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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 발제 :: 1121
최원 / 2017-11-20 / 조회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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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

1. 역사주의 vs. 역사적 유물론

푹스의 저작은 맑스주의 예술론의 최근사이다.

메링과의 관계: 메링은 민족주의를 거쳐 나중에는 라살 학파를 경유했다. 나중에야 엥겔스의 말년에 메링은 맑스주의와 접촉했다. 푹스는 메링을 일찍 만났고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처음으로 역사 유물론의 정신사적 연구의 한 전통이 생겨났다. 메링의 영역은 문학사라서 푹스의 영역과는 접점이 없었고, 메링은 학자적 성향이었지만 푹스는 수집가였다.

메링에게 보낸 편지에서 엥겔스는 두 가지를 반대함.

1) 정신사에서 어떤 새로운 도그마를 이전의 도그마의 ‘발전’으로, 어떤 새로운 시파를 앞선 시파에 대한 ‘반작용’으로, 어떤 새로운 양식을 구양식에 대한 ‘극복’으로 제시하는 관행에 반대.

2) 그러나 엥겔스는 동시에 그와 같은 새로운 정신적 구성물들을 그것들이 인간과 인간의 정신적, 경제적 생산과정에 끼친 영향과 분리하여 생각하는 관습에도 암암리에 반대.

이로써 다양한 정신과학의 영역들의 독립성이 의문시되고 예술 자체의 독립성과 예술작품들의 독립성은 의문시됨.

예술작품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미치는 영향은 예술작품과의 만남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오늘날의 우리에게 전승시켜준 역사와의 만남에도 기인한다.

괴테가 셰익스피어에 대해 한 말, 곧 “어떤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모든 것은 원래 더는 평가될 수가 없다”는 말은 변증법적 역사 관찰의 출발점에서 생겨나는 불안감을 표현. 그 불안이란 곧 연구자가 어떤 특정한 과거의 단편이 특정한 현재와 함께 위치하고 있는 비판적인 성좌구조를 의식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대상에 대해 초연하고 관조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라는 예상에서 생겨나는 불안.

역사주의 vs. 역사적 유물론

역사 유물론은 관조의 태도(객관적, 실증적 태도)를 취하는 역사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의 서사적 요소를 포기하고 역사를 구성의 대상으로 삼는데, 그 장소를 이루는 것은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특정 시대, 특정 삶, 특정 작품이다. 그는 그 시대를 사물화된 ‘역사적 연속성’을 폭파하여 거기에서 끄집어낸다. 역사주의가 과거에 대한 영원한 이미지를 제시한다면, 역사적 유물론자는 그때그때 과거와의 유일무이한 경험을 제시한다.

이런 이해는 푹스에게서도 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왜냐하면 푹스에게선 낡은 수용관과 새로운 비판적 수용관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 푹스의 낡은 수용관: 이는 우리가 한 작품을 수용하는 데 기준이 되는 것은 그 작품이 탄생했던 시대의 동시대인에 의해 이루어진 수용이라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이는 ‘실제로 어떠했는가’라는 (역사주의자, 실증주의자) 레오폴트 폰 랑케의 말과 흡사하다.

- 푹스의 비판적 수용관: 수용의 역사가 지니는 의미에 대한 변증법적 통찰. 푹스는 예술사에서 성공에 대한 물음이 도외시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한다. “예술가가 크게 성공을 거두거나 혹은 그러지 못한 원인, 그 성공이 지속되거나 혹은 그러지 못한 진정한 원인을 밝혀내는 일은 나에게 예술과 결부된 가장 중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2. 사회민주당의 대중교육사업의 문제점과 기술발전에 대한 비판적 고찰

푹스의 커리어에 대한 설명은 생략.

푹스가 활동을 시작할 때는 사회민주당의 교육사업에서 새 과제들이 대두되었던 때였다. 노동자들이 당으로 쇄도해 들어오면서 ‘학문의 대중화’라는 문제가 광범위하게 대두되었으나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어용단체들이 노동자 교육을 노동과 교육이라는 구호 아래 행하자 사회민주당은 “지식이 힘이다”라는 구호로 이에 맞섰다. 사회민주당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확고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동일한 지식이 언젠가는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교육은 실제로는 실천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없었고 또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들의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줄 수 없었던 지식은 부르주아지에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정신과학적 지식을 다루면서 단지 “자극을 주거나” “기분전환을 해주고” “흥미를 돋우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역사를 느슨하게 풀어서 ‘문화’를 얻어냈다.

