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후기 11월 28일 <사진의 작은 역사> +3
우주
/ 2017-11-29
/ 조회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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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텍스트 읽기가 벌써 넉달째에 접어 들었습니다. 벤야민의 글을 읽을수록 그의 매력은 한층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벤야민이 1931년에 쓴 <사진의 작은 역사>를 읽어봤습니다.
어제는 여느 때보다 적극적인 멤버들의 참여와 열띤 논의가 있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흥분(?)시켰을까요. 벤야민이 말하고자 하는 ‘아우라’란 무슨 의미이며, 그가 ‘아우라’를 ‘긍정’했는지 ‘부정’했는지(하나의 입장), 혹은 ‘긍정’하다가 ‘부정’했는지(이중적 입장) 등의 논쟁이었습니다.
‘아우라’의 의미부터 짚어보려 합니다. ‘아우라’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리 떨어진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다. 어느 여름날 오후 휴식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지평선의 산맥이나 나뭇가지를 따라갈 때 종국에 가서는 그 순간이나 그 시간이 그 현상의 일부가 되는 상황- 이것은 우리가 그 산이나 나뭇가지의 아우라를 숨 쉰다는 뜻이다.” (<발터 벤야민 선집2,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 사진의 작은 역사 외> 184쪽)
아우라를 경험하는 순간은 ‘일회성’을 띨 수밖에 없습니다. 아우라의 일회성에 대해서는 아마도 저를 포함한 모든 분들이 동의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벤야민이 초기 사진술을 통해 읽어낸, 아우라는 무엇인지 분명하게 텍스트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오랫동안 사진에 침잠한다면 사진에 그림이 줄 수 없는 ‘마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사진사가 아무리 조작을 잘 하고 모델의 자세를 계획했다고 해도, 사진을 보는 사람은 사진 속에서 미미한 한 줄기의 불꽃, 즉 현실이 사진의 이미지적 성격을 완전히 태워버린 것 같은 우연과 여기와 지금을 찾을 수 있다. 또 사진 속에서, 이미 지나가버린 평범한 삶 속에서 미래적인 것이 오늘날까지도 깃들어 있는 장소, 우리가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의미심장하게 깃들어 있는, 눈에는 띄지 않는 그런 장소를 찾아내고 싶은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을 사진을 보는 사람은 느낀다.”(159쪽)
저는 위 부분에 벤야민이 초창기 사진에서 읽어낸 ‘아우라’의 의미가 담길 수 있는 부분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르게 보는 분들은 이 부분은 벤야민이 말하는 ‘메시아적인 것’이지 ‘아우라’의 의미는 아닌 것 같다고 했습니다. 벤야민은 ‘메시아적인 것’은 긍정하고 있지만 ‘아우라’는 처음부터 부정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초기작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등을 참고하면 그렇다고 보여집니다.
저는 ‘아우라’는 ‘메시아적인 것’에서 떨어져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메시아적인 것이 “지속성”을 갖는 데 비해 ‘아우라’는 ‘일회성’과 ‘지속성’을 동시에 갖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159쪽 내용이 ‘메시아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 사진을 보는 이들은 사진에서 ‘메시아적인 것’을 읽어내고 싶어합니다. 즉, 보는 이들에게는 ‘지속성’이 있는 것을 읽어내려는 욕망이 있고, 실제로도 초기 사진에는 지속성이 있다고 벤야민은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초기의 사진들에서는 모든 것이 지속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171쪽)
그러나 사진을 감상하는 것은 ‘일회적’인 순간입니다. ‘일회적’인 순간에서 메시아적인 것을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여전히 ‘아우라’는 경험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초기 사진술의 모델들이 “촬영방식 자체”로 인해 “그 순간 속으로 들어가 살도록”(171쪽) 되었기 때문입니다.
“힐의 많은 사진들은 공동묘지에서 촬영되었다. 이 묘지는 담벼락에 둘러싸인 채 격리되어 있는 실내장식과 같으며 풀밭에서 솟아 나와 있는 묘비들은 벽난로처럼 속이 비어있으면서 내부에는 불꽃 대신 비명(碑銘)을 보여주는 곳이었다.”(170쪽)
더불어 힐이 (비록 사진술이 가진 기술적 한계라고는 해도) 공동묘지에서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하나의 어우러지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거죠. 벤야민은 이런 ‘아우라’는 긍정하고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나 ‘돈’을 ‘숭배’함으로써 생긴 아우라는 지워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아우라’는 파괴되어야 합니다.
아우라 상실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술로서의 사진’은 두 가지 방법으로 가능합니다. ‘소외’ 즉 ‘낯설게 하기’ 기법과 ‘대중이 선입견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기(뛰어난 관찰력이 드러나는 사진)’ 기법입니다. 앗제가 찍은 사진 같은 초현실주의적 사진이나 잔더의 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아무 선입견 없이 이루어졌으며, 그야말로 대담하면서도 섬세”(187쪽)한 사진이야말로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우리에게 닥쳐올 수밖에 없는 권력의 변동들은 사람들의 관상을 파악하는 능력을 키우고 날카롭게 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필요한 일로 만들”(188쪽)기 때문입니다. 잔더의 사진은 “일종의 훈련용 지리부도”(188쪽)처럼 사람들에게 관찰력을 키울 도구로 사용됩니다.
