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말과 사물: 서문 & 1장 시녀들 발제 (1011)
삼월
/ 2018-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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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보르헤스의 텍스트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에는 존 윌킨스라는 1600년대 사람이 세계를 분류한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보르헤스는 존 윌킨스의 자의적이며 전횡에 가까운 분석을 통해, 세계를 통찰하겠다는 신념이 얼마나 어리석고 불가능한지를 보여준다. 이 텍스트에는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 있다는 동물의 분류도 등장한다.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실제인물 존 윌킨스의 분류 방식이 아니라, 허구의 중국 백과사전에 등장하는 분류방식이다. 어떤 규칙도 질서도 없이 나열되는 이 분류는 존 윌킨스의 분류가 가지는 자의성과 전횡을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범위까지 밀어붙인다. 푸코는 거기서 중국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서구와 전혀 다른 사유체계로 작동되는 하나의 세계에 대한 상상을 읽어낸다. 서구인들은 그런 방식의 분류를 상상할 수 없으므로 거기에서 이국적인 매력을 발견하는데, 그 매력은 사유의 한계에서 온다.
이 분류에서는 도저히 나란히 놓일 거라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 나란히 놓임으로서 독특한 마력과 함께 기괴성을 드러낸다. 서구인들은 그 사물들이 나란히 놓일 장소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장소는 종이 위, 그러니까 언어의 비非-장소에서만 가능하다. 언어가 이 나열을 통해 열어주는 공간은 사유 불가능한 공간일 뿐이다. 푸코는 보르헤스가 보여주고 동시에 없애버린 그 소멸을 레몽 루셀에게서 영감을 받아 다시 그려낸다. 언어의 사용규칙을 활용한 유희에 의해, ‘테이블’은 수술대인 동시에 도표이다. 수술대는 ‘공통의 장소’가 되어 우산과 재봉틀처럼 함께 쓰이지 않는 물건들의 야릇한 마주침이 일어나게 한다. 도표에서는 존재물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의한 명목적 분류가 실행되지만, 언어가 공간과 교차되기도 한다.
푸코는 이 분류를 보고 웃는 동시에 의심을 동반한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세계에는 이 엉뚱하고 어울리지 않는 근접보다 더 심한 무질서가 있다는 의심인데, 의심은 곧 사물들이 배치되는 ‘공통의 장소’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데에 이른다. 언어와 질서의 차원에 속하는 유토피아는 실재할 장소를 갖지 못한다 해도 위안을 준다. 그러나 ‘무-질서’의 온상인 헤테로토피아는 불안을 야기하며, 언어를 손상시킨다. 보르헤스의 텍스트가 주는 거북함은 언어가 손상된 자(실어증 환자)의 깊은 불안과 유사하다. ‘장소와 이름의 공통성’을 상실했다는 불안. 아토피아(장소 없음)와 아파지아(설명할 수 없음). 보르헤스는 이 가상의 공간을 중국이라고 설정했다. 푸코는 서구인들이 보는 중국이 면밀하고 위계화되어 있지만, 시간에 둔감하고 넓이에 충실하다고 이해했다. 그 공간성에 비해 중국의 문자(한자)는 수평(표음문자)이 아닌 수직(표의문자)이다. 푸코는 이 말과 범주(사물)의 괴리를 ‘장엄한 공간’에 기초한 ‘뒤얽힌 길’과 ‘비밀 통로’로 이해한다. ‘어느 중국 백과사전’의 ‘공간 없는 사유’는 이 괴리에 의해 나타난다.
우리는 어떻게 관례적으로 사물을 배치하는가. 사실 사물들 사이에 질서를 정립하는 일은 애매하고 경험적이며, 명철한 눈이나 충실한 언어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질서를 확립하는 데에는 ‘요소들의 체계’가 필수 불가결하며, 유사성과 차이라는 문턱이 필요하다. 질서는 사물들의 내적 법칙이자 은밀한 망이며, 시선, 관심, 언어의 격자를 통해서만 존재할 뿐이다. 경험적 질서는 문화의 일차적 코드를 규정하지만, 각각의 문화들은 매개를 통해 경험적 질서의 영향에서 벗어난다. 언어, 지각, 실천의 코드들이 새로이 발견된 질서의 이름으로 비판되고 부분적으로 무효화된다. 푸코는 코드화된 시선과 반성적 인식에 질서의 존재가 드러나는 중간 영역이 있다고 본다. 중간 영역에서 질서는 점점 더 도표와 유사하고 일관성의 체계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푸코는 이를 질서와 질서의 존재 양태에 대한 맨 경험이라 부르며, 이 경험은 질서 확립의 코드와 질서에 관한 성찰 사이에 존재한다.
