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성의 역사 1권> 1026 발제 +3
유택
/ 201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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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1권 : 제3장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 발제 : 10월26일 유택
성에 관한 담론이 세 세기 전부터 지금까지 감소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증가했고 이 담론으로 인해 금기와 단죄가 야기되었다 해도 더 근본적으로는 잡다한 성생활 전체의 공고화와 확립이 이 담론에 의해 보장되었다는 주장을 누구나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한다. 성에 관해 그토록 많이 말한다고 해도, 성이 편입된 바로 거기에서 성을 확대되고 세분되고 명시된 것으로 드러낸다 해도, 사실은 성을 은폐하고자 애쓸 뿐일지 모른다.
성 자체에 관해 말하기가 가능하지 않거나 거부되는 가운데 과학은 본질적으로 도덕의 절대적 요청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도덕에 의한 분할을 의료규범의 형태로 되풀이했다. 도처에서 과학은 진실을 말한다는 구실 아래 공포를 부추겼고, 성생활의 아무리 사소한 변이일지라도 반드시 여러 세대에 영향을 미칠 엄청난 해악으로 상상했고, 소심한 사람의 은밀한 습관과 혼자 사는 사람의 사소한 기벽도 사회 전체에 위험하다고 단언했고, 엉뚱한 쾌락의 끝머리에는 바로 죽음, 즉 개인의 죽음, 세대의 죽음, 인류의 죽음을 배치했다.
이런 식으로 과학은 의료의 실천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는데, 의료의 실천은 집요하고 경박하고 혐오의 말을 수다스럽게 내뱉고 법과 여론에 호소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진실의 요구를 따른다기보다는 질서의 힘에 굴복하는 것이었다. 과학은 생물학과 역사의 긴급한 요청임을 내세워 당시에 나타나기 시작한 국가 차원의 인종차별을 정당화했다. 과학은 인종차별을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19세기 전체에 걸쳐 성은 서로 분명히 구분된 두 가지 범위의 지식, 즉 과학적 규범성에 따라 연속적으로 발전한 생식의 생물학, 그리고 완전히 다른 형성의 규칙을 따르는 성의 의학에 포함되는 듯하다. 전자는 서양에서 과학 담론의 확립을 뒷받침한 그 막대한 지식의 의지에 속하는 반면, 다른 하나는 끈질긴 비-지식의 의지와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
시대에 뒤떨어진 맹신뿐만 아니라 틀에 박힌 무분별, 즉 듣지도 보지도 않으려는 거부의 태도, 그러나 아마 핵심적일 사항으로서, 누구나 출현하게 만들거나 강압적으로 표명되기를 요구하는 바로 그것을 거부하는 태도가 19세기에 성에 관해 행해진 학자들의 담론에 스며들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실 몰이해는 진실에 대한 기본적 관계를 토대로 해서만 일어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진실을 피하고 진실에 이르는 통로를 차단하고 진실을 가리기이다.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 것도 역시 진실을 지향하는 의지의 결과이다.
누구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다거나 누구나 잘못 생각한다는 점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성을 중심으로 성에 관한 진실을 마지막 순간에 감출지언정 막무가내로 생산하는 거대한 장치가 구축되었다는 점이다. 핵심적인 사항은 성이 감각과 쾌락, 법이나 금지뿐만 아니라 진실과 거짓의 문제였다는 것, 성의 진실이 유용하건 위험하건, 아주 자세하건 끔찍하건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변했다는 것, 요컨대 성이 진실의 관건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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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진실을 생산하는 데에는 역사적으로 두 가지 주요한 방식이 있다.
‘아르스 에로티카 ars erotica(성애의 기술)’
‘아르스 에로티카 ars erotica’를 갖춘 사회. 그러한 사회는 중국, 일본, 인도, 로마 그리고 회교권의 아랍 사회 등 매우 많았다. 성애의 기술에서 진실은 실천으로 간주되고 경험으로 얻어지는 쾌락 자체로부터 도출된다. 쾌락은 무엇보다도 먼저 쾌락 자체와 관련하여, 쾌락으로서, 따라서 쾌락의 강도, 쾌락의 특별한 속성, 쾌락의 지속시간, 육체와 영혼에 미치는 쾌락의 반향에 따라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비밀을 보유한 스승과의 관계는 기본이고, 스승만이 지식과 온전한 엄격함으로 제자의 수행을 지도하는 입문의 끝에 이르러 비의적(비밀스러운 의식과 같은) 방식으로 이 기술을 전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구라도 이 기술의 이점을 얻게 되면, 가령 육체의 완벽한 통제, 독특한 기쁨, 시간과 한계의 망각, 장생의 영약, 죽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에 이르게 되면 전혀 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 scientia sexualis(성의 과학)’
우리의 문명은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를 실천하는, 더 정확히 말해서 성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 요컨대 입문의 기술 및 스승에 의해 전수되는 비밀과 전적으로 대립적인 권력-지식의 형태에 의거하는 방식을 수세기에 걸쳐 발전시킨 아마 유일한 문명일 것이다. 그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고백이다. 서양사회에서는 고백은 적어도 중세부터 진실의 생산이 기대되는 주요한 관례에 포함되었다. 고백은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의 영역에서 중심적 역할을 부여 받았다.
