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1108 두번째 시간 후기 +2
아라차
/ 2017-11-13
/ 조회 2,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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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1108 두번째 시간 후기_아라차
희망없이 살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단호히 ‘없다! 당연히 희망이 있어야 살지!’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차라리 행복하다. 그것이 진화이든, 부의 획득이든, 신분의 상승이든, 지혜의 습득이든, 미래의 어느 순간에 이뤄질 희망이라는 표상을 붙들고 오늘을 사는 일이, 지금의 고통을 잊고 스스로의 찌질함을 위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늘 희망을 부풀리고 구체적으로 상상해가며 지금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제시한다. 이것은 미래의 불안을 부풀리고 협박에 가까운 공포까지 만들어가며 지금을 착취하는 것과 동일한 구조이다.
그래서인지 희망을 얘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희망이 없다거나 희망을 논하지 않으면 사회부적응자 신세가 된다. 희망이 없다면 왜 사냐며 공격당하기 쉽다. 희망없는 것이 뭐 어때서, 라고 위로해 본들 금방 코를 빠뜨릴 수밖에 없는 현재부적응자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진짜, 희망이 없다면 무엇으로 지금을 추동할 수 있을까. 쉽게 답할 수 없는 물음. 희망이 가장 쉬운 근거 내지 결론이 되는 이유다.
희망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갖겠다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며 언제까지 연연해할 거냐고.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도 나 자신이 만들어 낸 우상이 아닐까? 그의 소망은 비근한 것이고 내 소망은 아득할 것일 뿐.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다니는 사람이 많다 보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 <고향> 중에서
루쉰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살았던 인물이다. 이 당시의 ‘희망’은 ‘진화’와 비슷했다고 한다. 서양의 앞서가는 문명을 받아들이고 기술을 배워 ‘미욱하고 무지몽매한’ 이들을 계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지식인들이 있었다. 루쉰의 작품에서도 ‘희망’이 등장한다. 그러나 ‘희망’을 다루는 방식 자체가 선명하지가 않다. 희망을 얘기하면서도 그 구체적 실천에 대한 설파가 없고 왠지 자신있게 희망을 논하지 않는 느낌이다. 다른 이들보다 먼저 미래를 경험해 보았지만 그 미래가 지금보다 낫지 않았기 때문(국비유학생으로 선진문물 습득)이었을 거라고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옛 것을 붙들고 있는 것도, 신문물에 부합하는 것도 답이 아닌 것 같을 때, “그래도 아이들에겐 미래가 있으니까 다르겠지”라는 희미한 전망을 내놓는 것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상가로서 어떤 주장이나 결론을 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터. 어쩌면 “미래성을 던지는 게 아니라 현재를 사는 자기 인식”의 문제에 더 천착했던 것 같기도 하다. 루쉰에게 희망이라는 쉬운 결론이 쉽지 않아 보이는 것도 그래서이다.
어떤 결론이 좋은 결론일까. 습관처럼 희망을 던져놓는 것이 최선일까 아니면 희망같은 건 근거없는 환상이니 버리라고 하는 게 나을까. 그 어떤 자기 인식도 정답일 수 없는 상황에서, 그저 경계선 그 위만이 초라한 안식처였을 한 지식인의 고뇌가 느껴진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희망은 분명 우리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관념으로 이루어진 개념인데,
우리는 쉽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심지어 소유할 수 있다고 믿기까지 합니다.
희망에 대한 섣부른 판단 앞에서 루쉰은 누군가를 쉽게 비웃는 자신을 비웃었을까요?
희망이 본시 없는 거라면, 왜 우리는 희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무엇을 상상하며 그것을 가져야만 살 수 있다고 믿었을까요?
아라차님 후기 덕분에 희망의 효용과 그 탄생의 설화를 헤아려보는 아침이 되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뒤늦게...
세미나 시간에 오간 '지식인'이라는 주제가 흥미롭습니다. 문득 19세기말, 중국에서는 전통적인 문사文士가 몰락하고 새로운 지식인이 등장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네요. 과연 그렇게 등장한 '지식인'들은 어떤 존재였는지.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갔던 사람들인지 궁금증이 생기고 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