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세미나 > 세미나자료
  • 세미나자료
  • 세미나발제문, 세미나후기를 공유하는 게시판입니다.
세미나자료

[벤야민] 1107 후기_미메시스 관련 단편들 +4
희음 / 2017-11-13 / 조회 2,778 

본문

언어, 그 바깥의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

 


2017년 11월, 희음

 

  벤야민의 <미메시스 능력에 관하여>라는 단편과 그 독창적인 ‘유사성’ 론의 이해를 위한 독해에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쓰일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이번 세미나에서 다뤄졌던 ‘유비와 근친성(1919) - 점성술에 대하여(1932) - 유사성론(1933) - 미메시스 능력에 관하여(1933)’라는 순의 계보를 따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1916) - 번역자의 과제(1923) - 유사성론(1933) - 미메시스 능력에 관하여(1933)’라는 순서, 즉 그의 언어 철학이라 일컬어지는 단편들의 계보를 따르는 방법이다. 물론 두 가지 방법 모두 ‘언어’라는 미메시스 능력에 대한 역설로 귀결되는 벤야민의 사유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다. ‘언어’가 벤야민에게 무엇이었는지, 그에게 있어 언어는 왜 그다지도 중요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그런 ‘언어’에 대한 사유를 발전시키는 데 어떤 사건과 영감의 매듭들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돌아보기 위한 방법론인 것이다. 여기서는 세미나에서 논의되었던 내용을 중심으로, 그 첫 번째 방법론에 기대어 그의 ‘미메시스’ 이론을 톺아보고자 한다.

 

  우선 <유비와 근친성>이라는 단편에서는 유비 또는 유사성에 대한 탐구보다는 ‘근친성’ 개념에 더욱 천착하는 벤야민을 만날 수 있다. 유비란 흔히 관계들의 유사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원칙을 갖는다. 그와는 다르게 근친성이란 이성 혹은 합리와는 상관이 없는 순수한 정서에 의해 이끌리는 것이라고 벤야민은 말하고 있다. 예컨대 근친성은 음악적이고 청각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그것에 대한 예시로써 ‘민중의 감정’을 들기도 하고, 근친성을 유비의 원칙으로 바라보는 것은 권위와 가족적 공속성에 대한 현대적 견해를 특징짓는 것이라는 언급을 하기도 한다. 이런 언급을 통해 벤야민의 사유 내에서 그 정치적 지형도가 어떻게 그려지는가를 가늠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사성과 혈연관계를 근친성으로 연결 짓고 그 결속 관계를 강요하면서 그것을 기존 사회 체제의 확고한 기반으로 삼으려 하는 가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언급은 또한, 근친성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민중’들 간의 만남, 마주침, 연대 같은 정치적 실천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는 목소리를 담아내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 연대의 차원으로서의 근친성에 대해 다시 사유해야 한다는 낮은 목소리 말이다.

 