푸코가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이 경험이다. 16세기부터 서구 문화의 한가운데서 이 경험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하는 것. 서구 문화는 교환의 법칙, 생물의 규칙성, 언어의 연쇄와 재현의 가치가 질서의 양태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푸코는 문법과 문헌학, 자연사와 생물학, 부에 관한 연구와 정치경제학에서 전개되는 인식의 실증적 기반에서 질서의 어떤 양태가 인정되고 상정되었는지를 보여주려고 한다. 인식과 이론은 어떻게 가능했으며, 어떤 질서의 공간에 따라 지식이 구성되었는가. 어떤 선험적 여건을 바탕으로 어떤 실증성의 조건 속에서 사상이 출현하고 과학이 구성되고 경험이 철학에 반영되고 합리성이 형성되어 얼마 후에 해체되고 사라질 수 있었는가. 인식의 완벽성이 증대하는 역사가 아닌, 인식을 위한 가능조건의 역사가 드러나는 에피스테메. 푸코는 지식의 공간에서 경험적 인식의 다양한 형태를 야기한 지형을 보려고 하며, 따라서 이 연구는 역사가 아닌 ‘고고학’에 가깝다.
푸코는 고고학적 탐구를 통해 서양 문화의 에피스테메에 두 차례의 불연속을 본다. ① 17세기 중엽 고전주의 시대의 막을 여는 불연속, ② 19세기 초엽 근대성의 문턱을 가리키는 불연속. 푸코는 18세기와 19세기에 실증성의 체계가 변화한 것을, 사물을 인식·분류하고 지식의 대상으로 정립하는 질서의 존재양태가 변화한 불연속으로 본다. 인식들은 서로를 야기하며 변화시키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푸코는 고고학을 통해 지식의 일반적 공간, 지식의 전체적 지형과 그 안에 나타나는 사물의 존재 양태를 파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실증성의 문턱에서 변동의 계열과 동시성의 체계들도 규명될 것이다. 먼저 고전주의 시대 재현의 이론과 언어, 자연계의 범주, 부 및 가치의 이론 사이에 존재하는 일관성을 본다. 그리고 19세기의 문턱에서 재현과 언어가 사라지고, 역사성이 침투하는 것을 본다.
사물이 재현의 공간을 떠나면서, 서구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지식의 영역으로 들어온다. 푸코는 ‘인간’을 사물의 질서에 생겨난 균열이며, 지식의 영역에서 사물의 질서가 새롭게 배치되면서 모습을 드러낸 형상으로 본다. 인본주의에 대한 온갖 환상과 ‘인간학’의 안이함은 여기서 생겨났다. 푸코는 ‘인간’을 최근의 발견물이자 새로운 문턱에 의해 사라질 무엇으로 본다. 이 책의 시대 구분은 광기의 역사와 동일하다. 광기의 역사가 하나의 문화 안에서 차이에 집중한다면, 이 연구는 닮음의 역사라 말할 수 있으며 사물들의 친근성을 검토하는 데 필요한 질서의 확립 방식을 관찰한다. 광기의 역사가 배제와 감금의 역사라면, 사물의 질서에 관한 역사는 동일자의 역사이다. 이 책에서 푸코의 연구대상은 사물의 질서에서 동일자의 사유까지 이르게 되는 고전주의 시대 지식 전체이다. 고전주의적 사유와 분리되고 서구의 근대성을 여는 그 문턱에서 인문과학의 고유한 공간을 연 인간이라는 기이한 지식의 형상이 출현했다.
