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1107 발제_미메시스 관련 단편들
희음
/ 201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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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 미메시스 관련 단편들 읽기
20171107 희음
<유비와 근친성> 1919
서문: 유비는 추측컨대 은유적 유사성, 즉 관계들의 유사성이다. 그에 반해 본래적 의미에서 (비은유적 의미의) 유사한 것은 실체들만 될 수 있다. 근친성은 유비로도 유사성으로도 충분히 해명할 수 없다.
유비는 어떠한 경우에도 근친성을 근거 짓지 못한다. 자식이 부모와 근친관계인 것은 자식들이 부모와 유사한(닮은) 점을 통해서도, 인과관계(출생 관계)를 통해서도 비롯되지 않는다. 근친성은 과학적, 합리적 원칙을 가진 유비와는 다르다. 유비는 근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며 유비되는 것 안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 이성적인 것이다. 반면, 근친성은 니체의 아포리즘, “외양은 역사가를 거스른다”에서 입증되듯 유비와는 전혀 다르게 움직인다. 근친성은 감정(정서)과 관련된다. 유비와 근친성을 혼동하는 것은 완전한 도착(倒錯)인데, 그 한 예가 음악을 들을 때 어떤 풍경, 어떤 사건, 어떤 시를 표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자들은 음악과 (합리적으로) 유비되는 무언가를 찾는다. 그러나 근친성은 합리와 이성의 영역 안에서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은 순수한 감정에 의해서만 청각적으로 지각되는 것이다. 민중의 감정 속에서 사람의 근친성이 청각적으로 지각되는 예 또한 여기에 속한다.
근친성을 성립시키는 것은 유사한 것 또한 아닌데, 그 유사한 것은 그것이 유비를 초월한 것으로 입증되는 곳에서 근친성의 예고자가 될 수 있다.
-> 이것을 벤야민이 1933년 <유사성론>에서 이야기한 점성술에 관한 서술과 연결지어 보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비감각적 유사성이 모든 읽기에 작용한다는 서술. 즉 그것은 심층에서 읽기라는 말이 갖는 묘한 이의성을 말하는데, 그 둘은 범속한 의미에서의 읽기와 마법적 의미에서의 읽기라는 이의성을 가리킨다. 점성가가 하늘에서 별들의 위치를 읽는 동시에 별들의 상태에서 미래나 운명을 읽어내는 것. 과학적, 합리적 원칙에 근거한 관계의 유사성이 아닌, 마법적이고 감각적인 유사성 쪽으로의 뛰어넘음. 이것이 바로 유비를 초월한 것으로 입증되는 유사성, 예고자로서의 유사성이라는 사건의 한 예가 아닐까. 물론 이것은 위 글보다 한참 후에 씌어진 단편이니 위의 서술을 이것의 단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맞겠다.(206 참조)
근친성을 유비의 원칙으로 바라보는 것은 권위와 가족적 공속성에 대한 현대적 견해를 특징짓는 독특한 것이다. 근친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비를 찾아내길 기대하는 것.
->근친성으로부터 이러한 유비를 도출하고 그것을 사람들의 의식 속에 기입하는 것, 감정의 관계를 은밀히 강요하는 것을 통해, 가족 중심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사회에 대한 말일 것이다.
<점성술에 대하여> 1932
점성술에 대한 관점을 마법적 “영향”에 관한 이론, “별빛의 작용” 따위를 배제한 가운데 정립하려는 시도는, 이러한 탐구들 주변에 낀 아우라를 제거해 주기에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은 도처에서 유사성의 형상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한 비교를 통해 우리가 사물들 속에 가져간 것들만이 아니라, 그것들 속에서 고유하게 작용하는 힘, 어떤 미메시스적 힘이 낳은 결과들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은 객체들 뿐 아니라, 주체들, 즉 미메시스적 중심들에 대해서도 적용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인식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미메시스적 힘, 혹은 관찰방식에 있어, 고대인들의 미메시스적 감각의 아주 작은 부분만이 남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점성술에 대한 결정적 고찰은 미메시스의 객관성이 존재했다는 것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별들의 성좌에서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다. 천궁도를 하나의 독특한 전체성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는데, 천체 상태는 하나의 특성을 지닌 통일체를 나타내며 개개의 행성들은 이 천체 상태에서의 작용양태에서 그 성격(본질)이 인식된다. 고대에, 천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집단, 혹은 개인에 의해 모방 가능했으며, 바로 그 모방에 의해 점성술에 경험적 성격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미메시스의 천재가 실제로 삶을 규정하는 힘으로 작용했다면, 그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형상에 대한 가장 완성된 통찰력을 이제 갓 태어나는 아이에게 적용함으로써밖에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은 태어난 몇 해 동안 언어를 배우는 데 고도의 미메시스적 천재를 증명해 보인다.
