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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1108 외침 두번째 시간 발제 +1
아라차 / 2017-11-07 / 조회 2,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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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읽기 20171108 발제_아라차


<쿵이지>

왁자하고 지루한 술집에 쿵이지라는 사람이 술을 마시러 온다. 본래 가난한 이들은 몽당옷을 입고, 부자들은 장삼을 입고 오는데 쿵이지는 분명 거지꼴인데 장삼을 입고 온다. 사람들은 그런 쿵이지를 놀린다. 거지꼴을 하고서는 ‘하노니, 이로다’ 말투를 쓰니 풍자당하는 것이다. 알고보니 쿵이지 글 깨나 읽은 사람이란다. 그런데 고시패스를 못해 필사를 해가며 입에 풀칠을 한단다. 일감이 많을 리 없다. 팔아먹을 것이 생기면 책을 사고 술을 마셨나보다. 그러다 돈이 더 궁해져 책을 훔치고 걸리기를 반복하니 얼굴이 온전할 날이 없고, 더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어갔다. 

한사코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항변하며, 술집의 다른 몽당옷들과는 수준이 안 맞아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했던 쿵이지는 술집사환으로 일하는 나이어린 ‘나’에게만은 인자한 미소로 한자를 가르쳐주려 했다. 어른들은 짜증나 했지만 어린아이들에게만큼은 다른 태도를 보인 것.(그래도 술안주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쿵이지를 몽당옷 어른들 축에서 비웃었지만 그가 오는 날만 기다리곤 했다. 지루한 술집을 쾌활하게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거지꼴이었지만 올 때마다 술은 꼭 현금으로 마셨던 쿵이지. 술값을 못 내고 술을 마셔도 한달 정도면 어김없이 돈을 갚았다. 그러다 형편이 안 좋아졌는지 빚장부에서 쿵이지 이름이 지워지지 않은 날이 계속되었고, 결국 책도둑질을 하다 걸려 태형을 당해 다리를 못쓰게 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다리를 못 쓰니 손을 써서 술을 마시러 온 쿵이지. 그렇게 마지막 술을 마시고는 그는 열 아홉푼의 빚을 남기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글을 배웠으나 글로 입신하지 못한 한 남자의 이야기.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내실외허의 참상. 노동자 축에도, 지식인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경계인의 현실. 나는 이렇게밖에 못 살지만 어린 너희들만은 꼭 배워서 다른 세상을 살라는 허망한 외침. 

 

<약>

1.폐병에 걸린 아들에게 먹일 약을 구하러 간 아버지. 2.드디어 구한 약을 아들에게 먹임. 3.약의 정체는 사람 피를 먹인 찐방. 비법(?)을 알려준 듯한 캉이라는 자의 허세섞인 이야기 속에 죽은 자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4.그러나 아들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여 공동묘지에 묻힘. 어머니는 억울하게 죽은 아들의 무덤을 찾아온 듯한 다른 여인과 만남. 억울하게 죽었다는 걸로 보아 찐방에 묻힌 피의 주인이 아닐지...

 

오래된 인습과 악습에도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사람들만이 득실대는 잔인한 말세적인 상황. 무심한 구경꾼이 되어가는 사람들은 싸우다 패배한 혁명가조차 금새 조롱거리로 만들어버리고, 기댈 곳이라고는 무덤가에 서려있는 희미한 미래에 대한 잔상 뿐.

 

<내일>

루전이라는 지방 사람들은 초저녁부터 잔다. 캄캄한 밤에 늦게까지 소리가 나는 곳이 있다면 술집과 산씨라는 과부댁의 물레 돌아가는 소리 뿐이다. 산씨댁은 물레를 돌려 아이와 함께 생계를 유지하며 산다. 그런데 아이가 병에 걸리고 만다. 병원에도 가고 약도 먹여보지만 결국 죽고 마는데. 산씨댁은 공들여 아이를 보내지만 믿기지 않은 현실에 넋이 나간다. 술집도 문을 닫고 산씨도 멈춰버린 물레방에서 잠든다. 루전에 내일이 오긴 오는 걸까.

