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차이와 반복> 1027 발제 +2
유택
/ 2017-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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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결론② (p597~633) 발제 : 10월27일 유택
4절
반복, 동일자 부정적인 것
반복을 재현의 대상으로 간주할 때 그 반복을 동일성을 통해 이해하고, 게다가 또한 부정적인 방식으로 설명하는 셈이다. 재현은 본질적으로 어떤 물질적이고 헐벗은 반복을 모델로 하며, 이 모델을 같음의 사태를 통해 이해하고 부정적인 것을 통해 설명한다. 재현 안에서 반복은 성립과 동시에 궤멸되어야 할 운명이다. 차이는 반복의 통합적 일부이자 구성적 일부이다. 차이는 어떤 깊이고, 그 깊이가 없다면 표면에서는 아무것도 반복할 수 없다.
반복은 더 이상 매 순간 계속 이어지는 어떤 외면적인 요소나 부분들의 반복이 아니라 서로 다른 수준이나 정도들에서 공존하는 어떤 총체성들의 반복이다. 차이 자체는 두 반복 사이에 있다. 이때 하나의 반복은 표면적 반복이고, 다른 하나의 반복은 심층적 반복이다. 차이는 두 얼굴을 갖는다. 하나는 하비투스, 다른 하나는 므네모시네이다.
두 가지 반복
두 가지 반복의 특성상의 대립에서 우리는 두 가지 귀결을 끌어내야 한다.
이념은 개념이 아니다. 이념을 통해 차이는 해방되고, 어떤 실증적 체계들 안에서 진화하게 된다. 이 체계들 안에서 차이나는 것들은 서로 관계하는 가운데 탈중심화, 불균등성, 발산 등을 모두 개념적 재현의 틀을 깨는 어떤 긍정의 대상들로 만들고 있다. 그런데 차이가 발산과 탈중심화를 역량으로 하고 있다면, 반복은 천치와 위장을 역량으로 한다. 반복은 차이 못지않게 이념에 속한다. 이는 이념에는 안은 물론 바깥도 없기 때문이다. 차이와 반복은 이념에 의해 하나의 똑같은 문제가 된다.
두 번째 귀결은 두 가지 반복을 대립시키는 것으로는 아직 충분치 않다는데 있다. 차이를 포괄하고 있는 생생하고 옷 입은 반복, 그 수직적 반복은 수평적이자 물질적이고 헐벗은 반복이 유래하는 유일한 원인이어야 했다. 반복이 차이를 포괄한다는 것은, 반복이 물질적이고 무차별한 반복을 결과로 낳는 어떤 실증적 원리를 수용해야 한다는 것과 언제나 하나의 똑 같은 운동 안에서 성립하는 사태이다. 순환 주기들 속에서 자리를 바꾸고 같음의 사태 안에서 자기 자신을 위장하는 이 차이를 통해 반복은 명법적 성격을 띠게 된다.
병리학과 예술, 상동증과 후렴 : 모든 반복들이 공존하는 예술
반복은 파토스이고, 반복의 철학은 병리학이다. 반복은 동시적으로 두 번 일어나지만, 그 둘은 결코 똑같은 반복이 아니다. 즉 반복은 한 번은 넓이의 차원에서 기계적이고 물질적으로 일어나고, 다른 한 번은 깊이 안에서 상징적으로, 허상에 의해 일어난다. 한 번의 반복은 어떤 부분들의 반복이고, 다른 한 번의 반복은 부분들이 의존하고 있는 전체의 반복이다. 이 두 가지 반복은 똑같은 차원에서 성립하지 않지만, 서로 공존한다. 하나는 순간들의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반복이다. 하나는 요소적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총체화하는 반복이다. 되풀이 증세와 심지어 상동증들에서조차 어떤 수축들이 꾸준히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반복은 언어의 역량이다. 언어는 가장 실증적이고 가장 이념적인 자신의 역량에 의존하여 자신의 체계 전체를 어떤 옷 입은 반복으로 조직한다.