바로 여기에 푹스의 저작이 위치해 있다. 즉 이런 상황에 반응하고 있는 데에 그의 저작의 위대성이 있으며, 그 상황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저작은 문제성을 지닌다. 푹스는 처음부터 독자 대중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자신의 원칙으로 삼았다.

당시 논쟁의 흔적 가운데 코른의 논문 <프롤레타리아트와 고전주의>가 중요한데, 여기서는 유산 개념이 다루어진다.

- 코른에 따르면 라살은 독일 관념론 속에서 오늘날 노동자계급이 물려받은 한 유산을 발견했다고 하지만 맑스와 엥겔스는 견해를 달리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우위성을 어떤 유산에서 이끌어낸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 자체속에서 차지하는 노동자 계급의 결정적 위치에서 끌어냈다.”

- 코른의 이런 역사주의 비판은 중요하지만 코른은 또한 맑스 엥겔스가 정신과학이 아닌 자연과학에 더 매력을 느꼈다고 이야기하면서 자연과학을 “진정한 학문”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문제적이다. 코른에서 자연과학은 무엇보다 기술의 토대라고 이해되지만, 기술은 명백히 순수한 자연과학적 사태가 아니다. 기술은 동시에 역사적인 사태이기도 하다. 인류가 자연에 대해 제기하는 물음들은 인류의 생산 상태에 의해 함께 조건 지워져 있다. 이 지점이 실증주의가 좌절하는 지점이다. 실증주의는 기술의 발전 속에서 자연과학의 진보만 인식할 수 있었을 뿐 사회의 퇴보는 인식하지 못했다. 기술발전이 자본주의에 의해 함께 결정적으로 조건 지워졌다는 사실을 실증주의는 간과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요즘의 논의도 함께 생각해볼 필요)

기술의 발전을 두고 19세기에는 기술의 불행한 수용이 나타남. 기술의 불행한 수용이란 곧 기술이 단지 상품 생산을 위해서만 사회에 봉사하는 상황을 뛰어넘으려고 하는 새로운 시도들이 도달한 결과를 말하는데, 생시몽주의자들의 산업문학, 막심 뒤캉 식의 사실주의(기관차에서 미래의 성녀를 봄), 루트비히 파우(“철도는 가장 아름다운 (천사의) 날개 한쌍보다 가치있다”) 등이 그 예다. 19세기 시민들은 기술발전의 쾌적함만 경험.

20세기에 새로운 경험이 이루어졌는데, 20세기에 사람들은 교통수단들의 빠른 속도라든지 말과 글을 다양하게 복제하는 기구들의 능력이 사람들의 욕구를 어떻게 능가하는지를 체험하게 된다. 기술이 이런 한계를 넘어 발전시킨 에너지들은 파괴적이다. 그 에너지들은 우선 전쟁기술과 전쟁준비를 위한 저널리즘적 예비작업을 촉진하게 된다. 사회민주주의는 실증주의의 환상에 대항했다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 환상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회민주주의는 미래가 노동을 통해 풍작의 축복을 가져다주리라고 믿었다.

3. 문화 개념 및 문화사 비판

푹스는 이런 시기에 교육받았고, 그의 저작은 문화사에 뗄 수 없이 부착된 문제점을 공유하고 있다. 엥겔스는 사적 유물론을 문화의 역사로 정의했는데, (이를 잘못 오해하게 되면) 이제는 독자성의 가상이 벗겨진 개별 분과들의 연구는 문화사의 연구에 합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고, 문화사의 내용들을 특출한 위치로 부각시킬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적 유물론자는 문화사의 그런 가상적, 허위적 특출함을 거리를 두고 대한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문화유산을 만들어낸 위대한 천재들의 노고뿐만 아니라 그 천재들과 함께 살았던 무명의 동시대인들의 노역을 생각한다.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 아닌 문화의 기록이란 없다. 문화사는 이런 근본적 의미에 합당할 수 없다.