 

<작은 사건>

인력거꾼이 인력거 앞에서 비틀거리다 쓰러진 늙은 여인을 부추겨 일으켜세우고 주재소까지 데려다주는 모습을 보면 충격에 빠진 나. 나를 부끄럽게 하고 나의 쇄신을 촉구하고, 내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주는 작은 사건.

 

<두발이야기>

자네들은 스스로  황금시대의 출현을 그들 자손에게 약속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에겐 뭘 줄 수 있는가? 아, 조물주의 채찍이 중국의 등짝을 후려치지 않는 한, 중국은 영원히 이 모양 이 꼴일 거야. 스스로 머리털 한 올도 바꾸려 하지 않을테니 말야!

 

<야단법석>

변발 때문에 한바탕 야단법석을 떠는 마을 사람들. 칠근이 대처에 나갔다 셴형 주점에서 들은 “황제가 보위에 올랐다”는 말에 마을은 술렁인다. 문제는 황제가 변발을 요구한다는 것.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변발을 올렸던 자오치 영감마저 변발을 내리고, 변발이 없으면 어떤 벌을 받아야 하는지 책에 나와 있는 것을 조목조목 읊어댄다. 듣고 있는 칠근댁의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녀의 남편인 칠근은 이미 대처에 나가 변발을 잘랐기 때문. 곧 무슨 일이라도 날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이런저런 가늠을 하느라 바쁘다. 하지만 어떤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대처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그런데 열흘 남짓 지났을 때 황제가 보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자오치 영감이 변발을 다시 올리고 장삼을 입지 않았다는 것과 셴형 주점에서 별다른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변발 때문에 일어난 야단법석은 끝난 것 같다. 

 

혁명이 성공해서 새 시대를 맞이할 것 같은데, 칠근의 딸은 왜 전족을 했을까. 정부의 혁명과 민중의 혁명은 다르다는 의미일까? 

 

<고향>

옛 집은 점차 멀어져 갔다. 고향산천도 점점 멀어져 갔다. 하지만 나는 일말의 미련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방에 보이지 않는 담장이 쳐 있고 나 혼자 거기 남겨진 듯한 느낌이 들어 울적했다. 수박밭 꼬마 영웅의 영상은 더없이 또렷했건만 이젠 홀연 희미해져 버렸다. 그것이 나를 슬프게 한다. 

 

희망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갖겠다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며 언제까지 연연해할 거냐고.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도 나 자신이 만들어 낸 우상이 아닐까? 그의 소망은 비근한 것이고 내 소망은 아득할 것일 뿐.

 

생각해보니 희망이란 본시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거였다. 이는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엔 길이 없다. 다니는 사람이 많다 보면 거기가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은 쉽게 희망을 얘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 시간 작품에서도 여전히 ‘아이’와 ‘희망’이 등장한다. 그때의 말세나 지금의 말세나 정말 암울의 구렁텅이긴 한가보다. 대부분의 이야기를 다음 시즌(세대)에 떠넘긴다. 아쉽다. 지금도 제대로 못 살면서 나중엔 괜찮을 거라고, 우리 세대는 망쪼가 들었지만 미래 세대만은 어쩌구 저쩌구. 그래놓고 대책없는 결론 ‘희망’을 얘기한다.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희망은 가망없는 현실이라는 단정 속에 언젠가 저 먼 곳에 구원이 있을 거라는 기대로 지금의 삶을 억압하는 카페인일 뿐이다. 지금을 탕진할지언정 희망을 머금고 두 눈 부릅뜨고 밤을 지새우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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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문학세미나는 첨이라 발제를 어케 해야 할지;; 얼기설기 줄거리 요약하고, 일어난 심상 몇가지 적어보았습니다. 낼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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