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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1122 발제_II.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 - Part 2
정수 / 2017-11-21 / 조회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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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 - Part2 (80~103)

 

                                                                                                                                                                                                                                                                                    20171121 왕정수

 

 

 <데리다는 푸코의 데카르트 저작 '성찰'의 글쓰기와 '차연'사이의 은폐되고 있는 분절점을 드러냄으로써 광기(비언어)가 코기토 영역밖에 분리되어 놓인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말함으로 구조주의의 이원론적 개념을 해체하려 함.>  

 

 내가 알기로 푸코는 첫 '성찰'에서 이렇게 광기와 망상을 감각과 꿈으로 부터 분리시킨 최초의 사람이다. 망상과 광기를 그 철학적 의미와 방법론적 기능속에서 분리시킨 최초의 사람인 것이다. 이것은 그의 책읽기의 독창적인 점이다그러나 고전 시대의 해석자들이 이러한 분리를 적절하다고 판단하지 않은 것이 부주의 때문일까

 

 

 그럼 데카르트가 말하고 있는 기호 자체의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해 보도록 하자

 

1. 내가 꿈속에서 지각하는 모든 것은 데카르트가 말하듯이 '가짜요 착각'일 수 있다. 푸코에 의하면 미친 행위처럼 간주되어 배제된 것이 여기서는 꿈의 가능성으로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모든 꿈 표상은 착각이라고 가정하자고 말한다.  그 표상이 아무리 착각이라 할지라도, 표상된 것에 대한 표상의 관계가 아무리 가짜라 할지라도 그런데 이 표상들과 이 이미지들, 데카르트적 의미에서의 이 관념들 속에서 모든 것은 가짜이고 가공적일 수 있다. 색깔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감각적인 사물이다. 그러나 한 작품이 아무리 창의성과 상상력이 넘친다고 해도 다른 것으로 변할 수 없는 현실적이고 단순한 일부가 남는 것과 마찬가지로 꿈에는 환상적인 구성에 의해 전제된, 그 어떠한 분석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위장되지 않는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은 감각적이지도 상상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지성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 점에 푸코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감각으로부터 생긴 모든 의미, 모든 '관념'은 광기가 배제된 것과 동일한 이유로 진실의 영역에서 배제된다. 광기는 데카르트의 관심의 대상의 되는 감각적 착오 가운데 측정한 사례에 불과할 뿐 아니라 가장 중대한 것도 아니다

 

2. 푸코는 데카르트가 감각이 때로 우리를 속이는데, "때로 우리를 속인 것들은 절대로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라고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데카르트의 최종적으로 결정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회의에 두려움을 느끼고 반항하는 철학의 무경험가.비철학자가 놀라며 반박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데리다)는 꿈에 대한 참조는, 그러니까 데카르트가 억제했거나 배제했을 광기의 가능성에 비해 후퇴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대이다. 광기는 감각적 지각의 어떠한 영역들에만 우발적이고 부분적인 방식으로 영향을 끼쳤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잠자는 사람이나 혹은 꿈꾸고 있는 사람은 광인보다 더욱 미쳤다는 점이다. 꿈꾸는 사람은 진짜 지각으로부터 광인보다 더욱 더 멀리 있다는 점이다. 감각 기원의 관념들의 완전한 총체성은 의심스러워지고, '객관적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것은 정신 이상의 경우에서가 아니라 바로 잠의 경우에서이다. 결국 정신 이상의 가정은 적절한 예가 아니었다

 

a) 이 예는 감각적 지각의 영역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 광인이 언제나 매사에 착각하는 것은 아니다. 광인은 충분히 착각하지 않는다. 결코 충분히 미치지 않는다.

b) 이 예는 교육적인 차원에서 비효과적이고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철학자가 말하는 동안 철학자 자신이 광인일 수 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철학자가 이러한 철학자의 말을 이해하고 따라올 만큼 대담하지 못하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다시 푸코의 말을 들어보자.

 

1. 데카르트에게 있어서 광기란 감각적 오류의 많은 다른 사례들 가운데 하나, 게다가 가장 심각한 것도 아닌 하나로서만 인식된다.

2. 광기를 관념이나 표상이나 판단의 변형으로만 간주하여 고려함으로써 데카르트는 광기를 그 독자성에서 중화시키는 것 같다고.

 

그런데 이 두 진리는 우리들이 회의의 고유한,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비판적인 단계에 진입하면 곧 취약점을 드러내는 듯 하다.  

 

1. 데카르트는 악령 가정의 차용은 내가 가해졌기에 내가 제어할 수 없고, 내 책임이 아닌 전체적인 착란 상태의 가능성을, 전체적인 광기의 가능성을 소환할 것이다. 전면적인 착란, 'res cogitans'의 경계 밖의, 생각하는 주관성의 보안되고 문명화된 도시 국가 밖에 위치하는 육체의, 대상의, 육체-대상의 무질서에 그치지 않는 광기, 또한 순순히 이해 가능한 사유 대상 가운데에 명료하고 명확한 관념들 영역 가운데에, 자연적 회의에서 제외되는 수학적 진리들의 영역 가운데에 일대 전복을 초래할 광기의 가능성을.

