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아Q정전> 1115 발제문 +1
삼월
/ 2017-11-15
/ 조회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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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개요와 줄거리
제1장 서
이름도 성도 모르는 자의 정전을 지어주기로 한다. 서양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한 탓에 원래 이름을 고증할 길 없는 그 자를 아Q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는 웨이좡 사람이지만, 웨이좡에서 살지도 못했다.
제2장 승리의 기록
아Q는 마을 밖 사당에 사는 날품팔이꾼으로 자존심이 강했다. 그는 자기만의 정신승리법으로 모든 모욕을 물리친다. 패배의 고통을 맛보지 않기 위해 아Q는 자기 뺨을 때려,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킨다.
제3장 승리의 기록 (속편)
아Q는 자기와 같은 신분을 가진 자를 경멸하며, 구시대의 습속(변발)을 추종하고, 여성을 무시한다. 그는 승리감을 느끼기 위해 타인을 괴롭힌다.
제4장 연애의 비극
비구니의 볼을 꼬집은 아Q에게 저주가 내렸다. 아Q는 자오 댁의 하녀 우어멈에게 구애하다가 경을 친다. 몽둥이로 얻어맞고 품삯도 못 받고, 얼마 안 되는 재산도 빼앗긴다.
제5장 생계문제
그 이후 아Q는 동네에서 배척당한다. 애송이D에게 일거리를 빼앗기는데, 애송이D는 아Q와 놀랄 만큼 닮아있다. 굶주림 속에서 구걸을 위해 걷다가 암자에 침입한 아Q는 무를 몇 개 훔쳐 달아난다. 훔친 무를 먹으며 마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제6장 성공에서 말로까지
추석 이후 대처에서 돌아온 아Q는 헌 옷과 물건을 헐값에 팔고 있다. 자오 나리는 아Q의 물건을 탐내면서도 그를 경계하기 시작한다.
제7장 혁명
거인 나리가 마을에 피난을 왔다는 소식과 함께 혁명에 대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아Q는 혁명당원의 목을 치는 장면도 본데다 마음 속 깊이 혁명과 반란을 ‘통절히 증오하고’ 있었다. 그런 혁명이 거인 나리를 떨게 한다는 사실에 아Q는 신명이 났다. 혁명으로 마을의 부자들과 자신을 괴롭힌 자들에게 반격을 가하려는 아Q의 낌새를 자오와 수재는 쉽게 눈치 챈다. 두 사람은 혁명의 동지가 되기로 하고 아Q보다 한발 앞서 마을 암자의 용패를 없애버린다.
제8장 혁명 불허
혁명은 별다른 변화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혁명당 몇이 변발을 자르는 행패를 부리고 다니기는 했다. 아Q도 변발을 틀어 올리고 거리로 나섰으나, 마을의 젊은 지식인들(자오와 수재, 양선생 등)은 아Q를 혁명에 끼워주지 않는다. 이 무렵 흰 투구와 흰 갑옷을 입은 자들이 자오의 집을 털어간다.
제9장 대단원
자오 집 약탈사건 이후 아Q는 체포된다. 말귀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글도 모르는 아Q는 시키는 대로 서명을 하고 처형을 당한다.