-> 미메시스의 객관성이란 말은 무엇일까. 세상의 모든 미메시스에 대한 절대적 표본을 말하는 것일까. 혹은 미메시스에 대한 영원불변하는 하나의 기원이, 모든 모방들에 앞서는 단 하나의 기원이 바로 그것이라는 말일까.
이 모든 것이 합리적인 점성술을 위한 완전한 서문이다.
-> 점성술을 합리 쪽에 위치 지으려는 시도, 점성술에서 마법적 힘과 아우라를 지우려는 벤야민의 시도는 <유사성론>으로 이어진다. ‘합리’적 미메시스를 대표하는 ‘언어’의 탄생에 바쳐지는 서문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유사성론> 1933
유사성의 영역에 대한 통찰은 신비적 지식의 영역을 밝히는 데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통찰은 유사한 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재현할 때 얻어질 수 있다. 미메시스의 최고 능력을 가진 존재는 인간이다. 미메시스 능력의 역사에는 개통 발생, 개체 발생 두 부분이 있다. 개체 발생적 의미에서는 ‘놀이’가 미메시스 능력의 교본이라 할 수 있다.
-> 해당 본문에도 놀이의 예가 나와 있지만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 시절] 안의 <숨을 곳들>이라는 에세이 안에 그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아름다운 예가 있어 옮겨 본다.
“이곳에서 나는 사물만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갇혔다. 그 세계는 나에게 무시무시할 정도로 분명하게 보였고, 아무 말없이 가까이 다가왔다. 교수형당하는 사람이 비로소 밧줄과 나무가 어떻게 생긴지를 알게 되는 것도 그와 같으리라. 현관의 커튼 뒤에 선 아이는 커튼처럼 나부끼는 하얀 물체, 즉 유령이 된다. 식탁 아래 웅크리면 아이는 나무로 된 사원의 신상이 된다. 조각이 새겨진 식탁의 다리들은 사원의 네 기둥이다. 문 뒤에 숨으면 아이 자신이 문이라는 무거운 가면을 쓴 마법의 사제가 되어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오는 사람 모두에게 마법을 거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미메시스적 태도의 훈련은 이들에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는가. 그것은 미메시스적 태도의 계통 발생적 의미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문제다. 예로부터 유사성의 법칙이 지배한 삶의 영역은 훨씬 컸다. 소우주와 대우주 같은 말들처럼 유사성 경험이 반영된 표현들만 보더라도. 오늘날에도 유사한 것들에 대한 지각은 시시때때로 일어나는데, 그렇게 직접 감각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무의식적으로 지각하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이 자연적 상응물들은 인간이 지닌 미메시스 능력을 자극하고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는 데 결정적인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수세기가 흐르는 동안 옛것 그대로 보전되지 않았다. 미메시스적 힘은 현대에 와 희미해졌거나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다른 영역으로 전환되었을 가능성 역시 남아 있다. 즉 원시인이나 고대인들에 비해 마법적인 상응관계의 측면이 현저히 줄어든 현대인의 지표세계는 미메시스 능력이 쇠약해진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 능력이 사멸했느냐, 아니면 사멸하면서 모종의 변화를 겪었느냐 하는 것이 관건인 것이다. 점성술에서 그 해답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미메시스적 객관성이라는 것 또한 별들의 성좌를 통해 드러난다.(이어지는 말은 위 <점성술에 대하여>의 언급과 동일하다.)