타인에 의해 어떤 사람에게 부여되는 신분, 정체성, 가치의 보증이라는 의미의 “인가”는 점차 자취를 감추었고, 그 대신 자신의 행위와 생각에 대한 어떤 사람의 인정이라는 의미의 “고백”이 등장했다. 개인은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의 보증과 타인에 대한 유대의 표명(가족, 총성, 후원)에 의해 공증되었으나, 그 후에는 자기 자신에 관해 말할 수 있거나 말해야 하는 진실한 담론에 의해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진실의 고백이 권력에 의한 개별화 과정의 핵심에 포함된 것이었다.
고백은 서양에서 진실을 생산하기 위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기술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때부터 우리는 고백이 유별나게 행해지는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누구나 고백한다. 아니 누구나 고백을 강요당한다. 고백과 고문은 이를 테면 서로에 대해 적의로 가득 찬 쌍둥이인 셈이다. 가장 참혹한 권력도 가장 무력한 애정처럼 고백을 필요로 한다. 서양에서 인간은 고백의 짐승이 되었다.
고백의 의무는 이제 그토록 많은 갖가지 지점으로부터 우리에게로 부과되고, 이제부터 우리가 고백을 더 이상 속박적 권력의 효과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들러붙는데, 우리에게는 반대로 진실이 우리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곳에서 드러나기만을 “요구하는”듯이 보이고, 진실이 드러나기에 이르지 않는 것은 진실이 속박되어 있고 난폭한 권력이 진실을 짓누르며 일종의 해방에 의해서만 마침내 진실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고백은 해방하고, 권력은 침묵으로 몰아넣으며, 진실은 권력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자유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만큼 많은 전통적 주제로서, 진실이 본래적으로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오류가 예속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 진실의 생산에 권력관계가 온통 스며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진실의 정치사”에 의해 뒤집어져야 할지 모른다. 고백은 이러한 경우의 전형적 사례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고해성사부터 오늘날까지 성은 고백의 특별한 소재였다. 성은 누구나 감추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반대로 성이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고백되는 것이라면? 성을 감추어야 할 의무가 성을 고백해야 할 의무의 또 다른 양상이라면? 이제 우리 사회에서 성이 여러 세기에 걸쳐 고백의 확고한 체제 아래 놓여 있는 것이라면?
그리스에서는 아주 유용한 지식이 몸에서 몸으로 전달된다는 점 때문에 진실과 성이 교육학의 형태 안에서 서로 연결되었고, 성이 인식의 전수에 대해 매체의 구실을 했다. 우리의 경우에는 진실과 성이 바로 고백 속에서 개인적 비밀의 철저한 의무적 표현에 의해 서로 연결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로 진실이 성과 성의 표현에 대해 매체의 구실을 한다.
그런데 고백은 말하는 주체가 언표의 주어와 일치하는 담론의 관례이다. 또한 권력관계 안에서 전개되는 관례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대화자일 뿐만 아니라, 고백을 요구하고 강요하고 평가하고 개입하여 판단, 처벌, 용서, 위로, 화해를 실행하는 심급인 상대방이 적어도 잠재적으로 현전하지 않으면 고백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고백의 담론에 내재하는 권력구조 때문에 고백의 담론은 ‘아르스 에로티카’ 에서처럼 스승의 지고한 의지에 의해 위로부터가 아니라, 조심성이나 망각을 보증해주는 것이 어떤 강압적 속박에 의해 폭발하도록 만드는 필요하거나 불가피한 발언처럼 아래로부터 생겨난다.
