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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1107 발제_II.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 - Part 1
희음 / 2017-11-07 / 조회 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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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코기토와 광기의 역사 - Part 1


20171107 희음


  이 논문은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그 출발점으로 하는 비판적 논문이다. 데리다는 그 책을 통한 푸코의 기획 전체를 비판하고자 하고 있으며, 그 비판의 핵심적인 부분을 바로 푸코의 데카르트 인용구, 그 인용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어떤 진단으로 보고 그에 대한 반박에 논문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 구절은 데카르트의 제1성찰의 일부에 해당하는 구절이다. 푸코가 가지고 온 그것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이 두 손이 그리고 이 몸통이 내 것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떤 이유로 부인할 수 있겠는가? 나를 혹여 검은 담즙에서 생기는 나쁜 증기로 인해 두뇌가 아주 혼란되어 있기 때문에 알거지이면서도 왕이라고,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붉은 비단 옷을 입고 있다고, 머리가 진흙으로 만들어졌다고, 몸이 호박이나 유리로 되어 있다고 우겨대는 미치광이들에 비교하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그렇지만 저들은 한갓 정신없는 자들일 뿐이고, 내가 그들로부터 표본을 가져온다면 나 역시 정신이상자로 보일 것이다.”(번역은 프랑스철학회 2017 가을학술대회의 김은주 선생 발표문 내에서 차용)

 

  이 인용문에 힘입어 푸코는 다음의 진술을 전개해 나간다.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광기는 비극적 경험과 비판적 경험의 형태로 이성 곁에 존재했지만, 고전시대에 이르러 그것이 사회적으로 배제당하고 감금되었다고. 그리고 그것은 성도착자, 거지, 범죄자, 나태한 자와 함께 감금되어 그것이 ‘광인들의 배’의 시대에서 ‘대감금’의 시대로 전환되기에 이르렀다고. 광인들은 이제 병든 자라든지, 우연히 비극적인 상황을 맞게 된 자가 아닌, 도덕적으로 악덕한 자, 즉 ‘비이성’을 대표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당시의 물리적, 사법적, 사회적인 것들이 반영된 시대적 필요와 더불어, 회의를 통해 확실성 개념을 갖게 된 데카르트의 철학적 배제와 감금 또한 한몫을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17세기의 “주체가 진실에 대한 권리를 보유하는 귀속영역, 곧 고전주의적 사유에 대해 이성 자체인 그 영역 바깥에 광기가 놓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데카르트가 회의를 진전시키는 과정이며, 그것을 통해 비로소 “광기는 추방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데리다는 이에 대해, 광기 등은 철학적 권위의 영역 밖으로 배제되며 추방되는 듯하고 그 ‘본질상 미칠 수 없는 코기토’의 최종 심급 앞에, 법정에 소환되어 데카르트에 의해 곧바로 기각되어 물리침을 당하고 만다고 말하면서(이것이 푸코의 주장이라고 말하면서), 문제제기를 시작한다.

 

