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 1118(토) 발제_거대한 전환 16~17장
영민
/ 2017-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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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_칼 폴라니
인간, 자연, 화폐까지 모두 상품이라는 이 어처구니없는 상품 허구가 보편화되면서 인간의 경제는 모두 자기 조정 시장으로 재구성되게 된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상품의 시장은 동시적이고도 지구적으로 나타나야만 비로소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구빈법의 철폐, 금본위제의 시행, 곡물법 철폐를 통한 자유 무역 등과 같은 "신앙적" 행동이 취해지게 되며, 19세기 문명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유토피아적 행동이 현실에 실현되는 것을 사회라는 실체는 단 한순간도 견딜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노동 조합과 정당을 만들어 저항했으며, 토지 세력은 보호 관세와 반동적 군국주의 공세 등을 통해 저항했으며, 심지어 자본주의적 기업들마저 중앙 은행을 통한 원활한 통화 및 신용 공급을 요구하며 저항했다. 폴라니가 말하는 "이중적 운동"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이중적 운동이야말로 폴라니가 강조하는 시장 경제의 유토피아적 성격과 이에 맞서는 사 회 실재의 발견이 표출되는 지점이다. 시장 경제가 나타나게 된 것은 자유 방임은커녕 엄청난 국가 계획에 의한 것이었지만, 시장 경제에 맞선 사회의 자기 보호 운동은 아주 자발 적 자생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달성 불능의 어거지 유토피아에 대해 사회라는 실체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_“시장 경제 유토피아와 사회의 발견(홍기빈)” 중에서
제16장 시장과 생산 조직
심지어 자본주의 영리기업마저 시장 메커니즘의 무제한적 작동에서 피난처를 찾아야만 했다. 사실상 인간과 자연의 경우에서나 마찬가지로 생산 기업의 경우에서도 시장 체제의 위협은 실질적이고도 객관적인 것이었다. 시장 체제에서 화폐의 공급이 조직되는 방식으로 말미암아 이 생산 기업들 또한 보호의 필요가 생겨났던 것이다. 사실 현대 중앙은행 체제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보호 장치를 제공하려는 목적에서 발전된 장치로서, 이것이 없다면 시장경제는 스스로 낳은 자식들인 모든 종류의 영리 기업들을 파괴하게 되는 결말을 낳았을 것이다. 하지만 종국에 가면 바로 이러한 형태의 보호 장치 자체가 바로 국제 시장 체제의 몰락에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현실세계에서 화폐로 기능하고 있는 상품은 보통 금이나 은이다. 그 양은 물론 증가될 수 있지만 짧은 시간 내에 많이 증가시킬 수는 없다. 그런데 이렇게 화폐의 양이 함께 늘어나주지 않는 가운데 생산과 교역량만 팽창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가격수준의 하락이 벌어지는 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논하고자 하는 유형의 파괴적 디플레이션이다.
화폐의 부족은 17세기 상인 공동체 내에서 항시적이고도 심각한 불만사항이었다. 그래서 교역량이 늘어나는 시점에 정화로 사용되는 금화와 은화의 수량이 제한되어 있으면 강제적 디플레이션이 나타날 위험이 있고, 그래서 이로부터 상업을 보호하기 위해 명목화폐가 일찍부터 발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공적 화폐의 매개가 없었다면 시장경제는 아예 성립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나폴레옹 전쟁 시기 무렵 영국 파운드화의 외환 가치를 안정시키는 데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나타나게 되었고, 그 결과 금본위제가 도입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국내 경제의 활성화라는 목적에 관한 한 금화와 같은 정화는 충분한 화폐가 될 수 없다. 금화는 기본적으로 금이라는 상품이며 그것의 수량도 임의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시장에서의 교역량의 증가란 그렇게 급격하게 늘어날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요구되는 통화량도 그렇게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명목 화폐가 없다면 영리 활동은 그 양이 줄어들든가 아니면 아주 훨씬 더 낮은 가격 수준에서 이루어지든가 할 수 밖에 없는데, 이에 따라서 경기 침체를 가져오고 실업을 빚어내게 되는 것이다.