또 하나는 방향의 전환입니다. ‘예술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사진으로서의 예술’(188쪽)의 입장에 근거해서 생각하면 가능합니다.
“사물을 자신에게, 아니 대중에게, 보다 더 "가까이 끌어 오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상태에 있는 일회적인 것이든 그것을 복제를 통해 극복하려고 하는 성향과 마찬가지로 현대인들의 열정적인 성향이다. 대중이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을 상 속에서, 아니 복제물 속에서 전유하고자 하는 욕구는 나날이 제어할 수 없이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화보가 들어 있는 신문이나 주간 뉴스영화가 제공해주는 모사들은 상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상에서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서로 밀접하게 엉켜 있는 데 반해, 복제물에서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에서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오늘날 지각이 갖는 특징이다. 이 지각은 세상에 있는 동질적인 것에 대한 감각이 너무나 커진 나머지 복제를 통해 일회적인 것에서도 동질적인 것을 추출해낼 정도이다.” (184쪽)
“우리는 누구나 하나의 이미지, 특히 조각물이나 심지어 건축물까지도 현실 속에서보다 사진 속에서 훨씬 더 쉽게 포착된다는 사실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예술적 감각의 몰락과 현대인의 무능력 탓으로 돌리기 쉽다. 그러나 복제 기술의 발달과 함께 위대한 예술 작품에 대한 이해도 동시에 변화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사람들에게 위대한 예술작품들은 집단적 구성물이 되었고 너무 강력해졌기에 그것들을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축소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건이 필요하다. 기계적인 복제방식들은 일종의 축소 기술인 셈이다. 그런 기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작품들을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지 하지 않는다면 그 작품들을 이용할 수 없게 된다.”(189쪽)
사진의 복제기술을 활용해야 합니다. 현대인이 작품을 바라보는 감각이 단지 위대한 작품(이라는 선입견)이 아닐 수 있도록 복제술은 사진을 축소시켜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면 사진이 이미 가지고 있는 ‘시각적 무의식’ 읽기로 인해 위대함은 사라지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만 남을 거니까요.
“과거 어느 때보다 ‘현실의 단순한 재현’이 그 현실에 대해 뭔가를 말해 주지 못한다는 점으로 인해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크루프 사의 공장들이나 A, E, G.사의 사진은 그 기업체들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본래의 현실은 기능적인 것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버린 것이다. 예컨대 공장처럼 인간관계들이 물화된 형태는 인간관계들을 더 이상 내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뭔가를 구성하는 일’, ‘뭔가 ’인위적인 것‘, ’인공적인 것‘을 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193쪽)
브레히트의 말입니다. 이 말은 현실을 읽어내는 힘 즉, ‘사진술적 구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카메라가 붙잡는 점점 더 재빨리 스쳐 지나가는 은밀한 이미지들’ 안에서 “사진의 진정성”(195쪽)을 읽어내야 합니다. ‘읽어내기’는 브레히트의 말처럼, 혹은 범행 현장을 찍은 사진들을 읽어낼 때처럼 선입견 없이 바라보면서 구성하여 읽어내는 행위여야 합니다.
벤야민을 읽으며 함께 치열하게 논쟁했던 시간들, 그런 '지금시간'을 사랑합니다. 다른 의견들, 다른 개성들, 다른 가치들, 차이들, 그런 것들이 모여 아름다움을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협력해서 선을 이루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숨어있는 아름다운 면모를 '읽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자본의 힘, 즉 사람들을 규격화해내고 줄 세우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혐오합니다. 혐오가 깊어지는 만큼 부디 사유도 깊어지기를, 벤야민의 사유가 저에게 울림을 주듯이, 제가 사랑하는 아름다움들이 곳곳에서 빛을 발하게 하는데 아주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다시 한번 기원해봅니다.
댓글목록
우주님의 댓글
우주이상하게 글을 올리고 나면 뭔가가 사라져 있거나 잘못 들어가 있어요... ㅜㅜ 왜 그럴까요? ㅜㅜ 지금 확인하고 빠져 있는 부분 정정해서 넣었습니다. 저 같은 기계치, 컴맹에게는 인터넷은 어렵습니다. ㅜㅜ
희음님의 댓글
희음
역시 성실, 신속하게 후기를 올려 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우주 님.
다름과 개성과 차이의 아름다움이 있었던 우리의 세미나 시간에 '지금시간'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다정함까지!^^
후기를 읽고 있자니 우주 님의 따뜻하고 개성 어린 목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리는 듯합니다.
그런데 아우라에 대한 우리의 살핌은 아직도 진행 중이고 또 조금 더 면밀한 눈으로 더듬는 시간이 필요할 듯싶어요.
이번에 읽을 <보들레르>에도, 또 언젠가 읽을 <독일비애극의 원천>에도 아우라에 대한 언급들은 계속해서 이어지니까요.^^
우주님의 댓글
우주희음님 말씀대로 함께 계속 탐구하다 보면 아우라에 대한 또다른 대답들이 들리리라 믿습니다. 아직은 제 탐구가 미진한 것 같습니다. 벤야민의 매력 중 하나는 다양한 해석을 자아내는 글쓰기 방식과 색다른 은유를 사용하는 데에서 오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희음님의 시각과 언어에 사물과 사람을 다르게 보고 색다르게 명명하는 매력이 숨어 있는 것과도 흡사하게 느껴지네요.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