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1107 후기_코기토와 광기의 역사 Part1 +2
희음
/ 2017-11-12
/ 조회 3,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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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기토와 광기의 역사]는 푸코의 <광기의 역사>라는 하나의 ‘텍스트’(그것을 텍스트라는 논리적 대상으로 바라보면서)를 건축술적인 방식으로 비판하는 논문입니다. 즉 <광기의 역사>라는, 푸코에 의해 잘 조직된 하나의 ‘기획’의 허점과 논리적 모순이 무엇인가를 파헤치는 글인 것이죠. 이번에 논의한 범위는 이 논문의 앞 절반 부분에 불과하기에, 그 모순의 핵에 해당하는 데카르트의 ‘코기토’ 부분, 즉 푸코가 ‘코기토’ 개념을 가지고 나오면서 그것이 대감금과 궤를 같이하는 철학적 감금이었다고 주장하는 부분에 대한 본격 비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푸코의 기획에 대한 비판의 주된 세 개의 줄기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광기의 역사 자체를 쓰겠다고 하는 것, 침묵의 역사를 쓰겠다는 푸코의 선언, 즉 광기로 하여금 직접 말하도록 하겠다고 하는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침묵(광기의 언어)이라는 것에 어떻게 역사가 있을 수 있느냐, 그리고 (객관적, 보편적 의미에서의) 언어 없이 어떻게 역사의 기술이 가능해지느냐, 침묵의 역사를 침묵 그 자체를 통해 쓰겠다는 것이 어떻게 말이 되느냐, 침묵으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 아니냐, 라고 데리다는 비판하죠.
두 번째 비판은 푸코의 ‘다른’ 계획에 대한 비판인데, 그것은 푸코가 대감금의 시대에 처음으로 이성과 비이성의 대대적인 분할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지점에서 이루어집니다. 푸코는 그 분할의 시점, 즉 고전주의 이전 시대의 ‘안도스러운’ 대화법 혹은 평화적 측면을 이야기하면서 그 시대와는 ‘다른’ ‘결단’이 고전적 배제에 의해 일어났다고 분석하고 있죠. 그런데 데리다는 그 분할의 지점에 대한 푸코의 해석을 문제 삼습니다. 배제는 그 이전에 이미 일어나고 있었으며, 포섭과 배제는 이성의 고유한 속성인 것이므로 그것은 이성의 역사와 동시적으로 발생하여 끊임없이 진행되어 온 것이라는 말을 보태기도 합니다. 그 ‘안도스러운’ 대화법 안에 ‘위브리스’라는 뾰족한 것이 이미 부드럽게 감싸였기에 바로 그 위브리스는 수용될 수 있었다고 말이죠. 그 감싸 안음 이전에 배제가 일어났으며, 감싸 안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배제라고 데리다는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비판은 데카르트의 철학적 사유에 대한 푸코의 해석에서 그 쟁점이 빚어집니다. 푸코는, 데카르트의 <성찰>의 그 문제적 대목에 대해, 그 텍스트 내에서 꿈이라는 것은 진리의 구조 속에서 극복되고 있지만 광기는 회의하는 주체에 대해 애초부터 배제되고 있다고 말하며, 데카르트가 철학적으로 광인들에 대한 배제 구조를 구축하고 있는 결정적 장본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데카르트가 광인의 예시를 들어 그들을 배제하고 있는 것은 ‘코기토’를 이끌어내기 위한 어떤 가정이나 상황 설정의 차원에서 광기라는 개념이 잠깐 불려 나왔을 뿐이며, 광기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 같은 건 전혀 행하지 않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광기 배제의 역사적이고도 철학적인 단절의 계기를 만들어 낸 것이 데카르트였다는 것은 푸코의 과도한 해석임을 피력합니다.