  이 단편에서 유사성에 대한 사유의 씨앗으로 여겨도 될 법한 짧은 대목 또한 발견할 수 있었다. “근친성을 성립시키는 것은 유사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유사한 것은 그것이 유비를 초월한 것으로 입증되는 곳에서 - 이것은 결국 어디서나 입증할 수 있을 텐데 - 근친성의 예고자가 될 수 있다.” 라고 하는 부분 말이다. 1933년에 쓴 <유사성론>에서 이야기한 점성술에 관한 서술과 연결 지어 읽을 수 있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즉 ‘유사한 것’이 ‘유비를 초월한 것으로 입증’되는 장소란 달리 말하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유비를 초월하는 지점, 객관적인 앎을 초월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이나 정서, 감정을 통한 섬광의 순간을 가리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가 바로 근친성에 대한 예고 능력을 갖춘 유사성이 발현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런 순간은 <유사성론>에서 이야기하는 ‘마법적 의미에서의 읽기’의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점성가가 하늘에서 별들의 위치를 읽는 동시에 별들의 상태에서 미래나 운명을 읽어내는 일과도 같다. 또 그것은 과학적, 합리적 원칙에 근거한 관계의 유사성이 아닌, 마법적이고 감각적인 유사성 쪽으로의 뛰어넘음을 가리킬 것이다. 유비를 가뿐히 뛰어 넘는, 유사성이라는 하나의 사건. 이를 벤야민이 1923년에 쓴 <번역자의 과제>의 한 대목과도 연관 지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번역의 경우 위에서 사유한 언어들 사이의 가장 내적인 관계는 독특한 수렴의 관계이다. 그 관계란 언어들은 서로 낯설지 않고 선험적으로, 그리고 모든 역사적 관계를 차지하더라도 그 언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서 서로 근친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서로를 끌어당기는 ‘독특한 수렴의 관계’를 통해 언어가 도달하려고 하는 지점은 언어의 해방이자 동시에 순수언어를 그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주는 바로 그 자리일 것이다. 유사성이라는 것을 통해 이뤄내는 하나의 마법적 읽기, 자유와 해방의 실천으로서 번역이 바라보고 있는 그 장소는 벤야민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그토록 닿고자 했던 구원의 장소, 혹은 그 순간들에 다름 아닐 것이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점성술론>은 그 마지막 문장을 통해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 ‘합리적인 점성술을 위한 완전한 서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합리적’인 점성술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구문 자체로 그것은 하나의 모순이 아닌가. 그러한 표현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해당 단편의 맨 앞부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벤야민은 말하고 있다. “점성술에 대한 관점을 마법적 “영향”에 관한 이론, “별빛의 작용” 따위를 배제한 가운데 정립하려는 시도. 그와 같은 시도는 보기에 따라서는 임시적일 수 있다. 그러한 시도는 그것이 이러한 탐구들 주변에 낀 아우라를 제거해주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 점성술을 합리 쪽에 위치 지으려는 시도, 점성술에서 마법적 힘과 아우라를 제거하려는 벤야민의 시도는, 점성술가라든지 지적, 정치적 기득권자에게만 전유되어 왔던 특권적 능력을 민중에게, 그 능력이 억압되고 가로막혔던 계급들에게 돌려주려는 차원이 아니었을까. 그는 실제로 ‘미메시스’ 개념을 완성시키고 있는 단편인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의 마지막 단락에서도 “마법의 힘들을 해체할 정도까지 이른 매체”가 바로 언어인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합리적’ 점성술은 합리적 미메시스 능력에 대한 말이며, 그것은 현대에 와 그 능력을 이어받고 대표하게 된 ‘언어’의 힘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이 단편은 언어의 탄생에 바쳐지는 서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쇠퇴했거나 사멸한 듯 보이는 미메시스 능력은 사실상 언어라는 놀라운 또 다른 능력으로 변형되었다고 벤야민은 말하고 있다. 마법과 아우라와 점성술의 자리를 언어가 대신하게 된 것이라고. 이런 입장은 1933년에 쓴 <유사성론>에서 보다 치밀하게 서술되고 있다. 

 

  <유사성론>에서 벤야민은 비감각적 유사성 개념에 대해 무척 공들여 말한다. 비감각적 유사성의 순간을 설명하기 위해, 벤야민은 다시금 성좌적 순간을 읽어내는 점성술에 대한 이야기를 예시로 든다. “유사성의 지각은 어떤 경우든 번득이며 지나가 버리고 마는 순간에 묶여 있”으며, 그것은 “별들의 운행과 마찬가지로 눈앞에 순간적으로,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벤야민은 “두 별의 만남에 점성가라는 제3자가 끼어드는 양태”를 우리가 언어를 통해 비감각적 유사성의 순간을 맞닥뜨리게 되는 일의 비유로써 들고 있다. 언어적 능력과 관련하여 우리가 흔히 떠올리곤 하는 미메시스적 영향은 그 감각적 유사성 차원에 불과했었다. 예컨대 감각적인 모방을 통해 만들어진 숱한 의성어의 예들에서 파악되는 차원 말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모든 낱말은 - 그리고 언어 전체는 - 의성어적이다.”라는 레온하르트의 주장을 언급하며, 이 명제를 투명하게 만들어줄 하나의 열쇠가 비감각적 유사성이라고 말한다. 즉 언어 전체가 비감각적 유사성의 특수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벤야민은 Beth(‘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를 예로 들며, 소리로 말한 것과 의도된 것 사이의 결합(Beth(문자상) - 집(의미된 것)), 글로 씌어진 것과 의도된 것 사이의 결합(베뜨(음성언어) - 집(의미된 것)), 마지막으로 글로 씌어진 것과 소리로 말한 것 사이의 결합(Beth(문자상) - 베뜨(음성언어))까지가 모두 비감각적 유사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가 가장 주목하는 것은 마지막의 경우에 관한 것이다. 그것이 가장 비감각적이며 가장 뒤늦게 도착한 유사성이라는 것이다. 그 마지막 예시의 풍경이, 벤야민 만의 특별한 언어 철학이 태어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그곳에서 언어는 사회적 필요에 의해 인간들이 부여한 딱딱하고 좁은 장소를 벗어난다. 그곳이야말로 순수언어가 해방되는 가능성으로서의 장소라 볼 수 있다. <번역자의 과제>에서 말하듯 “형상물들 속에서 그 본체가 무겁고 낯선 의미가 부착”된 채로 있어야만 했다가 그 의미에서 “그 본체를 풀어내는 일, 상징하는 것을 상징된 것 자체로 만드는 일, 순수언어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언어운동에 되찾아주는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이것을 구체화하는 형상으로서의 예시를 <무메레렌>이라는 벤야민의 에세이에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벤야민은 그의 ‘미메시스’론에 대한 착상이 이 에세이를 쓰는 동안 이루어졌다는 말을 전했다고도 한다.