  1. 선결 문제로서: 데카르트의 의도에 대해 제안된 해석이 정당화되고 있는가? 여기서 해석이란 데카르트가 (표층적으로) 말한 것과 ‘역사적 구조, 역사적 전체성, 역사적 의도’로서 말하려고 했던 것(즉, 그 의도는 거기에 부여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가에 관련된 문제) 간의 의미론적 관계이다.
  2. <광기의 역사>의 몇 가지 철학적이고 방법론적인 전제들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뒤에 이야기되겠지만 데리다는 여기서 광기 자체의 역사를 쓰는 것, 즉 침묵만을 가진 광기가 직접 말하도록 하는 엄청난 작업을 다름 아닌 이성의 언어를 빌어서 하고 있다는 것, 그 방법적인 모순을 드러내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푸코가 말한 바대로, ‘미치지 않게’끔 해주는 ‘이 다른 형태의 광기’, 즉 이성에 비추어서만 광기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푸코가 말하는 이성과 광기 사이의 이 분할의 장소에서 이 코기토의 혹은 코기토들의 의미를 다시금 되풀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문제를 짚기 위해서는 푸코의 <광기의 역사>의 전반적 의도를 상기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그 전반적 의도와 기획을 다음의 말에서 이끌어낸다. “정신의학의 역사가 아니라 지식에 의해 재구성되기 이전의, 광기 실상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이라는 푸코의 말에서. 이것은 광기 자체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이며, 이것이 이 책의 최대 가치이자 실행 불가능성이기도 하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광기 고유의 순간에서 출발하여, 그 고유의 심급에서 출발하여 쓰는 것, 정신의학 아래 지배되고 타도되고 구금된, 언어의 타자처럼 추방된 광기에 관해 그것을 지배한 자들의 언어(지식과 이성의 언어, 정신의학의 언어)를 쓰지 않는 것이 이 책의 의도라고. 데리다는 “광기에 관한 이성의 독백인 정신의학의 언어는 오직 그와 같은 침묵 위에서만 성립될 수 있었다. 내가 하고자 한 것은 그러한 언어의 역사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 침묵의 고고학이다.”라는 푸코의 기획을 비판하기도 한다. 침묵 자체에 어떻게 역사가 있을 수 있는지를, 침묵의 고고학이란 결국 논리학에 묶이는 것이 아닌지를 묻는 것이다. 침묵의 고고학은 오히려 광기에 대한 대항 행위의 미묘한 재개이자 반복이라고도 말한다. 여기서 데리다가 비판하는 핵심은 광기를 포획한 바로 그 언어(역사적 죄 혹은 죄의식)를 통해 광기가 진술하게(소송하게) 하는 것, 그것은 제대로 된 소송이 아닌 것이며, 나아가 죄를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언어 안에 묶이며 모든 것이 언어적 공모로 묶인다. 무언가를, 혹은 침묵을 말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 예외 없이 언어라는 이성의 편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성에 대항하여 호소할 수 있는 것은 이성뿐이므로, 그리고 이성 안에서 뿐이므로. 고고학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의 개념이란 언제나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기원의, 이성의, 역사의 가치들을 고찰함으로써 그 가치들을 초과하는 글쓰기는 고고학의 형이상학적 울타리 속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푸코 역시 이러한 지점을 모르지는 않는다고 데리다는 보고 있는 것 같다. 푸코가 자주 ‘애로점’을 표한다는 것이 그 근거인데, “야성 상태를 결코 본래대로 재구성할 수 없는” 광기에 대해, “포착 불가능한 원초적인 순수성”에 대한 말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애로점에 대한 해결책은 푸코에 의해 언어로써 표명되기보다는 파토스적인 힘으로써 실천되고 있다고 말한다. 광기에 대한 급진적인 찬사 같은 것으로써 실천되고 있다고 말이다. 광기가 발화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의 역사가 씌어질 수 있는 푸코의 입장에 의한다면, 그것은 푸코와 같은 실천적인(?) 방법론 대신, 고전주의 시대의 이성과 광기를 대립시키는 대화나 전쟁, 이중 독백이 의미를 지니는 그 누군가의 언어 속에서만 가능할 것이라고 데리다는 말하고 있다.

 

  푸코는 그 애로점의 고백 끝에 ‘다른’ 계획을 제시하기도 하는데, 그 계획이란 이런 것이다. 고고학의 대상인 침묵은 원초적인 무언이거나 비언어가 아닌, 명령, 혹은 하나의 억압에 의해 떠안게 된 침묵이므로, 그 분열의 지점, 즉 이성과 광기의 대화의 장인 로고스 내부로 들어가, 대화가 끊어진 지점에, 두 개의 독백으로 나뉜 지점에 도달하는 것. 결단(Decision)-푸코-의 지점, 불화(dis-sension)-데리다-의 지점에. 그 지점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분리되고 불화하기 위한 토양인 처녀지가 필요한데, 그것은 이성의 통일이 있었던 장소이다. 푸코는 의고적 이성이 있었던 그 영역에서 집단 분리 투표(discession)와 불화가 혁명처럼 불시에 발생했다고 말한다. 예컨대 고전주의 시대에 와서야. 그러나 푸코가 말하는 그러한 결단의 뿌리는, 계기는 무엇인가 하고 데리다는 물으며 그 곤란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1. 푸코는 고전적 이성과는 달리 그리스 로고스는 “반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비록 “소크라테스의 안도스러운 대화법 속에 감싸여” 우리에게 전달되기는 했지만, 위브리스(오만)를 대표하는 트라수마코스나 칼리클레스(폭군)의 존재에 대한 용인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그러나 이것은 이성이 그것에 대한 반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의 예가 될 수 없다. 안도스럽게 감쌌다는 것은 타자를 이미 추방하거나 제외한 것이기(이미 합리와 이성 안에 그것을 가두어 편안해졌기) 때문이다. 즉 이때부터 이미 배제 구조는 완성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배제의 구조는 철학과 이성의 역사 전체에 본질적인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광인들의 배 또한 그가 말하듯 자유로운 배회가 아닐 뿐 아니라, 그리스 기원의 벽두부터 ‘이미 분열된’ 이성의 표면에서의 사회경제적인 부대현상에 불과할 것이다. 이성이 그 반대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이성이 그 반대를 자신의 대상으로 구성하면서 그것을 자신 안에 가두었다는 것과 어떻게 같은가. 그리고 과연 이성은 반대(자신과 대립할 수 있을 만한 대등한 어떤 것)를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위브리스’는 광기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지금에 와서 이미 퇴출된 개념, 푸코 자신이 제대로 다시 한 번 고찰해 보지도 않은 개념이 말이다(푸코는 따옴표도 치지 않은 채로 이 개념을 가져다 쓰고, 그것이 당연히 광기에 부합하는 것처럼 쓰고 있다.).

