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차이와 반복 마지막 시간 후기 +2
야옹이
/ 2017-11-03
/ 조회 2,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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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의 마지막 부분은, 들뢰즈가 첨부한 결론 중 ‘반복’에 관한 정리입니다.
들뢰즈는 반복 그 자체를 ‘수동적 종합’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행위를 반복하는 의지가 주체인 나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해왔지만, 들뢰즈는 ‘비인격적인 주체’(나르키소스적 자아)의 응시와 수축을 통해서 잠재적인 장 안에서 개체화의 과정이 일어난다고 보기 때문에 여기에 동일자로서의 주체의 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새에 먹은 것이 소화되고 피는 쉬임없이 돌면서 찌꺼기를 배출하고, 우리가 그에 따라 화장실에 가고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이 습관적이고 본능적인 방식의 반복(헐벗은 반복)을 생각해보면 수동적 종합이 분명하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죠.
그렇다면 두 번째 종합(기억의 반복, 옷입은 반복, 미네모시네)은 어떨까요? 의식을 가진 인간은 행위를 할 때 자연스럽게 기억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지요. 기억 즉 과거의 틀을 통해 현재의 사건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방식으로.
“과거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끈덕지게 자신을 주장하면서 내속하고 공속하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있다. 과거는 사라진 현재 속에 내속하고, 현행적 현재나 새로운 현재와 더불어 공속한다. 과거는 시간의 즉자적 측면이며 이것이 이행의 최종적 근거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는 시간 전체의 순수하고 일반적이며 선험적인 요소를 형성한다. 사실 과거가 자신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와 동시간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결코 현재였었던 적이 없는 어떤 과거에 대해 말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 과거는 어떤 ‘이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 p.194)
우리는 기억이 능동적 종합이라고 생각하지만 들뢰즈는 능동적 종합으로서의 기억이란 ‘재현’일 뿐이며,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수동적 종합으로서의 기억’(순수과거)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순수과거’란 한 때 있었으나 지금은 지나가고 없는 시간이 아니라 ‘모든 현재에 항상 존재하며 현재가 재현되도록 하는, 달리 말하면 지금의 내 행위를 현실화시킨 잠재론적 토대’같은 것이겠죠. 사실 똑같은 과거도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해석해내느냐에 따라 무한히 다른 방식으로 변주된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는데요, 이렇게 보면 운명은 결코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잠재적 차원 위에서 펼쳐지는 하나의 이야기이며, 그렇기에 우리의 자유는 이 원뿔 전체에서 어떤 수준의 기억을 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간(과거 혹은 현재라는)은 이처럼 변화하고 운동하는 것을 담는 하나의 형식일 뿐이지 그 자체로 실체화될 수 있는 선험적인 형식이 될 수는 없는 셈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선적이고 선험적인 시간의 힘을 믿는 인간들은 과거로부터 늘 습관적이고 재현적으로 똑같은 것만을 반복해서 현재화시킴으로써 시간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어떻게든 노화를 막고 생명을 연장해보려고 기를 쓰는 현대인의 모습이 바로 이런게 아닐까 싶네여^^)
바로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는 세 번째 종합의 시간을 ‘탈구된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즉 재현적인 기억의 습관으로부터 결별한 시간이겠죠. 그는 묻습니다. “너는 너 자신의 기억과 결별하고 새로운 길 위에 설 수 있는가”라고요. 우리는 이미 잘 알다시피 의지적이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에 개입할 수는 없습니다. 운명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고, 타자의 마음을 내 뜻대로 움직일 수도 없으며, 어떤 일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룰 수도 없지요. 그런 우리가 유일하게(그러나 충분하게) 우리의 삶에서 능동적 주체로 개입할 수 있는 방식이 있다면 바로 저 세 번째 종합의 방식을 통해서입니다. 들뢰즈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차용하여 탈구된 시간을 설명하기를 좋아하는데요, 그가 엄청나게 근사한 많은 얘기들을 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건 우리들 각자의 해석이 아닐까 싶죠.
저는 개인적으로 ‘영원회귀’의 시간을 ‘점진적으로 완성해나가는 시간이 아닌’ 혁명적 시간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뭔가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들을 매일 꾸준히 조금씩 더해서 언젠가 보다 완전한 것이 되리라는 이 오래된 믿음을 이제 깨버리려구요. 경험상 제가 재현적 사유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엄청나게 지난한 일이라는 걸 알겠는데, 그게 그렇게 날마다 조금씩 더해서 되는 일도 아니겠구나 싶어요. 더구나 저는 낼모레가 환갑인 나이인데 말이죠.
그냥 나를 길 위로 확 던져버리는 것, 매순간 나를 가르고 지나가는 인연의 장 속에 나를 맡기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어떤 위험과 긴장으로부터 나를 지키려고 버둥거리지 않는 것, 그 긴장과 위험을 팽팽하게 품고서, 생이 인연의 조건들을 통해서 나에게 주는 기회를 열심히 사유하는 것! 이게 매번 새로운 주사위를 던지고 무조건 그 패를 긍정한다는 것, 일직선의 시간에 균열을 내고 탈구된 시간을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지... 써놓고 보니 이것도 엄청나게 거창한 얘기긴 하군요!!^^
마지막 후기를 근사하게 맺어야 하는데, 중간에 끼어들어온 제가 어설프게 쓰게 되어서 송구하고,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정수쌤과 반장님 그리고 여러 동학들 덕분에 정말 재미나게 공부했습니다. 이 인연에 나를 맡기지 않았으면 죽을 때까지 진짜 차이가 뭔지 모르는 채로 타자와의 간극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며 살았을 거예요. 진심 감사드려요. 꾸벅!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충분히 근사한 후기입니다. 야옹 님!
모처럼 여유로운 금요일을 보내고 있었는데요(셈나도 좋지만 쉬는 거, 정말 좋네요 ^^)
야옹 님의 후기로 차이와 반복 정말로 매듭을 짓는 기분입니다.
그냥 지나갈수도 있는데, 이렇게 매듭을 짓는 분이시군요 야옹 님은.
함께 있음으로 발생하는 위험과 긴장으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그 긴장과 위험을 팽팽하게 품고 사유하겠다는 말씀,
아주 인상적입니다.
연두님의 댓글
연두
좋은 후기 감사드립니다. 야옹님의 발제와 후기, 간식 모두 인상 깊어요. 간식은 완전 제 스타일~~ ㅋㅋ
길 위로 나를 확 던져버릴 것, 매순간 나를 가르고 지나가는 인연의 장 속에 나를 맡기고 그 위험과 긴장을 팽팽하게 품을 것.
그렇게 사건들을 맞이하며 살고 싶습니다.
천의 고원 강의에서 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