       
  “옛 동요 중에 ‘레렌 숙모(Muhme Rehlen)'가 나오는 동요가 있다. 내게 ’무메‘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동요 속 인물은 하나의 유령이 되었다. 즉 무메레렌이라는 유령이 되었다. 그러한 오해는 내게 세상을 왜곡시켰다. 그러나 좋은 의미에서 그러했다. 즉 오해는 세상의 내면으로 향하는 길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어떠한 계기에서 일어나는 오해이든 마찬가지였다.
  한 번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 ‘동판화(Kupferstich)'라는 단어를 발음했는데, 이러한 우연이 초래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나는 의자 아래에서 머리를 쑥 내밀어보았다. 그것은 바로 ’머리 찌르기(Kopf-verstich)'였다. 그때 나는 내 자신과 단어를 왜곡시켰는데, 그것은 내가 삶 안에 자리를 잡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다. 때때로 나는 원래 구름인 낱말들로 나를 위장하는 법을 배웠다. 유사성을 파악하는 능력은 실은 유사해지고 또 유사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래된 강제가 미약하게나마 남은 잔재나 다름없다. 내게 이러한 강제를 행사한 것은 바로 낱말이었다. 나를 예의바른 행동의 모범과 닮게끔 하는 낱말이 아니라, 집, 가구, 옷들과 유사하게 만드는 낱말이 그러하다.”

 

  ‘무메레렌’이라는 말은 벤야민에게 ‘레렌 숙모’로써 ‘인식’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무메레렌’이라는 발음으로만 벤야민에게 ‘감각’되어 그 원래의 의미, 그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유령' 같은 것이 되었다. 그 순간 벤야민은 기존의 세계, 질서로서 기입되어 기존의 체계만으로 이해되기를 요구하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글로 씌어진 것과 소리로 말한 것 사이의 결합(Muhme Rehlen(문자상) - 무메레렌(음성언어)) 관계를 통해 맞닥뜨린 비감각적 유사성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 세계는 이 세계 바깥의 다른 무엇이었으며, 그 무엇을 만나게 해 준 것이 바로 언어라는 매체였다. 그리고 그 바깥의 세계를 만나는 일은 기존 언어 체계의 조합과 질서를 무화시키는 특수한 언어적 능력에 의해 비로소 가능해졌다. 이것이 다름 아닌 미메시스 능력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그만의 특별하고 독창적인 ‘미메시스’ 능력인 것이다. 