<1부 1장 시녀들>
1
화가는 그림의 왼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캔버스에서 약간 물러나 있다. 화가의 시선은 그림과 모델 사이를 오간다. 화가의 몸과 얼굴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의 경계이다. 경계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재현되어 있는 그림에서도 보이지 않고, 자신이 재현하고 있는 그림도 제대로 볼 수 없다. 화가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시성의 문턱에 군림한다. 화가가 보고 있는 지점에 관람자인 우리가 있고, 그 지점은 그림 안에 표현되어 있지 않다. 우리 역시 자신을 보지 못하므로 화가의 시선은 이중으로 비가시적이다.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캔버스의 정면은 우리가 있는 공간의 심층적 비가시성을 드러낸다. 화가의 시선은 가상의 점선을 통해 우리를 그림의 재현에 연결한다. 연결된 장소에는 불확실성, 교환, 회피하는 시선을 포괄하는 복잡한 망이 내포되어 있다. 화가의 시선이 닿는 우리는 관람자로서 추가요소일 뿐이다.
화가의 시선에 의해 우리는 공간에 연결되지만, 모델을 바라보는 화가의 시선에 의해 공간의 원래 주인인 모델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축출된다. 다시 화가의 시선은 그림 바깥의 허공을 겨냥하며, 관람자만큼이나 많은 모델을 받아들인다. 주시하는 자와 주시되는 자가 끊임없이 교환된다. 안정적인 시선은 없다. 비가시적 캔버스는 시선들의 관계가 발견되거나 확립되지 못하게 한다. 화가의 눈은 관람자를 포착하여, 그림 속으로 들어가도록 강요하고, 특권적이고 의무적인 장소를 지정하며, 빛나는 가시석 형질을 선취하여 캔버스의 표면에 투사한다. 관람자는 자신의 비가시성이 화가에게 가시적이게 되고 자신에게는 영원히 비가시적인 이미지(캔버스) 안으로 옮겨가는 것을 본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명확한 원근법으로 창문이 표현되어 있다. 창문은 빛의 흐름을 통해 비가시적인 캔버스와 균형을 이룬다.
그림의 정면에는 그림처럼 보이는 거울이 있다. 모델로 추정되는 이들의 얼굴이 거울에 비치며, 분신의 마법을 우리로 하여금 알아차리게 한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이 그림에 의한 재현 중에서 유일하게 가시적인 것이지만, 아무도 거기를 바라보지 않는다. 인물들이 거울에 무관심한 것처럼 거울도 무관심하다. 거울은 방 안에 있는 다른 것을 하나도 비추지 않는다. 네덜란드 회화 전통에서 거울은 이중화의 역할을 했다. 비현실적인 변형으로 표현된 공간에서 거울이 화가가 본래 그리고자 했던 것을 나타낸다면, 거울은 완벽한 분신일 수 있다. 그러나 거울은 그림 자체가 재현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거울은 가시적인 대상과 재현의 영역을 무시하면서, 모든 시선의 바깥에 머물러 있는 것에 가시성을 되돌려준다. 거울은 화가가 바라보는 얼굴과 화가를 바라보는 얼굴 모두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다. 재현은 비가시성의 두 형태를 재현의 극점인 거울에 되돌려준다. 거울은 가시성의 전환을 보장하여, 그림 안에 재현된 공간과 그림이 재현으로서 갖는 성격을 잠식한다.
2
그림 속에 나타나는 이미지를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고유명사를 사용했다면 그림보다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지 모른다. 이에 비해 언어는 회화에 대해 무한한 관계를 맺는다. 언어와 회화는 서로 환원될 수 없다. 언어로 표현되는 장소는 눈앞에 펼쳐지는 장소가 아니라 통사법의 연속에 의해 규정되는 장소이다. 고유명사는 두 공간이 상호 부합하듯 겹치게 해 주는 하나의 기교일 뿐이다. 언어와 가시적인 것의 관계를 열려있는 상태로 유지하고 싶다면, 양자의 양립불가능성을 장애물이 아닌 출발점으로 삼아 가까이 머물려면, 고유명사를 지우고 무한한 작업에 매달려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푸코는 거울의 안쪽에 누가 비치는지 알지 못하는 척 거울 속 반영을 존재하는 그대로 검토하려 한다.
