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아Q정전> 1115(수) 후기 +1
삼월
/ 201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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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Q는 누구인가
루쉰이 쓴 소설 『아Q정전』은, 화자가 아Q라는 사람의 정전을 써주고 싶었으나 몇 해를 머뭇거리기만 했다는 말로 시작된다. 화자는 아Q가 후세에 전할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함을 알고 있으나, 설명하지 못할 마음 속 이유로 인해 아Q의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한다. 도대체 이 이야기의 배후에는 어떤 비장함이 숨어있는 것일까. 아Q의 이름 뒤에 붙은 ‘정전’은 정확한 기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 이 글은 ‘아Q라는 인물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다. 문제는 화자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아Q라는 인물이 도대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데 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공문서에서도 정체를 파악할 길 없는 이 아Q라는 인물은 심지어 이름마저도 확실치가 않다. 중국이 서양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한 탓에 아Q의 원래 이름에 쓰인 문자는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아Q를 부르는 사람들의 발음 속에서 한자와 알파벳을 혼용한 아Q, 혹은 아퀘이라는 괴상한 이름이 유추되기에 이르렀다. 아Q라는 이름에서 풍기는 국제적 면모와는 달리 아Q는 쇠망해가는 청 왕조의 백성으로 태어나 살아온 자였다. 그러니 죽은 이후에 아Q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 자체가, 희극이면서 동시에 비극이었던 아Q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아Q는 웨이좡이라는 시골 마을 외곽의 사당에 살고 있었다. 사당에 사는 아Q가 부리는 유일한 사치는 넉 냥짜리 초를 밤새 태우는 일이다. 루쉰은 그의 다른 글 「고향」에서 옛 친구를 만난 경험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종의 아들이었던 옛 친구 룬투는 루쉰이 이사를 가면서 남기는 물건들 중 향로와 촛대를 가지겠다고 한다. 루쉰은 척박한 삶 속에서도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는 룬투를 비웃지만, 한편 자신이 살아가면서 막연하게 품는 희망들 역시 그런 우상과 같을까봐 두려워한다. 아Q는 그런 두려움도 없이 사당에서 지내며, 마을사람들의 일을 돕는 날품팔이로 살아간다. 아Q의 문제는 오히려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는 데 있다. 현재의 일이건, 앞날의 일이건, 자신이 고귀한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남몰래 믿고 있는 아Q에게는 무엇도 두려울 게 없다.
아Q의 자신감은, 그의 비천한 성품이나 어리석음과 비례한다. 옛 문인들이 글자를 사용할 때 금기를 두었던 것처럼, 자칭 고귀한 핏줄을 타고났다는 아Q도 금기를 알고 있다. 그 금기는 부모의 이름자를 함부로 쓰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 자기 머리에 난 부스럼을 놀리지 못하도록 하는 데 쓰인다. 그렇다고 아Q가 민중을 핍박하고 지배하는 위치에 있는 자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마을 외곽에 사는 날품팔이인 아Q는 누구에게나 무시당하고 배척당한다. 그런 주제에 여자나 아이들처럼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약해보이는 이를 만날라치면 괴롭히고, 무시하려 든다.
아Q라는 인물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이 인물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 난감해진다. 핍박받는 민중은 대체로 선하고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통념 속 흔한 잣대로 이 인물을 보기도 힘들다. 아Q의 심술궂고 어리석은 행동은 동정도, 공감도 거부한다. 그러면서도 이 인물에는 어떤 전형성이 있다. 이 사회의 가장 말단에서, 그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 그리고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울분과 자기연민에만 갇혀 살아가는 자.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런 자를 전혀 본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2. 정신승리란 무엇인가
아Q는 스스로가 핍박받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늘 누군가를 경멸할 준비가 되어있다. 아Q의 마음속에는 쉬지 않고 우월감이 샘솟는다. 그 우월감을 밑천삼아 아Q는 가끔씩 자신보다 강해보이는 자와 맞서려고 하기도 한다. 그 대결은 아Q의 용기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어리석음만을 강조하는 꼴이 된다. 아Q가 유일하게 두뇌를 활용하여 하는 일은, 패배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헛된 자부심을 유지하는 일이다. 아Q는 이것을 자신만의 정신승리법이라 부른다. 아Q가 우리에게 이토록 친숙한 인물이 된 이유도 다 이 정신승리법 때문이다.