여기까지가 데리다의 문제 제기 혹은 푸코에 대한 반박을 성기게나마 정리해 본 것입니다. 그 대강의 맥락을 훑어본 뒤, 우리는 데리다의 화법을 따라가며 침묵의 고고학은 과연 가능한 것인지, 혹은 그의 말대로 그 작업 자체가 하나의 모순인지를 논의해 보기도 했습니다. 침묵의 언어를 가진 자들의 역사를 쓰는 것이 가능한지를. 그런 자들이란 푸코가 집중하고 있는 ‘광인’에만 국한되는 존재는 아닐 겁니다. 여자들, 어린아이, 장애인, 부랑자, 식민지 주민, 도처의 서발턴들, 어쩌면 이 모두가 침묵하는 자,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범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들, 침묵의 언어를 가진 자들의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데리다가 말하듯 불가능한 것이기만 할까요. 그리고 데리다는 단지 그 일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푸코를 몰아세우고 있는 것일까요. 그 ‘불가능성’에 대한 데리다의 날카로운 언어가, 실은 조금 다른 지점을 바라보려는 시도의 차원에서 기술되는 것이며, 푸코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 침묵의 역사를, 말할 수 없는 자들의 말을 누군가가 대신해서 하는 일에 대한 윤리를 정립하려고 한다는 것임을 우리는 읽어 낼 수 있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깊어져 갔던 이번 세미나의 논의를 통해서 말이죠. 아래의 인용이 데리다의 이러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일 겁니다.
“우리 유럽 언어 모두는, 요컨대 가까이서건 멀리서건 서구 이성의 모험에 참여했던 모든 것의 언어는, 푸코가 광기의 포획 또는 객관화의 일종으로 규정한 계획을 위임받은 거대한 대표단이다. 이 언어에서의 그 무엇도, 그리고 이 언어를 말하는 이들 가운데 그 누구도 역사적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거니와, 푸코는 바로 이 역사적 죄책감에 소송을 제기하는 성싶다. 그러나 그러한 송사는 불가능할 듯싶은데, 왜냐하면 단순히 진술한다는 사실에 의해 소송 절차와 평결이 끊임없이 범죄를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질서가 매우 막강하다고 할 때, 그 막강함이 동종의 것 가운데 전무후무한 것이라 할 때,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초월적 성질, 보편적인 공범성, 구조적 공범성, 보편적이고 무한한 공모성 때문이다. 이 공모성 속에서 질서는 질서의 언어를 통해 질서를 이해하는 이들을 모두 물들이고 만다.(61)”
여기에서 데리다는 광기의 언어와 역사를 쓰겠다고 하는 푸코의 기획에 쓰이는 도구가, 푸코 자신이 비판하고 또 거리를 두려고 하는 바로 그 이성의 언어라는 점을 비판하고 있죠. 즉 광기에게 언어를 주고 배제된 광기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려는 그 작업이 광기를 다시금 로고스의 체계로 포획하는 일이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데리다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공모성’을 통한 자기반성이기도 한데, 그는 지금 이 세계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는 이 질서, 이 구조, 이 초월적 역사에 대한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기반성은 유럽중심주의를 탈구하려는 그 실천의 시작점과도 상통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유럽중심주의를 탈피하겠다는 입장, 유니버설리즘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지향과는 다릅니다. 유니버설리즘은 유럽중심주의의 거울쌍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면서 데리다는 유럽중심주의가 태동한 그 자리로 돌아가 사유하는 일, 그에 얽힌 모든 관계들을 사유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불어 자신이 유럽인이라는 것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지는 일, 책임지는 방식에 대한 깊은 고민들이 또한 중요하다고도 이야기합니다.