역사적 유물론자에게 과거의 작품은 완결되어 있지 않다. 역사적 유물론은 과거의 작품이 사물이 되고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되어 품 안에 굴러들어오는 시대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구성물의 총체가 그것들이 생겨나게 되는 생산 과정으로부터는 아닐지라도 그것들이 존속하게 되는 과정으로부터 독립되어 관찰되는 형상물들의 총체를 뜻하는 문화 개념은 그에게 물신적 특성을 지닌다. 그런 문화는 물화되어 나타나며, 기념비적인 것들로 이루어진 침적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변증법적 문화사라는 개념은 모순적인데, 왜냐하면 역사의 연속성은 변증법에 의해 폭파되고 나면 그 어느 부분보다 사람들이 문화라 칭하는 부분에서 가장 멀리 흩뜨려지기 때문이다. 문화사는 겉보기에만 통찰의 진전을 보여주고 변증법적 진전을 보여주는 법은 한번도 없다. 왜냐하면 문화사엔 파괴적 요인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문화사는 인류의 등에 쌓이는 보화의 무게를 증가시키지만, 문화사는 그 보화를 뒤흔들어 그것을 수중에 넣을 수 있도록 하는 힘은 주지 않는다. 사회민주당의 교육(“지식이 힘이다”)도 마찬가지 문제를 갖는다.

4. 의고전주의 예술관에 대한 푹스의 비판

푹스의 수집가적인 면이 이론가로서의 그를 넘어서게 만듬. 캐리커처, 포르노적 묘사 같은 한계영역까지 진출하면서 전통적 예술사의 도식들을 무력화한 수집가.

푹스는 의고전주의적 예술관과 전면적으로 결별. 부르주아 계급이 의고전주의적 예술관 발전시키며 사용한 개념들, 아름다운 가상, 조화, 다양한 것들의 통일 같은 개념들을 버림. 푹스는 때로 고대 자체에 맞서서도 격렬하고 뻣뻣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로댕과 막스 슬레포크트의 작품을 근거로 그는 “고대의 미가 지고의 동물적 형식이었다면 새로운 미는 어떤 웅장한 정신적, 영혼적 내용으로 가득 채워지게 될 것”이라고 말함.

그러나 그렇다고 관념론적 예술관이 완전히 혁파되었다고 생각하면 오산. 관념론적 예술관을 뒤엎는 일은 역사학이 해야 할 일인데, 이때 역사학의 대상은 어떤 단순한 사실들의 뭉치가 아니라 오히려 과거라는 씨줄이 현재라는 직조 속에 엮여 넣어진 상태를 나타내는 일군의 소수의 실들이다(인과율적 결합이 아니라 변증법적 직조). 순전한 사실성에서 벗어난 역사적 대상은 어떠한 ‘기리는 평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런 역사적 대상은 현재성과의 애매모호한 유사점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현재성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엄밀한 변증법적 과제 속에서 구성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푹스가 겨냥한 것도 그것이다.

그는 이를 성화상의 해석, 대중예술에 대한 관찰, 복제기술에 대한 연구에서 했다. 이 세 가지 모티브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전통적 예술관에 비추어보면 파괴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인식에 대한 지침을 내포한다는 것이다. 복제기술에 대한 연구는 수용의 결정적 중요성을 밝혀준다. 대중예술에 대한 관찰은 천재 개념을 수정할 수 있게 해준다. 성화상에 대한 해석은 형식주의가 자행하는 원권행위를 하지 못하게 만든다. 푹스는 형식주의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푹스는 예술적인 시각의 변화라는 것이 어떤 변화한 미적 이상에서보다는 오히려 보다 더 근원적인 과정들(경제적, 기술적 변화를 통해 시작되는 과정들)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푹스는 “이런 형식적 요인들이야말로 그 시대의 변화된 분위기로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고 하여 문화사적 범주들이 지니는 의심스런 면을 시사한다.

(푹스가 논쟁과 토론의 결여로 인해 부르주아적 특성이 나타나고 있음에 대한 벤야민의 지적)

5. 푹스의 진화론적 편향

푹스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쁨과는 달랐다. 푹스는 지칠줄 모르게 캐리커처의 사료적 가치와 권위를 강조했다. 그는 이따금 “진리는 극단적인 것 속에 있다”고 표현했는데, 캐리커처는 그에겐 “모든 객관적 예술의 출발점이 되는 형식”이다.

후기의 <당조의 조형예술>에서 푹스는 그로테스크한 것을 감각적으로 표상가능한 것을 최고로 고양시킨 것이며 한 시대의 넘쳐흐르는 기운의 표현이라고 말하면서, 퇴폐적 시대나 병적 두뇌를 가진 자들도 그로테스크한 형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 경우 그로테스크한 것은 세계와 삶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에 대한 충격적 반작용의 표현이라고 본다.

