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 - 발제문
요고마고
/ 2017-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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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세미나] 『거대한 전환』 2017년 10월 21일 발제 요고마고
12장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
경제적 자유주의란, 시장이라는 전에 없던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내기 위한 사회의 조직 원리였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기조정 시장을 통해 현세에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교리를 대표하는 사상인 자유방임은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사회적 비전으로 쓰이지 않았다. 최초로 자유방임을 주장했던 중농주의자들도 단순히 농업생산촉진을 위해 이 개념을 사용한 것에 불과했다. 영국에서의 자유방임 또한 생산영역에서 쓰였고, 교환영역에서는 쓰이지 않는 식이었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영국의 면화산업은 자유무역과 거리가 있었다. 또한 자유로운 노동 시장의 창출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어서, 엄청난 모험을 감행해야 하는 일이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일종의 사회운동이 되어갔다. 통화와 무역의 영역에서도 그 교리가 열렬히 신봉되었다. 고전파 정치경제학의 교리들, 즉 자유무역, 경쟁적 노동 시장, 금본위제는 동시에 이루어져야 가능한 것들이므로 경제적 자유주의 도래는 예정된 일이었다.
자유방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개인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이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가능한 한 배제하려는 경제사상 및 정책이다. 언뜻 그럴듯, 자연스러운듯 읽히지만, 자유방임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의 법과 집행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전형적인 공리주의자들에게 경제적 자유주의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실천에 옮겨야 할 하나의 사회적 과제였다. 공리주의적인 자유주의자들은 정부야말로 사회 전체의 행복을 달성할 수 있는 최적의 기관이라고 보았다. 경제의 성공요소 세 가지, 성향 ․ 지식 ․ 권력 중에 개인이 가진 것은 성향뿐이다. 지식과 권력은 정부가 맡아 관리해야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고 벤담은 생각했다. 벤담식 자유주의란 여러 행정 기관들로 의회의 활동을 대체해버리는 것이었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1832년 정부 행정이라는 방법을 선호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하면서 그들은 정부를 장악하게 된다. 이후 행정 기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마치 거대한 기계의 부품들을 하나씩 마련하듯이 구성하게 된다. 행정활동의 증대는 공리주의 정신이 반영된 것이었다. 행정 또한 벤담의 원형감옥처럼 사회의 지배 원리로 작동하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두 가지의 역설
① 자유시장으로 가는 길을 뚫은 것은 지속적인 정부의 개입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그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은 엄청나게 증대되었다. 자유시장체제를 작동시키려 할수록 통제 ․ 규제 ․ 개입은 점점 더 요구되는 모순을 낳았다. 행정가들은 자유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항상 그것을 감시해야 했다.
② 자유방임경제가 의도적인 결과물이었다면, 자유방임 제한 조치들은 자생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앨버트 다이시에 따르면, ‘반자유방임’ 또는 ‘집단주의적’ 경향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공공 여론의 장에서 요구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여론의 칼자루에 휘둘려서 입법 활동이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순수한 실용주의 정신에서 일어난 것이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이와 반대로 말할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반자유방임 입법은 고의적인 것이며 자유방임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시기별 경제적 자유주의
① 1920년대 경제적 자유주의 명망이 절정. 그로 인해 수억 명의 인민들이 인플레이션의 재앙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주의는 개인들의 고통엔 무관심했고, 자유주의를 위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② 1930년대 경제적 자유주의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마저 금본위제를 버리고 관리 통화 체제를 실시하는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③ 1940년대 경제적 자유주의 패배
영국과 미국, 일부 산업과 상업에서 자유주의적 원리 유지함으로써 세계대전을 재촉한 요소가 되었다. 이들 나라에서 경제적 자유주의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환상이 지속되었다.
당시 민주 국가들이 파시즘 국가들의 준동을 제압하려면 적절한 시기에 재무장을 시작해야 했지만, 경제적 자유주의의 잔재라 할 균형 재정과 기업의 자유라는 명분에 눌려 그 시기를 놓쳤다. 전쟁이 벌어질 경우, 절실한 것이 경제적 힘이며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평시에 균형 재정과 기업의 자유를 유지해두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자기합리화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어려움은 자유방임의 원리를 완전하게 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반자유주의 음모란, 제조업자들의 연합과 독점 자본가들, 농업의 이익 집단들과 노동조합 등이 모든 사태의 원흉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집단주의적’ 운동이 나타났던 형태는 다종다기한 것이었으며 어떤 이념의 노선에 맞추어 움직여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나타난 유일의 이유는 시장 메커니즘이 계속 팽창해나감에 따라 중대한 사회 이익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는 사태가 광범위한 영역에서 나타났다는 것뿐이다.