고백의 담론이 갖는 진실은 스승의 높은 절대적 권위에 의해서나 그가 전하는 전통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과 그가 말하는 내용 사이의 관계, 이 양자가 모두 본질적으로 담론에 귀속한다는 사실에 의해 확보되는 반면에, 지배의 심급은 말하는 사람 쪽이 아니라(왜냐하면 속박 당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듣고 침묵하는 사람 쪽에, 알고 대답하는 사람 쪽이 아니라 알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 질문자 쪽에 있다. 요컨대 이 진실의 담론이 효력을 발생하는 것은 진실의 담론을 수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의 담론을 강요당하는 사람 쪽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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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성에 관한 참된 담론의 생산을 지배하는 일반적 모태였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그렇지만 고백은 상당히 변모했다. 즉, 오랫동안 고해성사의 실천에 단단히 결부되어 있었으나 개신교, 반종교개혁, 18세기의 교육학, 19세기의 의학이 출현하고부터는 점차 관례적이고 배타적인 장소를 벗어나 확산되었고 일련의 모든 관계에서, 가령 자녀와 부모, 학생과 교육자, 환자와 정신과 의사, 비행자와 전문가 사이의 관계에서 활용되었다.
이제 고백은 무엇이 행해졌는가(이를 테면 성행위), 어떻게 행해졌는가를 말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성행위를 부추긴 생각, 성행위에 따라붙는 강박관념, 성행위에 활기를 불어넣는 이미지, 욕망, 쾌락의 조절과 특성을 재현하는 것이다. 사회가 개인의 쾌락에 관한 속내 이야기를 촉구하고 들으려 한 것인데, 이는 아마 역사상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서양사회는 구성원들의 쾌락에 관해 한없는 기록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죄와 구원, 죽음과 영원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육체와 생명에 관한 담론, 즉 과학의 담론과 맞물려야 하는 진실의 담론이 쾌락에 관해서도 실행되어야 하는 시기였다.
진실의 두 가지 생산 양태, 즉 고백의 방식과 과학 담론의 구성방식 사이에는 결핍이 아니라 과잉, 중복, 충분히 많지 않다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많은 담론, 아무튼 간섭이 실재했다. 성적 고백을 강요한 그 광범위한 전통이 어떻게 과학의 형태로 전환되기에 이르렀을까?
1). ‘ “말하게 하기”의 임상적 체계화에 의해.’ (청취 기술)
고해를 자기 성찰과 배합하고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해독 가능한 징후 및 증상 전체의 전개와 결합하기, 심문, 자세한 질문서, 기억의 환기를 노리는 최면, 자유로운 관념연합. 즉, 고백의 과정을 과학적으로 수용 가능한 관찰의 영역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그만큼 많은 수단.
2). ‘확산된 일반적 인과율의 가설에 의해’ (인과관계의 전제)
모든 것을 말해야 한다는 생각, 모든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성이 고갈되지 않은 다형의 원인으로서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는 원칙에 의해 정당화된다. 성이 “하여간 모든 것의 원인”이라는 원칙은 요구된 기술의 이론적 이면이다. 성에 한없는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 만큼 당연히 성은 철저한 조사를 받지 않을 수 없다.
3). ‘성생활에 내재하는 잠복성의 원칙에 의해’ (잠복성의 원칙)
성생활에 특유한 잠복성의 원리는 힘겨운 고백의 속박을 과학의 실행방법과 맞물리게 해준다. 그것은 모습을 숨기므로, 강제로 끌어낼 필요가 있다.
4). ‘해석의 방법에 의해’ (해석의 규칙)
진실은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진실은 말하는 사람에게 현전하나 불완전하고 그 자체로는 맹목적이어서, 진실을 전달받는 사람에게서만 완결될 수 있다. 고백과 관련하여 듣는 사람의 권력은 고백이 행해지기 전에 고백을 요구하거나 고백이 이루어진 후에 결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고백을 가로질러 고백을 판독함으로써 진실한 담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5). ‘고백 효과의 의학화에 의해’ (의학화의 절대적 요청)
고백의 획득과 고백의 효과는 치료 활동의 형태로 코드화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성적인 것에 고유한 병의 성격이 부여된다. 고백이 진단에 필요하고 그 자체로 치료에 효과적인 것으로 의사들에 의해 요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은 적절한 때에 필요한 사람에게 진실의 보유자이면서 동시에 책임자인 사람에 의해 발언될 경우에 치유력을 갖는다.
우리 사회는 ‘아르스 에로티카’의 전통과 결별함으로써,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를 갖추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 사회는 성에 관한 참된 담론을 생산해야 할 책무를 추구했고, 난관이 없지는 않았지만 오랜 고백의 절차를 과학 담론의 규칙에 맞춤으로써 성에 관한 참된 담론의 생산을 계속했다.
담론이 말하는 것의 기본적 특징을 결정하는 것은 담론의 “경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로는 담론의 고유한 기술, 담론의 작동에 필요한 요소, 담론이 이용하는 책략, 담론의 기반이 되고 담론이 전달하는 권력효과이지 결코 어떤 표상체계가 아니다. 성의 역사, 다시 말해서 19세기에 특수한 진실의 영역으로 구실한 것의 역사는 우선 담론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기록되어야 한다.