세 번째 반복, 존재론적 반복을 향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반복의 구별로는 여전히 미흡하다. 두 번째 반복이 기억과 근거가 지닌 온갖 모호함들을 나누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반복은 차이를 포괄하지만 오로지 수준이나 등급들 사이에서 포괄한다. 두 번째 반복은 먼저 즉자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과거의 원환들의 형태로 나타나고, 그 다음에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면서 만드는 어떤 원환의 형태로 나타나며 마지막으로 대상=x를 중심으로 공존하고 지나가는 모든 현재들이 만드는 어떤 원환의 형태로 나타난다. 세 번째 조합에서 근거는 어떤 무-바탕 속에서 폐기되고, 이념들은 기억의 형식들에서 벗어나며, 반복의 전치와 위장은 차이의 역량들에 해당하는 발산과 탈중심을 맞아들여 교미한다. 순환 주기들의 저편에는 무엇보다 먼저 시간의 텅 빈 형식이 만드는 직선이 있다. 예술은 모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무엇보다 먼저 예술이 반복하기 때문이고, 게다가 어떤 내면적 역량을 통해 모든 반복들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5절
시간의 형식과 세 가지 반복
시간의 순수한 형식이나 직선의 관점에서 보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왜냐하면 시간의 순수한 형식 아래에서, 또 행위의 이미지와의 관계에서 이제 각각의 규정은 이미 그 자체가 반복이기 때문이다. 반복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서 벗어날 수 있고 어쨌든 자기 자신에 외면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어떤 첫 번에 (가설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반복은 절대적으로 어떤 반복들에 의존하고 반복의 어떤 양태나 유형들에 의존한다. 반복되고 있는 것, 그것은 곧 반복 그 자체이다. 모든 것은 반복들을 시간의 형식, 순서, 집합, 계열 등에 따라 분배하는 데 달려 있다.
세 번째 반복의 선별력 : 영원회귀와 니체(허상들)
두 가지 반복은 확실히 어떤 하나의 순환 주기 속으로 들어가고, 그 주기 속에서 유비적인 두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모든 것은 세 번째 시간의 본성에 의존한다. 즉 유비는 어떤 세 번째 시간을 부여해달라고 요구한다. 영원회귀는 오직 세 번째 시간 속에만 있다. 영원회귀의 배제력과 선별력, 영원회귀의 그 원심력은 반복을 의사-순환주기의 세 가지 시간 안으로 분배하는 데 있지만, 또한 바로 그 원심력을 통해 처음의 두 반복은 되돌아오지 않게 되고 결정적인 어떤 한 순간의 것이 되며, 자기 자신 위에서 맴도는 세 번째 반복만이 매 번이나 매 순간을 위해, 영원회귀를 위해 다시 돌아오게 된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
니체는 영원회귀를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차라투스트라>의 텍스트 상태를 검토해보면 우리는 영원회귀가 두 번에 걸쳐 물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하지만 두 번 모두 아직 도달하지 못했고 표현되지 않은 어떤 진리로서 물음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1).난쟁이가 “모든 진리는 휘어져 있고, 시간 그 자체는 어떤 원환이다”라고 말할 때, 왜 차라투스트라는 처음에 화를 내고 이어서 또 그렇게 끔찍한 악몽을 겪게 되는가? 난쟁이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무거움의 정령아, 사태를 너무 단순하게 보지 마라!” 반면 그는 시간이 어떤 직선이어서 상반되는 두 방향으로 뻗어 있기를 원한다. 그는 만일 여기서 기묘하게 탈중심화된 어떤 원환이 형성된다면, 이는 단지 그 직선의 ‘끝에서’일 것이다.
2).왜 차라투스트라는 어떤 새로운 발작을 겪고 다시 회복기로 접어드는가? 그는 동일자가 지닌 외관상의 실증성을 아직 쫓아내지 못했다. 새로운 발작, 그리고 회복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영원회귀가 여전히 다른 사태이고, 같은 것이나 유사한 것을 되돌아오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3).그렇지만 왜 차라투스트라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인가? 부정적으로 반복하는 것들, 동일성을 띠면서 반복하는 것들은 배제될 것이다. 이런 것들은 한 번밖에 반복하지 않는다. 영원회귀는 오로지 세 번째 시간을 위해 있을 뿐이다. 부정적인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동일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같은 것과 유사한 것, 유비적인 것과 대립적인 것을 되돌아오지 않는다. 다시 돌아오는 것은 오직 긍정뿐이고, 다시 말해서 차이나는 것, 유사성에서 벗어나는 것뿐이다. 익명인 ‘아무개’는 영원히 반복하지만, 이 ‘아무개’는 이제 비인격적 개체성과 전-개체적 독특성들의 세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영원회귀는 세계와 카오스의 내적 동일성, 카오스모스Chaosmos이다.