19세기라는 조건에서는 대외무역과 금본위제가 국내의 영리활동의 여러 필요 사항에 대해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대해서는 논쟁조차 없었다. 금본위제는 자국 통화의 외환 가치가 하락할 위험에 처할 때마다 국내의 가격 수준을 낮추어야만 작동할 수 있었다. 그러한 디플레이션이 신용의 제한을 통해서 벌어지게끔 되어 있었음을 볼 때, 상품 화폐의 작동이 국내의 신용 체제의 작동을 교란하게 되어 있다는 것은 논리적 필연이다. 이것이 국내의 영리 활동에서 향존하는 위험이었다. 하지만 명목 화폐를 완전히 버리고서 시중에 유통되는 통화를 오로지 금화와 같은 상품 화폐로만 제한한다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앙은행 체제는 이러한 신용화폐의 결점을 크게 완화시켜주었다. 한 나라 안에서의 신용공급을 중앙에 집중시킴으로써 디플레이션 과정에서 영리 활동과 고용이 한꺼번에 혼란 지경에 빠지는 사태를 피하고, 디플레이션의 충격을 흡수하면서 그 부담을 온 나라에 고르게 펼쳐내는 방식으로 조직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디플레이션의 효과를 완화시키는 여러 장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영리 활동이 완전한 혼란 상태에 빠지고 대규모 실업이 계속해서 발생하는 사태가 반복해서 나타난 바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금본위제의 죄를 묻는 줒아 가운데에서 가장 강력한 주장이라 할 것이다.
화폐의 경우는 토지 및 노동과 아주 생생한 닮은꼴을 보여준다. 상품 허구를 이 세 가지 각각에 적용한 결과 세 가지 모두 실질적으로 시장 체제에 포괄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순간 사회에 대한 심대한 위험이 그로부터 자라나게 된 것이다. 화폐의 경우에서 그 위협의 피해자가 된 것은 생산 기업이었으니, 금이라는 상품 화폐를 사용하여 가격 수준의 하락이 생겨날 때마다 위험에 처하는 것이 다름아닌 그 생산 기업의 존재 자체였던 것이다. 결국 여기에서마저 보호 조치들이 취해져야 했고, 그 결과 시장의 자기 운전 메커니즘은 작동을 멈추게 되고 말았다. 중앙은행이 나타나게 되자 금본위제의 자동적 작동이란 그저 허울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정치 영역과 완전히 분리된 시장 사회란 결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리카도 이래로 고전파 경제학은 바로 그러한 비현실적 가정을 기초로 삼고 있었으며, 고전파 경제학의 개념들과 여러 가정들 또한 이러한 전제들 위에서만 이해가 가능한 것이었다.
1920년대에는 아직 금본위제가 안정과 번영의 회복에서 최고의 전제 조건이라고 믿었고, 그 결과 직업적인 수호자들이었던 은행가들이 내놓는 요구는 무엇이든 그를 통해 분명히 환율이 안정될 것이라는 약속만 있다면 아무도 그것을 너무 부담스럽다고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29년 이후 이러한 목표의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되자 최고의 지상 과제는 국내 통화의 안정으로 바뀌었고, 이를 달성할 자격 요건으로 보자면 은행가들은 그 누구보다도 뒤처지는 존재였던 것이다.
시장경제의 파괴가 가장 급작스럽게 나타난 곳이 바로 화폐 영역이었다. 물론 농업 진흥 관세도 외국 농산물의 수입을 방해하여 자유무역을 깨버렸다. 또 노동시장의 협소화와 규제 또한 고용 계약 당사자들이 임의로 협상할 수 있는 여지를 크게 줄여버렸다. 하지만 화폐 영역에서만큼 공식적으로 시장 메커니즘이 급작스럽고도 완벽하게 균열을 일으켜 버린 사례는 노동의 경우에서도 토지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1929년의 대공황이 세계 무역의 큰 부분을 휩쓸어버리지만, 그래도 시장경제라는 방법 자체에 큰 변화가 생겨난 것도 아니었고, 지배적인 사상에 변화가 생겨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금본위제의 최종적인 실패는 바로 시장경제의 최종적인 붕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제17장 자기조정기능, 망가지다
1879~1929년의 반세기 동안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밀도 있는 단위들로 변해갔지만, 그 내부에는 또한 강력한 붕괴의 긴장이 잠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전개의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시장 경제의 자기조정 기능이 망가졌다는 데에 있었다. 시장 사회는 시장 메커니즘의 필요에 사회 전체가 복종하도록 만들어진 사회이다. 따라서 시장 메커니즘의 기능 부전이 발생하게 되면 사회의 몸체 자체에 긴장이 쌓여가게 마련이다.