이는 푹스의 저작의 대중적 인기의 이유를 알게 해주는데, 푹스는 기본 개념들을 가치평가와 융합시킬 줄 아는 재능을 가지고 있고, 게다가 이 평가들은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그로테스크한 것을 서술할 때도 그렇고 에로틱 캐리커처를 서술할 때도 그렇다. 이런 서술은 몰락기에는 ‘외설’이나 “간지럽게 하는 감각적 자극”이고, 상승기에는 “흘러넘치는 욕구와 분출하는 힘의 표현”이다. 푹스가 끌어들이는 것들은 때로는 개화기와 몰락기의 가치 개념들이고 때로는 건강한 것과 병든 것의 가치개념이다. 그는 바로크와 같은 균열이 난 예술시대를 저평가하고 르네상스를 고평가하는데, 창조력에 대한 그의 숭배 때문이다.

독창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푹스에게 생물학적 요소가 가장 혼입된 개념이다. 천재가 종종 호색가의 면모를 지니고 등장한다면 푹스가 거리를 두는 예술가들은 남성적 요소가 줄어든 사람들로 나타난다. 예술창작을 특징짓는 분출적이고 직접적 요소들은 예술작품을 파악하는 푹스의 관점을 상당히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요소들은 종종 그의 경우 지각과 판단 사이에 놓여있는 어떤 비약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사회민주주의 이론들과 긴밀히 관련된 일련의 생각이 푸크에게 나타난다. 다윈주의 또는 진화론적 역사관은 ‘발전’을 보증하는 역할을 맡았고, 역사는 결정론적 특성을 띠게 되었고 당의 승리는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었다.” 푹스는 수정주의(사민주의)에 늘 거리를 두었고, 그의 본능적 정치감각과 호전적 기질은 그를 당의 좌파로 나아가게 했지만 이론가로서의 그는 그러한 수정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결정주의와 낙관주의).

6. 수집가로서의 푹스: 프랑스판 혈통

푹스의 역사관을 관통하는 파토스는 1830년의 민주주의적 파토스, 특히 빅토르 위고의 그것이다. “진보라는 것은 신의 걸음걸이 자체이다.” 그리고 일반 투표권은 이 걸음의 보조를 측정하는 우주의 시계이다.

프랑스는 수집가 푹스에게 하나의 고향인 셈이다. 수집가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발자크가 수집가에게 하나의 기념비를 세워주었지만 그것은 낭만주의적인 의미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다. 발자크는 (특히 <사촌 퐁스>에서) “소유하고 있는 자”를 묘사하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백만장자’라는 말은 그에게 ‘수집가’라는 말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푹스라는 인물의 활동과 전모는 사람들이 낭만주의자에게서 기대할 만한 이미지보다 발자크가 그린 수집가의 이미지에 가깝다. 실로 사람들은 이 남자가 지닌 생명의 심지를 가리키면서 수집가로서의 푹스는 진정으로 발자크적이고 또 그는 발자크의 구상을 훨씬 능가하는 발자크적 인물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보물들을 보관하는 자로 자처하는 어떤 남자의 성실성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수집가의 노출증이 그에게 있다. 푹스는 마구 파헤치고 다니는 수집광의 유형에 속한다.

7. 역사라로서의 푹스: 독일판 혈통

독일판 혈통은 역사가의 혈통이다. 역사가로서 푹스에게 특징적인 도덕적인 엄격성은 그에게 독일적 특성을 부여해준다. 게르비누스와 비교될만한데, 게르비누스에게서나 푸크에게서는 남성적/자발적/관조적인 면이 여성적/수동적인 면을 희생시키며 나타난다. 게르비누스가 저술활동을 한 것은 부르주아지가 정치적 에너지가 충만했던 상승기였고, 푹스가 저술활동을 한 것은 예술의 정치적 에너지가 감소하던 제국주의 시대였지만, 게르비누스가 기준으로 삼은 척도를 푹스도 자신의 척도로 삼았다. 푹스의 도덕주의의 원천은 독일적 자코뱅주의인데, 이것의 기념비가 프리드리히 슐로서의 세계사이고, 푹스는 젊은 시절 그것을 읽었다.

시민적 도덕주의(부르주아적 도덕주의)는 푹스에게서 유물론적 요소와 충돌한다. 그러나 푹스는 그의 도덕적 역사관과 사적 유물론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고 확신하고 있고, 여기에 하나의 환상이 지배한다. 이 환상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널리 만연되어 있는, 참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는 견해, 즉 시민 자신이 찬양했던 시민 혁명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근간을 이룬다고 하는 견해이다.