 

  벤야민은 ‘미메시스’론과 관련된 노트에서 “유사성의 유령 같은 존재의 고향은 언어”라는 언급을 하면서, “자연을 언어에 근접시키는 것이 바로 희극성의 본질”이며 “웃음이란 일종의 표현의 혼돈”이라고도 말한다. 언어를 통해, 그 미메시스 능력을 통해 ‘다른’ ‘바깥’의 세계를 상상하고 사유하는 일, 그것은 유사성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며, 그 고향이란 또한 질서의 바깥인 혼돈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은 파국과 종말의 멜랑콜리를 통해 변혁과 구원의 메시아를 끊임없이 불러내고 있는 그의 역사 인식적 사유와도 통하는 듯 보인다. 바깥의 세계에서, 바깥으로 도약하기 위한 실천의 차원에서 우울과 웃음은 같은 대지를 갖는다. 또한 벤야민이 말하는 웃음과 희극의 미메시스적 순간은 프로이트가 일찌감치 일궈낸 언어 조탁과 언어적 전위와 응축에 대한 사유와도 맥이 닿아 있는 듯하다. 전혀 다른 언어가 마주치고 접속하면서 그렇게 만들어진 말이 그 언어의 본래 의미에서 떨어져 나가는 순간에 대한 사유. 언어적 진실은 그 보편적 기의의 표층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뒤편에 있다는 이야기. 그런 식으로 오해되고 전이되고 왜곡되는 모든 것들, 다시 말해 프로이트의 언어적 순간, 그 미메시스적 순간에 대한 경험이 새로운 세계로의 성좌적 열림을 가져다준다는 것이 벤야민의 생각인 것이다. 이것은 프로이트를 이어받아서 써 내려가는, 이 어둠의 세계에, 도래할 메시아들에게 건네는 편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언어, 그 바깥의 미메시스 능력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생략된 편지 말이다.
   

댓글목록

최원님의 댓글

최원

잘 읽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관심사 때문에 지난 번 세미나가 특히 재미있었는데, 언어, 점성술, 근친성, 유사성, 미메시스, 이런 주제들이 벤야민 사유의 두 계열을 따라 분석되는 것이 무척 흥미롭네요. 아마 여기에 희음샘이 이미 지난 세미나에서 말한 논점을 추가하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벤야민이 근친성 내지 친화력 이야기하면서 번역이란 서로 다른 나라 말들이 마치 모자이크를 만들어내듯이 하나로 모여서 바벨탑적 타락 이전의 순수 언어를 입체적으로 구현하는 일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제임스 조이스가 여러 나라 말들 사이에서 음향적 유사성 내지 근친성을 활용하면서 언어적 유희를 통해 새로운 의미들을 생산하는 것이 벤야민이 말하고자 하는 미메시스의 아주 탁월한 사례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이후 벤야민 세미나에서의 논의도 기대 됩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댓글의 댓글

누구보다 먼저 읽어 주시고 음미해 주시고 첨언해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번역가의 과제> 세미나 할 때 했던 이야기, 이제는 너무 희미해진 그 이야기, 그러나 너무도 중요한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기억하고 끌어다 놔 주셔서 반갑고 고마운 마음! 게다가 제임스 조이스라니요. 아즈마 히로키 때에도 데리다의 '산종' 개념과 관련해서 게임스 조이스의 'he war'이라는 단어가 서로 다른 컨텍스트를 만나 어떻게 각기 다르게 현상되는지를 이야기했었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벤야민 또한 그 맥락과도 연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벤야민의 미메시스, 혹은 언어철학과 관련된 이 후기 글에 제임스 조이스의 그 예시를 어떻게 잘 녹여넣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보겠습니다. 영감과 가르침을 주셔서 다시금 감사해요!^___^

삼월님의 댓글

삼월

지난 시간 결석을 한 탓에 후기로 빈틈을 메꿔보려 했는데,
늘 그렇지만 틈은 단지 틈이 아니었던 거군요.
희음님의 글을 보니 어디서 본 듯한 재료들로 건축된 낯선 집을 만난 것 같아요.
벤야민과 언어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마다 들어와서 읽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늘 그렇지만 틈은 단지 틈이 아니었던 거군요.'에서 빵 터졌어요.ㅋㅋㅋㅋ
실은 벤야민 이번 단편들이 워낙 심오하고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입말로다가 가볍게 풀어서 후길 써야겠다 했었는데
우리 <그랜드 오픈세미나>가 갑자기 생각나서 거기에 맞는 에세이 형식으로
아예 그냥 써 버리자 하는 생각에... 본의 아니게 불편을 드려 송구스런 마음^^;;
그래도 삼월 님이랑 세미나를 통해 벤야민의 생각과 정서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게 넘 기뻐요^^

세미나자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