데리다는 또한 그들, 억압된 자들, 침묵의 언어를 가진 자들에 대해 누가, 어떤 방식으로 말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고민하고 있는 듯합니다. “누가 어려움을 지각하고, 누가 어려움을 말하는가?(65)”라고 물으면서 말이죠. 해당 논문에서 정확히 그 부분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푸코의 방식은 무척이나 모순적이라는 점을 꼬집고 있습니다. 광기가 직접 말하게 하겠다는 기획을 앞세우지만 그 가운데로 한 번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채로 광기를 둘러싼 바깥의 현상들만 기술하는 것이 푸코의 작업이라고, 데리다는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하죠. 그는 또한 푸코에게 묻습니다. 이어지는 인용문에서 보듯, 어째서 당신은 그 광기의 언어와 역사에 대해 애초부터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매사는 마치 지속적으로, 그리고 잠정적으로 광기 개념에 대한 확실하고 엄정한 사전 이해가, 최소한 그 명사적 정의에 대한 사전 이해가 가능하며, 또 획득되어진 듯이 진행되고 있다.(71)”
그런데 푸코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광기의 역사>를 쓴 푸코의 선한 의도에 대한 조금의 돌아봄도 없는 채로 진행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합니다. 푸코는 고전주의 시대의 분할을 단 하나의 치명적이고도 유일한 배제, 유일한 이성의 역사로서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이성과 비이성을 분할하고 그렇게 하여 배제된 비이성의 범주 안에 어떤 것들이 한데 묶였는지, 그 특별한 배제의 양상, 그 사건이 이전과는 어떤 식으로 다르게 진행되었는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죠. 예컨대 대감금이라는 사건에 기초하는 하나의 배제, 하나의 다른 역사 말입니다. 사건적이고도 현상적인 그 대감금에 집중하고 이성이 어떻게 그 기득권과 보편성과 합리적 기준을 획득하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건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시대의 요구와 욕망과 성취를 읽어내려고 하는 푸코의 그 의도와 맥락을 아우르려는 노력 없이, 데리다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논리적인 구조 안에 성급하고도 무조건적인 방식으로 대입해 버리려 한 것은 아니었는지.
아직 논문을 다 읽지 않은 탓에 푸코와 데리다의 논쟁에 대하여 어떤 확고한 가치판단을 내리는 일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남은 Part II 부분과 이 논문에 대한 푸코의 반박 글을 마저 읽은 뒤에야 보다 깊은 논의가 이어질 수 있을 테죠. 기다려지는 시간입니다.^^
댓글목록
최원님의 댓글
최원푸코와 데리다의 시각 차이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훌륭한 후기입니다. 쓰시느라 애먹으셨을 것 같습니다. 푸코는 '광기'에 대한 이성의 그 어떤 대상화적 논의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거부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오히려 광기 그 자체가 스스로 말하도록 만들고 싶어하지요. 그러나 데리다는 이성과 비이성을 단순히 대립시키고 비이성의 편에 서는 것이 오히려 비이성이 말할 기회(수단) 자체를 박탈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의학, 특히 정신분석이 현대에 발전시키는 분석의 방법들은 분명 이성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단순히 비이성을 침묵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어떻게 이성이 비이성 위에(바꿔 말해서 무의식 위에) 불안정한 방식으로 서 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이는 지적하신 대로 말할 수 없는 자들(광인 뿐 아니라 서발턴)의 침묵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매우 곤란하고 어려운 문제에 대해 두 사람이 취하는 상이한 태도로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현전 vs 대표/재현 등의 문제도 함께 논의되어야 하고요. 다음 시간에 데카르트의 해석을 둘러싼 두 사람의 입장 차이를 살펴보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길 바랍니다. 저도 다음 세미나가 기다려지네요. 감사합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세미나 할 당시에는, 세미나 때의 그 생생한 호흡과 열기와 내용의 충만함을 담아 당일이나 그 다음날에 바로 후기를 써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아, 그날을 놓치고 나니 날짜는 빨리도 가고 또 후기를 써야 한다는 부담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ㅋㅋㅋ
그래도 해당 주 주말까지라는 데드라인이 있어서 힘들게나마 내용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세미나 때도 정신의학과 정신분석에 대해 푸코와 데리다, 두 사람이 어떻게 대립하고 있는지를 짚어주셨던 그 부분이, 그들이 어디서 갈라지고 왜 데리다가 하나의 고전적 텍스트에 대한 재해석을 두고 그토록 각을 세우는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힌트가 되었습니다. 데리다는 정신의학이 적어도 광인들의 말을, 그 언어적 절뚝거림과 그 말하지 않는 사이의 텅 빈 말들에 귀 기울인 최초의 시도를 수행한 작업이었다고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그 귀기울임의 방식에 대해선 더 많은 사유와 고민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덧붙기고도 있고요. 그런데 푸코는 정신의학의 그 귀기울임이란 단지 그것, 광인들의 말을 대상화하고 타자화하여 분석 대상으로만 삼아 작업하기 위한 기반일 뿐이었다고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부분에 대해 데리다의 남은 논문의 부분을 살펴보면서 더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후기 잘 읽어주시고 다독거려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