시민 혁명들의 유심론을 살펴봐야 한다. 이 유심론을 관통하는 금실을 지은 것이 도덕이다. 시민계급의 도덕은 내면성이라는 징표 속에 있고 이 내면성의 요체는 양심이다. 로베스피에르적 공민의 양심이든, 칸트적 세계시민의 양심이든 간에,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이익에는 합치하지 않는) 부르주아지의 태도는 도덕적인 장치로서 양심이라는 것을 공표했다. 양심은 이타주의를 표방한다.

이렇게 해서 (부르주아적) 계급도덕이 관철되는데, 그것은 무의식중에 관철된다. 이 계급도덕을 세우기 위해 시민 계급이 의식을 필요로 했다기보다는 오히려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도덕을 무너뜨리기 위해 의식을 필요로 한다. 푹스는 이런 사정에 공정하지 못한데, 왜냐하면 그는 그의 공격이 부르주아지의 양심을 겨냥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푹스는 부르주아지의 도덕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지만 선한 양심이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시하려는 생각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 유물론자에게는 명약관화하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선한 양심이라는 개념 속에서 시민적 계급도덕의 담지자를 인식할 뿐 아니라 이런 개념이 도덕적 무질서와 경제적 무계획성의 유대관계를 조장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이 속한 계급이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행동방식, 또 그 계급이 생산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인해 취하게 되는 행동방식보다는 개개인의 의식적 이해관계에 더 주목하는 관찰방식은 결과적으로 이데올로기 형성에서 의식적 요인을 과대평가하게 만든다. 이것이 푹스에게서 나타나는데, 우리는 여기서 오해의 핵심에 접근하게 된다. 이 오해는 착취 때문에 허위의식이 생겨난다는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 착취자들의 측면에서 볼 때는 올바른 의식이 그들에게는 도덕적으로 성가신 것이기 때문에 허위의식이 생겨난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그러나 ‘특권층’의 양심의 가책은 초기의 착취형태를 두고 보면 결코 자명한 것이 못된다. 물화 과정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관계만 불투명해진 것이 아니라 이 관계의 실질적 주체 자신들도 안개에 휩싸인다. 경제생활에서 권력자와 피착취자 사이에는 사법관료와 행정관료라는 장치가 끼어들게 되는데 이 장치의 구성원들은 충분히 책임있는 도덕적 주체로서 기능을 더 이상 발휘하지 못한다. 이 책임의식이라는 것은 불구상태의 무의식적 표현이다.

8. 푹스의 정신분석학 연구의 한계

푹스의 사적 유물론에 남아있는 도덕주의는 정신분석학에 의해서도 동요되지 않았다.

성 심리학적 문제는 부르주아지의 지배 이래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녀왔다. 성적 쾌락의 넓은 영역들을 금기시하게 된 것이 이로부터 연원한다. 성적 금기에 의해 대중 속에서 생산되는 억압은 마조히스트적 콤플렉스와 사디스트적 콤플렉스를 조장한다. 권력자들은 이런 콤플렉스에 그들의 정책 수행에 가장 적절하다고 보이는 대상을 제공했다. 푹스의 동년배 프랑크 베대킨트와 달리 이런 연관관계에 대해 푹스는 사회적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자연사라는 우회로를 통해 그런 비판을 만회하고 있는 구절은 의미심장한데, 난장(오르지)을 옹호하는 다음과 같은 그의 탁월한 변론이 그것이다.

“난장에 대한 욕구는 문화가 지닌 가장 귀중한 경향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그런 나장이 바로 우리를 동물과 구별시키는 요소들의 하나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동물은 인간과는 달리 난장이라는 것을 모른다.”

푹스의 심리학적 역사적 관찰방식은 의상의 역사를 위해 생산적이 되었다. 유행만큼 푹스의 삼중적 관심(역사적, 사회적, 에로틱한 관심)에 부응할만한 대상도 없었다. 근 유행이 지배 수단의 역할을 한다는 점을 놓치지 않는다. 유행이 신분간 섬세한 차이들을 표현해주듯이 계급간 현저한 차이를 날카롭게 주시한다.