 

철학적 담론과 철학적 커뮤니케이션(즉 언어 활동 그 자체)은 그것들의 지성으로 이해되는 의미를 가지려면, 다시 말해 담론의 본질과 소명에 부합하고자 하면 광기로부터 실태상으로, 그리고 동시에 원칙적으로 광기에서 벗어나 있어야만 한다. 그것들은 그들 자체 내에 정상성을 담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본질의 필연성으로서 그 어떠한 담론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이 필연성이 의미의 의미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어떠한 담론도 벗어날 수 없는 기만이나 강제 조치를 고발하는 담론조차도 벗어날 수 없는 본질의 필연성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엄밀히 푸코적이다.

 

푸코는 "광기, 그것은 작품의 부재이다."라고 말한다. 문장은 본질적으로 정상적인 것이다. 문장은 자체속에 정상성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만일 광기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위적이고 규정된 역사적 모든 구조를 너머 작품의 부재라 하면, 광기는 본질적으로 그리고 일반적으로 역사성 일반으로서의 인생을 절개하여 여는 행간의 휴지와 상처속에서의 침묵이요, 중단된 말이다. 이런저런 순간에 지키도록 규정된 침묵이 아니요 강요된 침묵도 아니며, 본질적으로 역사와 말을 개시하는 강제 조치, 금지에 결부된 침묵이다.

 

데카르트로 돌아오면 결국 철학자라면 사유의 내면으로부터 광기를 말해야만 할 때, 가능성의 차원 내애서만 그리고 허구의 언어를 통해서 혹은 언어의 허구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

언어란 광기와의 단절이므로 언어가 광기에 더욱 자유롭게 도전할 때, 광기에 더욱 가까이 접근할 때 언어는 더욱더 자체의 본질과 본래적 기능에 부합하고, 광기와 더욱 결별한다.      

 

2. 데카르트는 근본적인 회의의 단계 중에 광기를 내쫓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광기의 가능성을 예지적인 것의 중심에 안치시킬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어떤 명확한 인식도 원칙적으로 광기에서 면제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코기토가 광기를 벗어나는 것이 문자 그대로 코기토가 광기의 포착 밖에 있기 때문에, 또는 푸코가 말하듯이 '생각하는 나, 나는 광인일 수 없기'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코기토가 광기를 면하는 것은 단지 코기토 행위의 순간에 코기토 자체의 요청 속에서 비록 내가 미쳤다해도 비록 내 생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미친 생각이라 해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광기를, 자연적인 회의의 단계에서건 형이상학적인 회의의 단계에서건 결코 감금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광기를 자연적 회의의 최초 단계에서 비과장적 계기에 배제하는 척할 뿐이다."  

 

내가 미쳤건 미치지 않았건 'Cogito, sum'이 단어의 모든 의미에서 결국 광기는 사유의 하나의 사례이다. 이제 문제는 실태의 역사적인 그러한 구조의 형태 아래 결정된 모든 모순이 나타날 수 있는, 나타나되 규정된 의미와 무의미가 그것들의 공통된 기원에서 합류하는 그 제로 지점에 상관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한 지점으로 물러나는 것이다.

 

우리는 데카르트에 의해 코기토로서 규정된 이 제로 지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과 착란 사이에 규정된 모든 모순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기에 이 지점은 이 모순의, 시작되었거나 중단된 이 대화의 한정된 형식들의 역사가 그대로 나타날 수 있고 말해질 수 있는 지점이다. 그 지점은 전체성의 이야기로서, 그보다는 차라리 이성과 광기 사이에 일어나는 교류의 모든 결정된 형식들의 이야기로서 푸코가 하는 이야기의 가능성이 뿌리박고 있는 확고부동한 확신의 지점이다. 그것은 전체에서 벗어나는 것에 의해, 전체성을 사유하고자 하는 계획이 뿌리박는 지점이다.

 

내가 사유하는 것의 전체성이 허위 또는 광기에 영향을 받고 있다 해도, 비록 세계의 전체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해도, 비록 무의미가 내 사유의 내용을 포함하여 세계의 전체성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해도,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동안 존재한다.

 

 

회의와 데카르트적 코기토가 유례없고 특이한 과잉의 이러한 계획에 의해 강조되는 범위는 결정된 역사적 구조 내에 가두어 버리고자 하는 시도가, 비록 그것이 아무리 이해할 만한 것이라 해도 계획의 본질을 놓칠 위험이, 계획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할 위험이 있는 범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한 시도는 그 계획에 폭력을 행사할 위험이 있다.(왜냐하면 합리주의자들에, 의미에, 좋은 의미(양식)에 적용되는 폭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결국에는 푸코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것일 터이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희생자들은 언제나 의미의 사자요, 규정된 양식에 의해, 요컨대 충분히 자신을 분할하지 않으면서도 너무나 빨리 결정하는 양식인 분할의 양식에 의해 은폐되고 억압된 진짜 의미, 그리고 좋은 의미의 진짜 보유자들이기 때문이다.)