2. 아Q는 누구인가
자존심이 강하다고 묘사되는 아Q는 비천하고 어리석은 인물이기도 하다. 사려나 겸손 같은 덕목은 찾아보기 힘든 아Q의 성품을 접하고 나면, 도대체 이 어리석고 추한 인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난감해지기 시작한다. 동정도 어렵고, 공감은 더 어렵다. 핍박받는 자들은 대체로 선하며 구원받을 자격이 있다는 통념 속 선악의 잣대로도 이 인물을 꿰어 맞출 수가 없다. 아Q는 구원의 여지가 없을 만큼 심술궂고 사악한 데가 있다. 그렇다고 아Q가 구제불능의 악인인가 하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실제로 아Q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비해 과도한 처벌을 받고, 결국에는 억울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우리가 아Q의 삶을 따라가면서 가장 답답하게 여기게 되는 점은 그의 무지와 어리석음이다. 아Q가 두뇌를 활용하는 유일한 목적은 패배감을 느끼지 않고, 헛된 자부심을 유지하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얻어맞아도 상관없고, 스스로를 버러지라 칭해도 되며, 심지어는 스스로 자신의 뺨을 때려 화풀이를 해도 된다. 자신을 파괴하면서 유지하는 승리감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이 아Q의 파괴적인 만족법이 당시 중국인들과 지금의 우리들에게 아주 낯선 방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루쉰의 이 책을 읽지 않았어도, 누구나 인터넷에서 한 번쯤은 정신승리라는 단어를 어렵지 않게 발견했을 테니 말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아Q가 당시 중국인 전체, 적어도 하층민 전체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핍박받는 존재이면서 늘 강한 자에게 머리를 조아릴 준비가 되어 있다. 나아가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는 우월감을 밑천 삼아 다른 이를 경멸하고 핍박할 준비가 늘 되어 있다. 루쉰이 지적하듯, 샘솟는 우월감의 근거는 현실에 대한 통찰이 아니라, 패배감에서 도피하는 파괴적인 만족법이다. 언제나 깨달음은 너무 늦게 온다. 삶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야 아Q는 무언가를 인식하고 깨닫는다. 자신을 처형하는 문서에 서명하는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던 아Q, 그저 글자를 모르는 것이 부끄럽고 이름 대신 그리는 동그라미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던 아Q는 전신이 먼지처럼 흩어지는 처형의 순간에 와서야 비로소 살려달라는 말을 떠올린다.
3. 누가 아Q를 죽였는가
처형의 총구가 자신을 향하는 순간 아Q는 자신이 만났던 늑대 한 마리를 떠올린다. 굶주린 늑대는 일정한 간격으로 영원히 뒤를 따르며 그의 고기를 먹을 요량이었다고 아Q는 말한다. 도끼 한 자루와 허풍, 두둑한 배짱이 그를 살렸지만, 아Q는 멀리서도 살가죽을 꿰뚫을 듯 번득이던 그 눈빛을 잊지 못한다. 처형의 순간 그를 둘러싸고 환호하는 무리들에게서 아Q는 늑대의 눈빛보다 더 무서운 눈길을 보며, 그 눈알들이 자신의 영혼을 물어뜯는다고 느낀다. 군중의 잔인한 눈빛은 신체의 파괴보다도 강하게 각인된다. ‘아Q정전’의 마지막 이야기를 장식하는 이들은 그 군중이다. 그들에게는 처형이 신나는 구경거리다.
마을 밖 사당에 기거하는 아Q는 애초부터 마을에서 배제되어 있던 존재이기도 하다. 우어엄에게 집적거린 이후 아Q가 받는 벌은 의아할 정도로 과도하다. 더구나 사죄의 대상은 우어멈이 아닌, 자오 가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아Q에게서 입고 있던 옷과 덮고 자던 이불마저 빼앗고, 품삯도 주지 않는다. 혁명도 그를 돕지 못한다. 애초에 아Q는 혁명이 무엇인지 모른다. 기존의 질서가 파괴되는 것이 두렵고, 반란은 곧 고난이라고 여겨 증오하기까지 한다. 기존의 질서는 아Q를 극한의 굶주림으로 몰아가고, 혁명은 그에게 도둑질의 누명을 씌운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Q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한 것은 그의 ‘분별없음’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패배하고 싶지 않다는 어리석음이다. 패배하지 않는 삶은 없다. 자신을 파괴하는 상상 속의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살아남는 패배이다. 패배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냉혹한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며, 자신의 역량을 가늠할 수 있게 된다. 우리를 살아남을 수 있게 해 줄 힘은 그 패배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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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텔님의 댓글
에스텔한 주 빠졌는데, 발제문을 읽으니 단번에 정리가 되는군요. 특히 패배감에 관한 의견에 저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