그러나 이 세 번째 시간의 내용은 무엇인가? 시간의 형식 끝에 오는 이 비형식의 내용, 직선의 끝에서 자리를 바꾸고 있는 이 탈중심화된 원환의 내용은 무엇인가? 영원회귀에 의해 변용되고 ‘양태변화’를 겪는 이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가 입증하고자 했던 바와 같이,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허상, 오로지 허상들뿐이다. 허상들은 차이나는 것이 차이 그 자체를 통해 차이나는 것과 관계 맺는 그 체계들이다. 영원회귀 안의 반복은 차이의 고유한 역량으로 나타난다. 영원회귀는 차이를 긍정한다. 영원회귀는 비유사성과 계속되는 불일치를 긍정하고 우연한 것, 다양한 것, 생성 등을 긍정한다. 차이는 오직 자신의 역량 끝에서만, 다시 말해서 영원회귀 안의 반복을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되찾고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영원회귀가 배제하는 것은 바로 재현의 전제들에 해당하는 같은 것과 유사한 것, 유비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다.
같음의 세 가지 의미 : 존재론, 가상, 오류
되돌아오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고 되돌아오는 것은 유사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재현의 세계는 전적으로 전도되고, 이 세계 안에서 ‘동일한’과 ‘유사한’이 지니던 의미는 완전히 뒤집어진다. 오랜 오류의 역사, 그것은 곧 재현의 역사, 모상들의 역사이다. 사실 같은 것, 동일자는 어떤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영원회귀는 자신이 생산하는 것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가운데 목적, 동일성, 유사성, 부정성 등에 대한 다른 모든 사용을 고발한다. 영원회귀는 심지어 부정성까지, 아니 무엇보다 먼저 부정성을 가장 철저한 방식으로 이용하여 허상에 봉사한다, 같은 것과 동일한 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해석의 방식들은 재현의 방식들이다. 유비는 마지막 요소로서 이 재현에 어떤 최종의 손질을 가하고 어떤 특유의 끝맺음을 가져온다. 이 해석의 방식들은, 차이의 본성과 반복의 본성을 동시에 배반하는 방향 잃은 의미의 전개 과정이다. 기나긴 오류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존재의 유비와 재현, 존재의 일의성과 반복
우리는 어떻게 유비가 본질적으로 재현의 세계에 속하는지 살펴보았다. 재현은 본질적으로 존재의 유비를 함축한다. 하지만 반복은 이제까지 실현된 유일한 존재론이고, 다시 말해서 존재의 일의성이다. 일의적인 것이 순수한 긍정의 대상이 되는 수준으로까지 나아가기 위해 스피노자주의는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된다. 그것은 실체로 하여금 양태들 주위를 돌게 만드는 것이고, 다시 말해서 영원회귀 안의 반복에 해당하는 일의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일의성이 의미하는 것은, 일의적인 것은 존재 자체이고 이런 일의적 존재가 다의적인 존재자를 통해 언명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 일의성은 유비와 전적으로 상반된다. 존재는 자신의 모든 형식들을 통해 언명되지만, 하나의 똑 같은 의미에서 언명된다. 존재를 언명하는 것은 차이 자체이다. 개방성은 일의성에 본질적으로 속한다.
천 갈래로 길이 나 있는 모든 다양체에 대해 단 하나의 똑 같은 목소리가 있다. 모든 물방울들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고,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존재의 단일한 아우성이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 먼저 각각의 존재자와 각각의 물방울들은 각각의 길에서 과잉의 상태에 도달했어야 했고, 다시 말해서 자신의 변동하는 정점 위를 맴돌면서 자신을 전치, 위장, 복귀시키는 바로 그 차이에 도달했어야 했다.
댓글목록
namu님의 댓글
namu유택님, 엄청 부지런하시네요. 덕분에 미리 읽고 마지막 세미나를 준비하게 되었네요. 수고하셨습니다.
유택님의 댓글
유택
사실 2번이나 읽어도.. 이해가 안되어서 더 읽어봤자 안될거 같아서 ^^;;
발제 미리 올려버리고, 스트레스 안 받으려고 그랬습니당~ ㅎㅎㅎ
그래서 순수한 내용 발제라기 보다는 자기가 그나마 이해한 문장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