 

  2. 푸코는 그 자신이 분할(dissension)을 역사의 가능성 자체에 연결시키고 있다. 분할은 역사의 기원 자체인 것이다. “광기의 필연성은 서구 유럽의 전 역사를 통해, 줄곧 시간 가운데 전달되고 완성되는 의미 있는 언어를 배경의 잡음과 그 지속적인 단조로움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그 결단 행위와 연결되어 있다. 한 마디로 광기의 필연성은 역사의 가능성과 연결되어 있다.”라고 푸코는 쓰고 있는 것이다. 광기의 자유로운 주관성을 배제하는 결단 행위가 역사의 기원이라면, 즉 배제 구조가 역사성의 근본적 구조라면, 이것의 ‘고전적’ 계기는 어떤 특권도, 원형적 모범도 갖지 못한다. 그것은 견본으로서의 예일 뿐이지 모범의 예가 아닌 것이다.

 

  3. 대분할이 역사의 가능성 자체라면, 이 분할의 역사를 쓰겠다는 것은 역사성의 역사를 쓰겠다는 말이 아닌가.

 

  따라서 분할, 결단이 이루어지는 근원적 로고스를 찾고자 하는 이 두 번째 계획은, 광기를 말하고자 하면서 동시에 그 일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광기는 본질적으로 말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 착수한 그 두 번째 계획은 이성의 예찬으로 나아가게 되는 작업인 것이다(광기의 바깥에서 광기에 대한 글쓰기로 돌아서는 것이기에).

 

  데리다는 이제 대감금의 기술 부분에 주목한다. 17세기 중반 광인들과 그 밖의 인물들, 죄수, 거지, 나태한 자들을 함께 수용하게 되는 사건. 그런 수용소들의 창설은 여러 다른 기호들 가운데 하나인가, 근본적 징후인가, 아니면 하나의 원인인가. 구조가 아닌 하나의 역사가 문제된다고 할 때 이러한 질문은 합당하다. 그런데 데리다는 그것을 제대로 규정하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대감금의 페이지 또한 데카르트로 시작되는데, 이론적 지식과 형이상학의 차원에서 기술되고 있는 이 ‘강제력’은 징후인가, 원인인가, 언어인가. 데카르트는 왜 유일한 예로써 불려 나왔는가. 데카르트가 가진 모범성이란 것은 무엇인가. 데리다는 힘주어 묻는다. 철학적 개념과 그 내용이라는 것에 대한 엄밀한 내적이고 전체적인 분석이 선행해야만 그 부분에 해당하는 것을 누군가의 글에 삽입하는 것은 비로소 폭력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푸코 당신은 그 선행 작업을 제대로 했는가. 이어서 그는 데카르트의 그 결정적인 구절 안으로 깊이 들어가 그것의 철학적 의미를 더듬어 보자고 제안한다.

 

  푸코가 인용한 부분에 바로 앞선 문장들. “내가 지금까지 가장 진실된 것으로,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모든 것을 나는 감각으로부터, 혹은 감각을 통해 알았다. 그런데 나는 때때로 이 감각들이 기만적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우리를 한 번이라도 속인 것들을 결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하지만 아마 감각들이 때로 우리를 별로 감각적이 못 되거나, 감각과는 거리가 먼 사물들에 있어서 우리를 속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각을 수단으로 하여 알게 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합리적으로 회의할 수 없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여기, 실내복을 입고 손에는 종이 따위를 들고 난롯불 곁에 앉아 있다 하자. 이 두 손이 그리고 이 몸통이 내 것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떤 이유로 부인할 수 있겠는가?”(이어지는 부분은 발제문의 1페이지 참조) 푸코는 이 단락의 마지막을 따로 떼 내어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광인들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처럼 한다면 나도 그들보다 덜 미친 것이 아니리라.” 푸코는 데카르트의 이런 진술을 통해 이것이 그들 광인들보다 “더 확고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자들의 말이라고 하고, “광기로부터 사유를 보호하는 것은 진리의 영속성이 아니라, 미칠 가능성의 부정이다”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푸코가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을 그 다음 단락의 첫 부분에 주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되는 부분. 꿈에 대한 가정 부분인데, 그것을 통해 데카르트는 의심스러움을 보편적으로 확장하고 일상적으로 의심할 수 없을 만큼 자명한 감각까지 의심하기 위한 근거로 꿈을 활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광기’의 상태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는 의미로 말이다. 그런데 푸코는 데카르트가 광기와 꿈을 동일한 선상에 놓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꿈들이나 착각들은 진리의 구조 속에서 극복”되지만, “광기는 회의하는 주체에 의해 배제되고 있다”고.

 

  그러나 데리다는 이렇게 반박한다. 데카르트는 광기의 체험을 파헤치지 않고 광기를 고찰하지 않으며, 단지 결정에 의해 광기를 배제한다고. 그 다음으로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데카르트는 코기토의 계기를 기술하게 되는데, 푸코는 다음과 같이 이미 앞질러 말하고 있다고. ‘광기는 바로 사유의 내부 자체로부터 그 불가능성 자체 가운데서 추방되고 기피되며 고발되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는 여기서 <성찰>에 대한 내적이고도 총괄적인 독해 없이 이루어지는 푸코의 편의적 차용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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