그러면 정신승리법이란 대체 무엇인가? 정신승리법의 목적은 진짜 승리에 있지 않다. 다만 패배의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실제로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패배의 고통만은 느끼지 않으면 된다. 이렇게 하기 위해 아Q는 얻어맞아도 상관없고, 스스로를 버러지라 칭해도 되며, 심지어는 자신의 뺨을 직접 때려 화풀이를 하기도 한다. 자신의 뺨을 때려 맞은 자는 자신이지만 때리는 자 역시 자신이니, 맞은 고통은 잊고 때릴 때의 쾌감만 기억하면 된다. 그러면 정신은 패배의 고통을 느끼지 않고, 승리감과 우월감에 도취된다. 이쯤 가면 패배의 고통을 빨리 잊어버리는 게 아니라 자신을 파괴하면서까지 우월감에 도취하려는 모습이다.
아Q가 그렇듯 지키고 싶어 하는 이 우월감의 정체는 무엇일까? 루쉰이 아Q를 통해 자주 묘사하듯, 이 우월감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아Q의 불분명한 가계도나 직업, 비천한 삶의 방식에서 이 우월감을 유지할 수 있는 현실적 판단은 도출될 수 없다. 오히려 아Q가 집착하는 우월감은 현실을 잊어버리고, 미래를 과장되게 낙관할 때만 보일 수 있는 상상 속에서 나타난다. 아Q가 살았던 청나라 말의 혼란기, 당시의 지배자들이 아편중독 속에서 미래의 불안을 잊고 과거의 영화 속에 취해있었던 것처럼 아Q 역시 무언가에 취해있다. 아Q가 집착한 정신승리는 아편과 마찬가지로, 그를 현실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했다. 둔중한 감각 속에서 희미한 빛을 따라 흔들리면서, 누군가가 이끄는 대로 길을 걸어갈 뿐이다. 그 길이 삶으로 이어지는지, 죽음으로 이어지는지 아Q는 궁금하지 않았다.
3. 누가 아Q를 죽였는가
처형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는 순간 아Q는 자신이 만났던 늑대 한 마리를 떠올린다. 굶주린 늑대는 일정한 간격으로 영원히 뒤를 따르며 그의 고기를 먹을 요량이었다고 아Q는 말한다. 도끼 한 자루와 허풍, 두둑한 배짱이 그를 살렸지만, 아Q는 멀리서도 살가죽을 꿰뚫을 듯 번득이던 그 눈빛을 잊지 못한다. 처형의 순간 그를 둘러싸고 환호하는 무리들에게서 아Q는 늑대의 눈빛보다 더 무서운 눈길을 보며, 그 눈알들이 자신의 영혼을 물어뜯는다고 느낀다. 군중의 잔인한 눈빛은 신체의 파괴보다도 강하게 각인된다. 『아Q정전』의 마지막 이야기를 장식하는 이들은 그 군중이다. 늑대 무리는 단지 잔인한 군중일 수도 있고, 당시 중국이라는 나라를 탐내던 제국주의 열강일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그들에게 아Q의 처형이 신나는 구경거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혁명도 아Q를 돕지 못한다. 애초에 아Q는 혁명이 무엇인지 모른다. 기존의 질서가 파괴되는 것이 두렵고, 반란은 곧 고난이라고 여겨 증오하기까지 한다. 아Q는 청 왕조의 멸망 소식을 들을 때까지도 변발을 자랑스럽게 기르고, 변발이 없는 자를 모욕하는데 앞장서지 않았던가.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설 때 아Q의 조상들이 그토록 받아들이지 않으려했던 변발을 후손들은 목숨을 걸고 지키려 든다. 루쉰의 말대로 구습에 얽매여 있는 자는 혁명을 할 수 없고, 혁명은 구습에 얽매인 민중을 구하지 못한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루쉰은 어떤 희망도 섣불리 품기 두려웠고, 어렵사리 품은 희망이 아편처럼 소비될까 걱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Q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패배하고 싶지 않다는 어리석음이다. 패배하지 않는 삶은 없다. 자신을 파괴하는 상상 속의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살아남는 패배이다. 패배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냉혹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며, 자신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우리를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줄 힘은 그 패배에서 나온다. 언제나 깨달음은 너무 늦게 온다. 삶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아Q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인식하고 깨닫는다.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제 발이 죽음을 향해 가는지, 아니면 삶을 향해 가는지.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를. 자신을 처형하는 문서에 서명하는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던 아Q, 그저 글자를 모르는 것이 부끄럽고 이름 대신 그리는 동그라미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던 아Q는 전신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처형의 순간에 와서야 비로소 살려달라는 말을 떠올린다.
후기가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격식 갖춰 쓰려다 하찮은 신체에 과부하가 와서 그만...
세미나 시간에 나눴던 주옥같은 이야기들을 다 담지 못한 것도 한 번 더 죄송합니다. 흑흑
댓글목록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잘 정리된 아Q 정전에 대한 이야기!!
근데 저 그림의 아큐는 너무 좀 비장한 미가 느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