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세미나 > 세미나자료
  • 세미나자료
  • 세미나발제문, 세미나후기를 공유하는 게시판입니다.
세미나자료

[코뮨] 거대한 전환 :: 9장 & 10장 후기 +2
제씨 / 2017-10-17 / 조회 2,075 

본문

칼 폴라니가 생각하는 빈민이란 무엇일까?

오라클이 던진 질문이 나의 머리를 쿵 쳤다. 9주간 거대한 전환을 읽으면서, 7~8장에서는 17~18세기 구민법에 대해서, 9~10장에서는 그 당시 학자들의 빈민에 대한 관점을 같이 공부하고 논의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나눴던 주제에 늘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빈민, 구호대상극빈자에 대해서 내가 정확한 이해 없이 지나갔던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1780년 아담스미스의 국부론까지만해도 ‘부’는 공동체적 문제였기에, 빈민이라는 명확한 의식이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공동체에서 이탈한 사람들 정도였다. 국부론이 나온지 10년이 지나지 않아 타운센드의 ‘구빈법에 대한 논고’가 빈민에 대한 인식을 하기 시작한다.

 

타운센드는 인간이 실제로 짐승이며, 굶주림에 따라 움직이기에 결국 균형이 이루어짐으로 최소한의 정부만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사회에는 재산소유자와 노동자인 두 종류의 인종이 있으며, 노동자는 굶주림으로 그 수가 조절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굶주림을 위해서는 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논리에 따르면 타운센드에게 ‘빈민’이란 굶주린 노동자이다. 그리고 ‘가난’의 문제는 ‘공동체 속의 문제’가 아닌 동물적인 본능인 ‘굶주림’의 문제가 되면서 사회적인 아닌 경제적인 문제가 되어버린다. 그 이후의 나온 버트, 벤담등의 ‘빈민’에 대한 입장도 대동소이하다. 딱 한사람 오언만 제외하고.

 

오언은 1817년에 이렇게 말했다. “지금 우리는 기계제 공장이 도입되기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비참 상태에서 저질인간이 되어 살고 있다. 인간이 저질로 타락하는 이유는 공장의 아주 기초적인 생계수단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세계가 공장제 생산화 되면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성격의 인간들로 다시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이 생겨나는 성격은 개인의 행복이나 전체의 행복에 아주 해로운 원리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입법의 개입과 지도가 없다면 가장 개탄스럽고 영구적인 여러 사회악을 낳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는 타운센드의 최소한의 정부와 인간은 오직 굶주림에 의해서만 움직인다는 논리와는 정반대이다. 또한 오언이 생각하는 빈민은 ‘저질인간’인데 ‘저질인간’은 단순히 경제적인 비참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타락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써 빈민의 문제는 경제에서 다시 공동체적인 문제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칼 폴라니가 말하는 ‘빈민’이며 빈민에 대한 해결책이 아닐까싶다.

 

내가 생각하는 빈민이란 625전쟁때의 무료급식소에 줄 서있는 사람들의 흑백사진의 이미지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이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단지 돈으로만 ‘빈민’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짜 빈민은 최저생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무료급식소에 줄을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언이 말하는 개인의 행복이나 전체의 행복에 해를 주는 사회적으로 타락한 사람인데 말이다. 자본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다른 방향을 찾지 못해서 떠나지 못하고, 자본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결국 자본주의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어쩌면 우리 모두 빈민이며 저질인간일지도 모르겠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이번 세미나에서는 구호대상 빈민이 누구인가, 그들은 어떻게 생산되었나를 가지고 토론했지요.
이 주제에 관하여 타운센드와 오언은 극명한 대립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아의 동물학=굶주림의 경제학으로 요약되는 타운센드에 따르면,
구호대상 빈민의 존재는 자연적인 것이며, 그들의 굶주림은 노동을 위한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기아는 가장 광폭한 동물도 길들일 수 있을 것이고, 가장 사악한 동물에게 고상함과 예의ㆍ복종ㆍ종속을 가르칠 것이다.
빈민을 자극하여 노동하도록 몰 수 있는 것은 기아밖에 없다.”

반면 공상적 사회주의자였던 오언은 구호대상 빈민을 자본주의적 기계제의 결과로 분석합니다.
“지금 우리는 기계제 공장이 도입되기 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비참상태에서 저질인간이 되어 살고 있다.
인간이 저질로 타락하는 이유는 공장의 아주 기초적인 생계수단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가 공장제 생산화 되면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성격의 인간들로 다시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이 생겨나는 성격은 개인의 행복이나 전체의 행복에 아주 해로운 원리에 기반하고 있으므로,
입법의 개입과 지도가 없다면 가장 개탄스럽고 영구적인 여러 사회악을 낳을 것이다.”

타운센드가 구호대상 빈민의 굶주림을 노동을 강제하는 수단으로 파악한 반면,
오언은 구호대상 빈민(굶주림)을 자본축적과정에서 나타나는 근대적 무산자로 해석합니다.
즉 맑스가 말한 바다로, 자본의 축적치 낳은 빈곤의 축적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대립되는 두가지 관점에 대한 흥미로운 후기입니다. 잘 읽었어요. 제씨^^

마지막 문장은 우리가 함께 두고 생각할 문제입니다. <자본>에 이어 <거대한 전환>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자본주의 위에서 살아가고 있거나.
 자본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 다른 방향을 찾지 못해서 떠나지 못하거나."

하지만, 문제설정은 해답이 아니라 출구를 찾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방식으로 문제설정을 다르게 한다면!
"자본주의 위에 살면서 자본으부터 탈주하기, 혹은 자본주의를 탈주하게 만들기"

올리비아님의 댓글

올리비아

저도 이번 강을 읽으면서 현재의 복지 정책이나 방향, 어떻게 가야 하는가 등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국민을 개, 돼지로 알고 있는 정치인들이 생각하는 정책의 방향성 ㅜㅜ
오언 생각할수록 대단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욥 ~~

세미나자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