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틀러] 혐오 발언: 2장 발제 (1018)
jina
/ 201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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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주권적 수행문
구두행위와 차별행동의 관계
표현은 그것이 수행하는 행동과 분리될 수 없으며 표현이 전달되는 순간 혐오나 사상이 제도화된다. 수정헌법 제1조에서 모든 표현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다.(마츠다) 발언은 권력의 부수현상이 아닌 권력 그 자체의 생활 양식이다. 따라서 여성의 종속적 지위를 야기하는 포르노그래피는 그 자체만으로 상처가 된다.(캐서린 맥키넌) 하지만 군대 내 동성애 발언에 대한 논쟁은 발언과 행위를 분리시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동성애에 대한 발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를 할 가능성이 없음을 덧붙이기만 한다면 그 진술은 행위가 아닌 단순 언어로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표현은 행위를 수반하기에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경우 판단과 처벌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권리와 책임은 대부분 국가가 가지고 있다.
국가가 생산하는 혐오 발언, 담론 권력
혐오발언은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처벌되기에 이 과정에서 국가에 담론권력이 양도된다. 무엇이 혐오발언인지 그 범주는 국가의 비준으로 결정된다.(=탄생된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순간 어떤 행위가 수행되는, 주권적 언어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혐오발언’이라는 것은 우리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한다. 혐오발언은 어떤 행위를 수행하고 있는 수행성과 발언의 대상자에게까지 어떤 행위를 수행한다는 이행성까지 수반한 강력하고 효과적인 권력이다. 결국 우리의 자유란 것은 혐오발언에 귀속돼있을 뿐이고 혐오발언이 우리의 주권을 박탈할 경우 우리가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국가권력의 도움을 받는 것 뿐이다.
혐오발언과 국가권력 – 수행성을 가진 언어권력이라는 점에서 사실 동급이지만 전자는 개인이 그 힘을 악용했다는 점에서 국가권력의 처벌을 용인한다. 그렇다면 혐오발언을 통해 우리는 국가에 권력을 이양하고 통제받는 이분법적 권력 관계가 형성되는가?
주권적 권력에 대한 역사적 상실(푸코)
푸코는 권력은 더 이상 주권의 범위로 제약되지 않으며 무수히 많은 장소로부터 권력관계가 발생한다고 한다. 우리는 개별 주체일 뿐 주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주권은 권력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제한하는, 불확실한 개념일 뿐이다. 우리는 주권개념을 포함해 주체에 대한 관습들을 극복해야 한다. 현실 속에서 권력이 드러나는 다발적이고 다양한 지점들을 연구해야 한다.
주권적 수행문을 통한 권력에의 귀환
푸코는 주권적 권력 형태를 거부하고 개인들과 세부 사례들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 개인들에게는 단순하고 든든한 권력의 지도를 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언어가 ‘주권적 수행문’(실질적 권리가 행사되는 언어행위)으로 작용하며 혐오의 용도로 사용할 경우 사회에 해악을 끼치므로 국가의 권력적 통제행위가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된다. -> 언어행위를 주권행위로 이상화하기에 발생하는 모순
매키넌과 포르노그래피적 발언의 논리
언어는 그 자체보다 그것이 재맥락화되고 독해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애니타 힐의 증언과 포르노그라피가 그렇다. 애니타 힐은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의회에서 증언하지만 그 이야기 자체가 성애화되며 청자들에게 포르노그라피로 소비된다. 그녀의 언어는 그녀가 저항하고자 하는 성애화의 적극적인 전유로 출현한다. 성폭력에 저항하기 위해 언어화된 성행위가 의도와 다른 방식으로 향유돼버리는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흑인이라는 아니타의 인종 역시 그녀가 볼거리로 전락하도록 허용한다.
포르노그라피 역시 구조적인 전도의 형태를 지닌다. 포르노그라피 속 여성의 ‘no’는 실은 ‘yes’를 의미하며 이외에도 각종 비유와 의도를 통해 우리는 포르노그라피 속 언어를 재맥락화한다.
이처럼, 포르노그라피 하에서 언어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행위능력을 전시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지만 언어는 우리의 자발적인 의도 없이 우리를 성애화하거나, 의미를 전도시키고 무시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언어에 귀속된 주권성은 깨질 수 있다.
보편성에 대한 투쟁
그렇다면 무엇이 적절한 언어인가. 하버마스 등은 언어의 주권성을 계속 인정하며 타인에 의해서 발언이나 의도를 침해받지 않는 완전한 의사소통 상황이 중요하다고 했다. 포르노그라피적 언어는 단지 이런 상황이 뒷받침되지 못한 타락한 언어상황일 뿐이다. 하지만 동등한 상황에서 같은 언어를 말하더라도 효과가 다를 수 있는데 우리는 언어를 신뢰해야 할까. 하버마스는 어떤 발언이 종속되는 해석의 종류를 미리 제약하는 보편개념, 즉 ‘이상적인 전제들’을 사전에 합의해둠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한다.
‘정당하게 발언 가능한 영역’을 지정하는 보편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사실 보편적인 규범이란 것은 오히려 인종차별 등의 문제를 학습시키고 암묵적으로 주장하기 까지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전의 보편개념에 기대어 기존의 관습이 배제시킨 것들을 찾아내고 수면 위로 끌어내는 활동을 통해 우리는 관습적 공식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폭로할 수 있다. 역사적 발전과 더불어 발생하는 수행적 모순은 ‘변화’야 말로 유일하게 인정받는 보편성임을 보여준다. 이때 보편성은 상상된 경계에서 그것을 향한 투쟁만으로 존재감이 드러난다.
국가 발언 / 혐오 발언
어떤 발언을 혐오 발언으로 인정하고 평가하며 처벌할 권리는 국가(사법부)에 있다. 어떤 언어를 법원이 혐오발언으로 판결하는 순간 혐오발언은 탄생한다. 혐오 발언은 인종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담론을 생산하고 추가하는 법적 도구가 된다.
하지만 혐오는 다양한 미학적 방식으로 전시되고 재생산되며 사용된다. 또한 발언은 사후에 판단되기보단 발생과 동시에 상처를 주는 발언내행위다. 이것을 국가가 막아보려 하거나 보편성이라는 공적 담론으로 막아보려 한들 그것은 반복되고 순환한다. 우리는 혐오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질문해야 하고 ‘국가’는 그 답변들 중 하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