위 설명에서 결정적 의미를 띠는 탄생(어린아이의 탄생)이라는 것은 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유사성의 지각 또한 순간에 묶여 있다. 별들의 운행과 마찬가지로 순간적이고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유사한 것들에 대한 지각은 시간적 요인에 묶여 있으며, 두 별의 만남에 점성가라는 제3자가 끼어드는 양태와도 같다. 그 지각의 순간은 휙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며, 그럴 때 어떤 별들의 상태와 한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한 그 무엇을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지각세계에 지니고 있지 않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비감각적 유사성의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비감각적 유사성의 개념이 갖는 모호성을 해소할 규준을 가지고 있다. 그 규준은 언어이다. 미메시스 능력이 언어에 미친 영향에 대해 흔히들 이야기해 왔지만, 그것은 감각적 유사성 차원에서만 다루어졌다. 예를 들자면 의성어의 차원. 그러나 레온하르트가 이야기하듯이 “모든 낱말은 - 그리고 언어 전체는 - 의성어적이다.” 이 말 안에 비감각적 유사성의 개념이 숨어 있다. 여러 언어에서 동일한 의미에 해당하는 낱말들을 뽑아 내 열거해 보자(개-dog-chien-hund-perro). 하등의 유사성도 보이지 않을 그 낱말들이 모두 그 의미된 것과 유사성을 보이는지 연구해 봄으로써, 비감각적 유사성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음성 언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문자에 대해서도 신비주의적 언어이론들은 관심을 기울인다. 문자상(文字像)이 의미된 것 내지 명명하는 사람에 대해 갖는 관계에서 비감각적 유사성의 본질을 설명해준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Beth(문자상) - 집(의미된 것), 베뜨(음성언어) - 집(의미된 것), Beth(문자상) - 베뜨(음성언어): 이 세 가지 경우의 결합관계 모두가 비감각적 유사성의 예들이다. 그 중 맨 마지막 것이 가장 중요하며 가장 비감각적인 유사성을 보여주며, 가장 뒤늦게 도착한 유사성이기도 하다.
-> 비감각적 유사성의 예시에 딱 들어맞는 벤야민의 에세이가 있다. 그 또한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 시절] 안에 든 <무메레렌>이라는 작품이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벤야민의 위 단편 작업이 바로 <무메레렌>을 쓰는 동안 생각의 실마리를 얻게 된 결과라고 한다.
“옛 동요 중에 ‘레렌 숙모(Muhme Rehlen)'가 나오는 동요가 있다. 내게 ’무메‘라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동요 속 인물은 하나의 유령이 되었다. 즉 무메레렌이라는 유령이 되었다. 그러한 오해는 내게 세상을 왜곡시켰다. 그러나 좋은 의미에서 그러했다. 즉 오해는 세상의 내면으로 향하는 길들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어떠한 계기에서 일어나는 오해이든 마찬가지였다.
한 번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누군가 ‘동판화(Kupferstich)'라는 단어를 발음했는데, 이러한 우연이 초래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나는 의자 아래에서 머리를 쑥 내밀어보았다. 그것은 바로 ’머리 찌르기(Kopf-verstich)'였다. 그때 나는 내 자신과 단어를 왜곡시켰는데, 그것은 내가 삶 안에 자리를 잡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다. 때때로 나는 원래 구름인 낱말들로 나를 위장하는 법을 배웠다. 유사성을 파악하는 능력은 실은 유사해지고 또 유사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오래된 강제가 미약하게나마 남은 잔재나 다름없다. 내게 이러한 강제를 행사한 것은 바로 낱말이었다. 나를 예의바른 행동의 모범과 닮게끔 하는 낮말이 아니라, 집, 가구, 옷들과 유사하게 만드는 낱말이 그러하다.”
언어와 문자의 이러한 수수께끼와 같은 마법적 측면은 기호적 측면과 무관하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미메시스적인 것은 근거가 확실한 어떤 의도로서, 기호적인 것(전달자)을 발판으로 삼아 나타날 수 있다. 텍스트는 자신의 철자들 안에서만 수수께끼의 상을 만들 토대를 이룬다. 단어들 또는 문장들의 의미연관이 전달자이며, 이 전달자에서 비로소 섬광처럼 유사성이 현상화되어 나타난다. 왜냐하면 인간에 의한 유사성의 생산은 대체로 번득이며 지나가버리고 마는 순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유사성은 휙 스쳐 지나간다.
“씌어지지 않은 것을 읽기.” 이 읽기가 가장 오래된 읽기이며, 언어 이전의 읽기, 동물의 내장, 별들 또는 춤에서 읽기이다. 이후, 룬 문자, 상형문자가 사용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미메시스적 재능이 문자와 언어로 진입하게 된 단계임을 가정할 수 있다. 언어는 미메시스적 태도의 최고 단계가 되었다. 비감각적 유사성의 완벽한 서고로 미메시스적 능력이 전이되어 들어가, 언어는 마법의 힘들을 해체할 정도까지 이른 매체가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