작업의 전반적 가설을 제시하자. 18세기의 사회는 성에 관해 많은 말을 했고 각자에게 성에 관해 말하라고 강요했으며 규제된 성의 진실을 명백하게 표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성은 차츰차츰 커다란 의혹의 대상, 우리의 의지에 반해서 우리의 행실과 생활에 스며드는 일반적이고 염려스러운 감각, 악의 위협이 우리에게 찾아 드는 취약한 지점, 우리 각자가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는 어둠의 부분이 되었다. 이 성의 “문제”에서는 두 가지 과정이 전개되는데, 그것들은 언제나 서로 긴밀하게 관련된다. 즉, 우리는 성에 대해 진실을 말하라고 요구하고, 우리에게 우리의 진실을 말하라고 성에 대해 요구한다. 우리는 성이 우리에게 자신의 진실에 관해 말하는 것을 해독함으로써 성에 대해 성의 진실을 말하고, 성은 우리의 진실 중에서 감추어진 부분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우리의 진실을 말한다.
주체의 과학을 확립하려는 기획이 점점 더 촘촘한 주기를 따라 성의 문제를 중심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주체 안에서의 인과관계, 주체의 무의식, 지식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다른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주체의 진실, 주체 자신이 무엇을 알지 못하는가에 관해 다른 사람이 소유하는 지식, 이 모든 것이 성에 관한 담론 안에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결코 성 자체의 어떤 고유한 자연적 속성 때문이 아니라, 이 담론에 내재하는 권력의 책략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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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는 ‘아르스 에로티카’와 대립적일 것이다. 그러나 ‘아르스 에로티카’는 그래도 서양문명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 또한 ‘아르스 에로티카’는 성적인 것의 과학을 싹트게 하려는 동향에서 언제나 부재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생활에 관한 우리의 지식과 깊이 연관된 성애의 기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의학에 의해 약속된 건강한 성생활의 이상, 완전하고 꽃핀 성생활에 관한 인본주의적 몽상, 특히 오르가슴의 서정성과 생체에너지의 좋은 느낌에서가 아니라, 성에 관한 진실의 생산과 깊은 관계가 있는 즐거움의 확대와 강화에서 모색해야 할지 모른다.
사회가 경제적 이유로 성에 대해 억압의 권력을 행사한다고 하는 가설은 매우 옹색한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축출이나 배척의 부정적 메커니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담론, 지식, 쾌락, 권력이 미묘하게 얽힌 조직망의 점화이고, 야생의 성을 어떤 어둡고 접근할 수 없는 영역으로 집요하게 내모는 것으로 보이는 움직임이 아니라 반대로 야생의 성을 사물과 육체의 표면에 퍼뜨리고 자극하고 명백하게 나타나게 하고 말하게 하고 현실에 정착시키고 야생의 성에 대해 진실을 말하라고 다그치는 과정이다. 즉, 담론의 다양성, 권력의 집요함, 그리고 쾌락과 지식의 상호작용에 의해 가시적이게 되는 성적인 것의 온전한 반짝임이다.
내가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하고 싶은 애초의 전제는 권력과 지식, 진실과 쾌락의 장치, 억압과는 너무나 다른 이 장치가 반드시 이차적이고 부차적이지는 않다는 점, 그리고 억압이 어쨌든 기본적이지도 승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지식을 생산하고 담론을 증가시키고 즐거움을 유발하고 권력을 낳는 실증적 메커니즘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메커니즘이 출현하고 작동하기 위한 조건을 주의 깊게 추적하고 이 메커니즘과 깊은 관계가 있는 금지나 은폐의 진상이 이 메커니즘과 관련하여 어떻게 배치되는가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우리의 작업은 이러한 지식의 의지에 내재하는 권력의 전략을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생활이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대상으로 지식 의지의 “정치경제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댓글목록
유택님의 댓글
유택
조카 돌보미 하는 날만 아니면
나도 같이 푸코 학회에 가고 싶은데... ㅜㅠ
육아에 바쁜 부모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다는...! ㅎㅎ
저 학술대회 다녀와서 누군가 후기 남겨주면 참 고맙겠다는..
과연 뉘가? 어느 뉘가?ㅎㅎㅎ
올리비아님의 댓글
올리비아유택님 보면 날날이 모범생 같은 느낌 입니닷 . 쿄쿄.. 빠른 포스트 ~ 멋쩌욥 ~
소리님의 댓글
소리
정말 성실한 유택! 이번에도 고마워요~ 든든든든~~~!
나도 힘내야지이이이이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