자기조정이 망가진 것은 보호주의의 결과이다. 자기조정 시장 체제는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무언가 아주 새로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그것은 생산의 기본 요소인 토지, 노동, 화폐에 대해서도 시장이 성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마저 시장들이 실제로 작동하게 되면 사회는 파괴의 위협을 당하므로 공동체 스스로 자기 보호 행동이 시작된다. 따라서 자기조정 시장체제는 그러한 기본 요소 시장의 확립을 저지하려 들 것이고, 그것들이 이미 확립된 상태라면 자유로운 작동을 방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게 될 것임을 살펴본 바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시장경제가 스스로 기능할 능력이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서 미국을 예로 들어왔다. 미국에서는 1세기 동안 노동, 토지, 화폐가 완전히 자유롭게 거래되었지만 어떠한 사회 보호 조치도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입 관세를 제외하면 산업은 정부 개입으로 방해받는 일 없이 굴러갔다는 것이다.
왜 미국에서 이러한 일이 가능했는가? 노동, 토지, 화폐가 무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이 사라지게 되자 곧바로 사회 보호가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오히려 긍정적인 방향과 부정적인 방향 모두에서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것에는 결국 사회적 보호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는 우리의 핵심 주장을 입증해주는 충격적인 증거가 된다.
보호주의는 당시 도처에서 출현하던 사회생활의 새로운 단위를 단단한 껍질로 둘러 씌우고 말았다. 물론 이 새로운 실체의 틀 자체는 이전부터 존재하던 민족이라는 단위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예전의 널널한 모습의 민족에서 완전히 환골탈태한 것이었다. 민족은 이렇게 새로운 유형의 갑각류가 되었는데, 그 갑각류 생물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해주는 것이 바로 그 나라의 화폐였다. 이 화폐는 그 나라 특유의 명목 화폐였으며, 이 명목 화폐가 유통되도록 가치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금이나 은이 아니라 그 전까지 알려져 있는 어떤 정치체보다도 더욱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절대성을 내세운 새로운 형태의 주권 국가의 권력이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이렇게 다양한 국민국가들, 또 그들이 발행한 여러 통화들이 중요성을 가지게 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보호주의의 원동력은 세 개로 갈라져 있었다. 노동, 토지, 화폐 모두가 각각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토지와 노동 문제가 농민이나 노동자들처럼 비록 그 폭은 넓어도 아주 분명한 세력과 결부되어 있었던 것에 반하여 통화의 보호주의는 그보다 훨씬 더 큰 폭에서 전 국민적인 문제였기에 다종다기한 이해 세력들을 종종 집단적인 전체로 융합시킬 수 있는 요소였다. 물론 통화 정책 자체도 통합의 경향만큼이나 여러 세력들을 분열시킬 가능성도 있지만, 통화 체제는 객관적으로 경제적 힘들 가운데에서 전 나라를 하나로 통합시키는 가장 강력한 힘이었던 것이다.
보호주의 운동은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며 널리 분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단 그것이 시작되고 나면 그 결과로서 그 운동의 지속을 적극적인 자기 이익으로 삼는 집단이 반드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국가가 어느 선까지 경제에 개입해 들어가는가는 그 나라 정치영역이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리고 경제적 난관이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결정되었다.
국제 차원에서도 시장의 불완전한 자기조정 기능을 보완하는 데에 정치적 방법이 쓰이게 되었다.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나라들은 그 부의 생산 능력, 수출 능력, 무역, 해운, 은행업의 경험 등에서 엄연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리카도의 무역 및 통화 이론은 경솔하게도 이러한 차이를 완전히 무시해버렸다. 자유주의 이론대로 하면 모든 나라는 세계 무역의 우주 위에 떠 있는 일개 원자일 뿐이며, 따라서 영국도 덴마크나 과테말라 등과 아무 차이가 없는 셈이다. 현실을 보자. 세계는 한정된 수의 나라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 나라들은 자본 수출국과 자본 수입국으로, 수출국과 실질적인 자급자족 국가로, 다양한 수출품을 가지고 있는 나라와 커피나 밀과 같은 단일 상품을 팔아야만 수입도 외채 차입도 할 수 있는 나라로 갈라져 있다. 이론에서는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현실에서 그러한 차이가 낳는 중대한 결과 들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자유주이자들이 좋아하는 이른바 자기조정 시장 체제라면 이러한 종류의 난점들은 애초부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실제 세계에서 벌어진 일은 달랐다. 군대를 동원하여 협박하지 않으면 채무 지불도 점점 성사되기 힘들어졌고, 함대의 도움 없이는 식민지 지역과 무역을 유지하기도 점점 힘들어졌다. 그래서 갈수록 무역로의 확장이 정부의 이런저런 필요에 따라 사방팔방으로 뻗어가는 서양 각국의 침략의 깃발을 졸졸 따라가는 일이 많아졌다. 결국 세계 시장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정치적 개입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또한 갈수록 더욱 명명백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