푹스의 전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창조적인 것에 대한 숭배는 그의 정신분석학적 연구를 통해 새로운 자양분을 취했지만 그는 억압과 콤플렉스에 관한 이론은 되도록 피함으로써 그의 도덕주의적 견해를 수정하지 못했다. 푹스에게서 역사적 유물론이 무의식적인 계급 이해관계보다 개인의 의식적 경제 이해관계로부터 사안을 도출해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창조적 충동 역시 무의식적인 것보다는 의식적 감각적 의도에 더 근접해 있다.

9. 푹스의 대상 도미에

푹스에게는 도미에(캐리커처 화가)보다 더 생동감을 주는 형상은 없었다. 그는 한편으로 도미에의 예술 속에 들어있는 모성적 요소를 간파하고 인상 깊게 해석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 반대 극인 남성적 면과 전투적 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도미에가 진정으로 푹스를 매료했던 것은 단말마적인 요소였다. 도미에는 파리사람들의 사적, 공적 삶을 단말마적인 고통의 언어로 옮겨 놓았다. 그를 가장 감동시킨 것은 신체 전체가 경기를 할 때처럼 긴장된 상태, 전신 근육의 흥분상태들이다. 이것은 신체의 최고의 허탈 상태를 도미에만큼 감동적으로 그려내지 못했다는 말과 모순되지 않는다. 푹스가 말하듯 도미에의 구상은 가소적(plastisch)구상과 깊은 유사성이 있다. 그는 그의 시대가 그에게 제공해주는 인물 유형들을 몰래 찾아내어 이를테면 찌푸린 얼굴을 하고 있는 올림픽 경기의 우승자들처럼 시상대에 올려 전시한 것이다.

푹스가 도미에에 대해 말할 때 그의 모든 힘이 약동한다. 어떤 다른 대상도 그의 박식함으로부터 이처럼 에언적 광채를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10.

도미에는 연구자로서의 푹스만이 아니라 수집가로서의 푹스에게도 가장 성공적인 대상이었다. 푹스는 박물관에 대해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 유독 그만 그랬던 것은 아니고 공쿠르 형제는 이 점에서 선배다.

박물관이 노리고 있는 것은 걸작들이다. 푹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과거의 문화를 축제일에 입는 화려한 의상 속에서 보고 있으며 빈약한 평상복의 옷차림을 통해 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위대한 수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대상선택의 독창성이다. 푹스 또한 이 대열에 놓을 수 있다. 그의 의도는 예술작품을 사회에 되돌려줌으로써 예술작품에 현재적 삶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예술시장에서 물신숭배적 마력을 갖는 것은 대가의 이름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푹스가 예술사를 대가라는 이름의 물신숭배로부터 해방시키는 단초를 마련한 것은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푹스는 대중예술이 지니는 특수한 성격과 그가 역사적 유물론으로부터 획득했던 충동들을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 중 하나이다. 대중예술에 대한 연구는 예술작품의 기술복제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푹스는 이렇게 말했다. “[지배자를 대체하는] 모든 커다란 역사적 변혁들은 이미지 복제 기술상의 변화도 가져온다....” 푹스의 이런 통찰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따금씩 그의 시대를 앞서가는 명석한 통찰을 할 수 있었는데, 고대는 캐리커처를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 해명함에 있어서도 그랬다. “고대에는 주화밖에는 아무런 저렴한 복제 형태도 없었다.” 주화 표면은 너무 좁아서 캐리커처를 그릴 공간이 없었다.

백안시 당하는 경전(canon) 외적 사물들에 시선을 주는 것은 푹스의 강점이다. 맑스주의가 그 단초밖에 제시하지 못했던 그런 사물들로 향하는 길을 수집가로서 푹스가 혼자 힘으로 개쳑했다. 수집가 푹스는 소유라는 ‘저속한’ 소망을 만족시키면서 그 속에서 생산력과 대중이 화합하여 역사적인 인간의 상들이 생겨나는 예술에 대한 연구를 시도했던 것이다.

중국의 용마루 기와를 창조해낸 사람이 누구였는지 증언해주는 영웅서는 한권도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푹스. 이름 없는 자들과 그들의 솜씨의 흔적을 보조해준 것을 향한 그러한 관찰이, 사람들이 또다시 인류의 머리 위에 내리덮으려 하는 지도자 숭배(총통숭배)보다는 더 인류의 인간화에 기여하지 않을지는, 과거가 가르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만 많은 문제들처럼, 또다시 미래가 가르쳐줄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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