수 없는 것에 의해 ‘별 것 아닌 것’에 관한 책이어야 한다. 문학의 상황으로서 이 공허는 비평가들에게 비평 대상의 특수성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무는 대상이 되지 못하므로, 고유한 비평대상은 이 무 자체가 사라지면서 결정되는 양식이다. 이것이 기원의 변장으로 작품이 결정되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 기원은 변장 아래서만 존재하고 생각될 여지가 있다. 의식 가운데 가장 짓눌린 의식, 어떤 것에 대한 모든 의식이 풍요로워지고 의미와 형상을 취하게 될 가능성이 되는 무의 의식. 만일 글쓰기의 고뇌가 결정된 파토스가 아니고 이어서도 안 된다고 할 때, 그것은 그 고뇌(anguish)가 작가의 경험적인 변경이나 상태가 아니라 이 고뇌(angustia)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발화에 대항해 가능한 의미 작용들이 밀치고 나오려 들고 서로 나가지 못하게 막아대는 와중의 발화의 필연적으로 제한된 통로이다. 서로 방해하면서도 서로 부르고, 그런가 하면 서로 도발하기도 하면서 예측할 수 없게 마치 자아도 모르는 사이에 그러하듯이, 순수한 다의성의 힘을 가진 의미 작용들의 자율적인 초(超)공동가능성 속에서, 말하기는 나를 무섭게 하는데 왜냐하면 결코 충분히 말하지 못하면서 나는 또한 언제나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히브리말로 “ruah”의 고뇌이다.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는 예레미야 편에서, 혹은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하나님 말씀을 옮겨 적는 바룩의 편에서 체험하는 고뇌이다. 그것은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을 글자로 새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새기는 것이 말을 구하는가 배반하는 가를. 라이프니츠의 신은 가능성들 가운데 선택해야 하는 번민을 알지 못한다. 여기에 책의 비극은 없다. 단 한 권의 대문자 책이 있을 뿐이다.
글을 쓰는 것, 그것은 단지 라이프니츠적 책을 불가능한 가능성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불가능한 가능성, 말라르메에 의해 더 없이 적절하게 이름 붙여진 한계. 글을 쓰는 것은 단지 대문자 책(Book)이 존재하지 않으며 절대적인 주제에 의해 구상되지 않은 한 세상의 의미가 그 속에서 유일한 의미가 채 되기도 전에 부서지고 마는 책들(books)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쓰이지 않은 것과 읽히지 않은 것이 어떠한 변증법의 친절한 부정성에 의해 어떠한 기초도 없는 상태로 격하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라이프니츠가 신의 창조를 두고 생각했듯이, 반드시 글쓰기에 의해 최상의 것이 발생할 것도, 그리고 그 이행이 발생한 것에 대해 항상 계획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늘 무한히 우주를 표현하는 것을 적어 내려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닮지도(resembling) 재조합 하지도(reassembling)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절대로 의미가 글쓰기를 선행할 수 없게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의미를 내려오게 함과 동시에 기록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의미가 존재하고 스스로 달라짐으로써 자기가 되는 것, 곧 의미가 되기 위해서 의미는 말해지기를 혹은 글로 쓰이기를 기다려야 한다. 후설이 『기하학의 기원』에서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적 행위는 그것의 원천에서 진정한 힘을 회복한다.
글쓰기가 개시적이기 때문에 위험스러운 것이고 고뇌를 야기한다. 글쓰기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의미는 행위의 앞에 있지도 뒤에 있지도 않다. 신이라 불리는 것은 인간의 글쓰기를 이차성으로 규정지어 버리는 이 과정, 요컨대 글쓰기와 글읽기 사이의 연기된 상호성은 아닌가? 쓰이기 시작하는 것이 이미 읽혀져 버린, 말해지고 있는 것이 이미 답변인 대화에서의 의미의 투명성으로서의 제삼자요, 절대적인 증인, 피조물이요, 동시에 로고스의 아버지. 로고스의 순환성이요, 전달성, 은총이 사라진 것으로밖에 있을 수 없는 전환과 모험의 기이한 노작.
작품은 단지 사상 또는 ‘내면적 의도’를 단순히 표현하기만 할 뿐이며 사상이나 의도가 작품보다 앞서 있다는 생각은 관념론자라 불리는 전통적 비평의 선입관이다. 루세는 확실히 플라톤주의나 신플라톤주의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는 창작이 순수한 투명성은 아닐지언정 적어도 계시라는 것은 잊지 않는다. 글쓰기가 개시적이라곤 하지만 그것은 글쓰기가 창조를 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기호로 이미 거기 있는 것을 말하고 솟구치게 하고 그것의 전조들을 취하는 절대적인 어떤 자유에 의해서이다.
시로서의 진정한 문학 언어가 가진 계시력은 자유로운 발화에의 도달 가능성이다. 가령 ‘Being’이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기능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다. 글이 고지 기호로서 죽을 때 언어로서 태어난다. 그러니까 글은 자기 자신만을 참조하는 바로 그 점에서 의미 작용 없는 기호, 또는 유희나 순수한 기능 작용인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기록만이 시의 위력을 가진다. 발화를 기록하며, 기록은 고유한 대상을 지니며, 우발적인 상황의 배열과 관련되는 모든 것 속에서 자연적 곤경으로부터 의미를 해방시킨다는, 이러한 치명적인 위험을 무릅쓴다. 그러한 이유로 글쓰기란 결코 단순히 ‘목소리의 묘사(voice-painting)’(볼테르)일 수 없다. 끝없는 전달의 기획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야말로 그것의 순수 유한성의, 순수 역사성의 표시이다. 글쓰기 행위는 원의지가 나중에 실현되는 후속적 결정형태가 아니다. 글쓰기 행위는 반대로 의지의 의지 감각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