 

구조주의적 전체주의는 코기토에 의해 감금 행위를 하는 듯싶은데, 그 행위는 고전 시대의 것과 유사한 폭력 타입이라 할 수 있다. 나는 푸코의 책이 전체주의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적어도 출발점에서 역사성 일반의 기원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결국 역사주의로부터 탈피하고 있으니 말이다. 단지 그가 때로 계획의 실행 과정에서 전체주의적이 될 위험을 무릅쓴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데카르트적 코기토라고 불리는 흐름 가운데서, 과장법의 극점이 모든 순수한 광기 일반처럼 침묵을 지켜야 할 유일한 요소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데카르트는 이 극점에 도달하자마자 스스로 안심시키고자, 코기토 자체를 하나님을 통해 보장하고자, 코기토의 행위를 이성적인 이성의 행위와 동일화하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코기토와 시간화의 운동 사이의 연관에 주의해야 할 것이라면, 코기토를 반성하고자 하면, 코기토를 기억하고자 하면, 코기토를 전달하고자 하면 그리고 코기토의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면 사실상 사람들은 광인이 아니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 그리고 어떠한 일정 기억에 대한 참조와 함께 본질적인 '기력 상실'과 위기가 시작되는 것 같다. 또한 여기서 과장법과 광기의 방랑이, 이제 이유들의 영역에서 피신하고 안위를 도모하며 폐기되었던 진리들을 다시금 소유하기 위해 조급히 복귀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적어도 데카르트 텍스트에서 감금 작용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푸코의 책읽기는 내 눈에 강력하고 계시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인용하는 텍스트의 단계에서가 아니라, 코기토의 가장 날카로운 꼭지점에서의 즉각적인 경험에 뒤이어 오는 순간에서부터 그러하다. 가장 날카로운 코기토의 꼭지점에서, 즉 이성과 고아기가 아직 분리되지 못하고 있는 그때, 코기토의 편을 드는 것이 합리적인 질서로서의 이성의 편을 드는 것도, 무질서의 광기의 편을 드는 것도 아니고, 이성과 광기가 규정될 수 있고 말해질 수 있는 지점이 되는 원천을 포착하는 것이 되는 그때, 나는 푸코의 해석이 코기토가 구성된 철학적 담론 속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자신을 말하는 순간부터 빛을 발하는 듯 싶다.

, 거의 줄곧, 왜냐하면 만일 코기토가 광인에게도 유효한 것일 경우에도 미쳤다는 것은 코기토를 반성할 수 없고, 코기토를 말할 수 없는 것이 때문이다.    

 

코기토는 작품이기 이전에 광기이다. 광인은 악령을 거부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여간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데카르트가 코기토를 이해 가능성과 커뮤니케이션에 제시하는 순간, 즉 그가 타자를 위해 코기토를, 반성하는 순간에 코기토를 기재해야만 하는 그 연역 체계로부터, 다른 자아로서의 타자에 대한 이러한 관계를 통해 의미는 광기와 무의미에 대항하여 자기를 보장한다. 그리고 철학, 아마 그것은 미치리라는 불안에 대항하여 광기의 지금 거리에서 취해진 이러한 보장일 것이다.

 

철학이 안식을 찾으며 광기를 배제시키는 역사적 표현의 힘으로 철학이 스스로를 폭로한다는 것, 철학이 자신의 운동의 본질적이고 필수적인 기간인 위기와 자기 망각의 상태에 진입한다는 것을 고백하는 일이 된다. 그리고 아마 철학은 그런 거창한 고백일 것이다. 나는 공포속에서만, 미칠지 모르는 것에 대한 고백된 공포 속에서만 철학을 한다. 고백은 현재 순간에 망각이자 폭로요, 동시에 비호요 전시이다.

 

위기는 또한 푸코가 말하는 결단,구절 사이의 휴지이다. 로고스의 길과 로고스가 길을 잃는 길 아닌 길, 미로, 새로운 은유 사이의 선택과 분할의, 판결의 의미에서 결단이다. 요컨대 의미와 길과 무의미의 길, 존재와 비존재의 길 사이의, 이러한 분할에서 출발하여 이 분할 이후에, 로고스는 그의 개입의 필수적인 폭력 가운데 광기로서의 자기에서 떨어져 나오고, 자신에게서 멀리 유배를 떠나서 자신의 연원과 고유의 가능성을 잊는다. 유한성이라 불리는 것, 그것은 위기로서의 가능성이 아니던가? 위기 의식과 위기 망각의 어떤 동일성이 아니던가? 부정성의 생각과 부정성의 환원의 어떤 동일성이?

 

결국 그것은 이성의 위기요, 이성에의 접근이요, 이성의 발작이다. 사실 푸코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세상의 광기의 발작들이라고 부르는 것과 기이하게도 공범자적인 이성의 발작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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