거울은 캔버스의 이면인 동시에 표면이라고 할 수 있다. 거울은 창문과 대비를 이루고 창문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거울은 격렬하고 순간적인 움직임, 순수한 놀람의 움직임을 통해 응시되지만, 비가시적인 것(모델의 얼굴)을 찾아 허구적 깊이의 끝에서 가시적인 동시에 모든 시선과 무관하게 만든다. 또한 거울은 통로를 형성하는 출입문과 인접해 있다. 출입문 밖에 한 남자의 전신 실루엣이 보이는데, 남자는 갑자기 묘사 범위의 문턱에 출현하여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흔들리게 한다. 균형과 빛의 흐름이 흐트러지고, 화가의 시선에서 출발한 방 안의 재현은 출입문 밖에서 들어오는 빛에 의해 단절된다. 그리고 다시 열린다. 열린 것은 그림의 폭이고, 시선은 그림의 가운데 묘사된 여덟 명의 인물로 향하게 된다. 인물들 중심에는 공주가 서 있는데, 전통적인 배치방식을 통해 구성의 주요한 주제로 표현되어 있다. 그림 속 두 개의 중심은 공주를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그리고 있다. 소용돌이를 멈추는 것은 그림 속의 거울이고, 공주의 얼굴은 거울 속의 반영과 겹친다. 여기서 솟아오른 선이 그림 속을 가로질러 관람자의 위치에 고정된다.
그림의 외부에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면서도 그림을 구성하는 모든 선에 의해 결정되는 이 장소에는 모델인 두 군주가 있다. 두 얼굴은 거울을 응시하는 자의 얼굴이고, 두 인물의 눈은 그림 속 모든 인물을 응시한다. 두 군주는 그림 안에서 가장 흐릿하고 비현실적이며 손상되기 쉬운 이미지이다.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므로 가장 소홀히 취급된다. 반면에 그림의 외부에 있음으로서 본질적 비가시성 속에서 재현 전체에 질서를 부여하는 중심이 된다. 그림 속 인물들은 두 군주를 의식하면서 그들을 위해 그 공간에 존재한다. 결국 그림의 배치는 왕과 왕비의 시선에 맞춰 이루어지고, 공주의 시선과 거울 속 이미지가 따르게 되는 구성의 진정한 중심도 이렇게 드러난다. 이 중심은 상징적으로 최상의 자리이다. 모델의 시선, 관객의 시선,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시선이 이 중심에서 서로 겹친다. 이 지점은 재현의 출발점이므로 실재적 지점에서 합쳐지며, 실재는 그림 내부로 투사된다. 관념적이고 실재적인 세 가지 기능에 상응하는 세 인물인 화가, 방문자, 왕과 왕비는 그 실재의 반영이다.
이때 거울은 각 시선에서 결여되어 있는 것을 반영하는 듯하지만, 그 반영은 허위이다. 거울은 보여주는 이상으로 더 많이 감춘다. 왕과 왕비의 자리는 미술가와 관람자의 자리이기도 하며, 이를 통해 그림과 무관한 그림을 바라보는 시선을 그림 내부로 끌어들인다. 그러나 국왕이 그림 안에 없기 때문에 거울에 나타나는 것처럼, 미술가와 방문자는 그림 안에 있기 때문에 거울에 나타날 수 없다. 그림 속 재현의 순환은 완벽하지만, 그림의 깊이를 가로지르는 선들은 불완전하고 궤적의 일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국왕의 부재로 인한 빈틈 때문인데, 이는 화가의 인위적인 기교에 의한 것이다. 이 기교는 모든 빈자리를 감추면서 동시에 가리킨다. 누군가가 보는 것의 비가시성은 보는 이의 비가시성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푸코는 벨라스케스의 이 그림에 고전주의적 재현의 재현, 고전주의적 재현에 의해 열리는 공간의 정의 같은 게 들어있다고 본다. 재현은 여기서 자체의 모든 요소를 통해 스스로를 재현하고자 한다. 이 재현의 분산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본질적인 공백도 드러난다. 재현에 근거를 제공하는 닮음, 동일자로서의 주체가 사라졌다. 재현은 닮음에서 벗어나 순수 재현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