자기조정 시장의 취약점이 보호주의를 불러오다
우선 반자유주의적 행동에 나섰던 사람들이 제기했던 쟁점들 자체가 잡다한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자유주의적 해결 방법에서 집단주의적 해결 방법으로의 전환은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거나, 입법의 숙의 과정에 들어간 이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전환 중이라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했다. 정치적 혹은 이념적 지형이 전혀 다른 다양한 나라들에서 일어난 사태를 보면, 서로 다른 동기를 가진 수많은 정당들과 사회계층들이 각기 다른 나라에서 각기 다른 구호 아래 복잡한 주제들을 놓고서 거의 동일한 조치들을 현실적으로 이루어냈다. 무엇보다도 경제적 자유주의자들 스스로도 계약 자유와 자유방임에 대한 제한 조치들을 옹호한 바 있었다. 그들은 여느 집단주의자와 다를 바 없이 자유계약의 원칙을 남용하(고 있다고 주장)는 노동조합과 대기업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률과 강제조치, 규제와 제한 등을 강력하게 촉구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자유와 자기조정 시장은 모순적일 수밖에 없는데, 이때마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조정 시장에 우선권을 주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자유방임과 동일어가 아닌 것이다.
개입주의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이 말을 자기들 정책의 반대를 일컫기 위해 썼지만, 현실에서 그들은 꽤 즐겨 쓴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자유주의란 산업이 자기조정 시장이라는 제도에 기초를 두도록 만드는 사회의 조직 원리이다. 그러나 시장 체제가 일단 확립되면 그것이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 국가 개입은 필연적인 것이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자신의 일관성이 무너지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시장 체제를 유지하려 들 것이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는 노예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유방임이라는 논리에 호소했고 북부는 자유로운 노동 시장을 확립하기 위해 무력의 개입을 호소했다. 이로부터 개입주의가 자유주의를 공격한다는 것은 공허한 구호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자기조정 시장의 확산과 사회를 보호하려는 움직임, 이 이중적 운동에 대한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해석과 폴라니의 해석을 살펴보았다. 이중적 운동은 독자적인 이익 집단들이 제각기 움직였던 것이며 다른 나라의 여러 이념들에서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시장경제의 확장에 맞서 일어났던 집단주의적 움직임들은 전면적이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이것이 자기조정 시장이 자연적인 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 자기조정 시장은 그 자체가 이미 사회적 재난을 품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증거라고 폴라니는 주장하고 있다.
13장 자유주의 교리의 탄생 : 계급적 이해와 사회변화
두 가지 고정관념에 대하여
1.협애한 계급이론
폴라니는 자유주의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현상을 적대적으로 맞서는 계급들로 설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둘 다 잘못되었다고 지적한다. 무수한 시장들을 만들어내려는 사회적 압력과 그를 둘러싼 여러 세력들의 지형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너무 단순하게도 이윤에 눈 먼 금융가들의 움직임으로 설명하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현실은 어떠한가.
① 전체 사회의 필요라는 것으로부터 각 계급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지, 각 계급의 필요라는 것으로부터 전체 사회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② 사회에 고정불변하는 구조가 있다면, 그 안에서의 사회변화는 계급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 구조 자체가 변화를 심하게 겪을수록 계급 이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③ 어떤 계급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들 바깥의 폭넓은 성원들로부터 지지를 받아내야 한다. 정당성의 확보.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 계급의 이익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여러 이해 집단들이 요구하는 과제들을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는가가 중요하게 된다. 핵심은 사회 전체의 상황인 것이다. 이를 테면 기후변화나 작황의 변화처럼 광범위한 변화가 사회 전체를 덮쳤을 때 각각의 집단들이 영향을 받는 방식은 다를 것이므로 집단 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들의 이익을 조정하기 마련이다.
2.계급적 이익- 사회적 인정이 경제적 이익에 앞선다
개개의 인간들이 행동하는 동기들이 오로지 물질적인 욕구 충족의 논리로 결정되는 일은 극히 예외적으로만 벌어지는 일이다. 어떤 계급의 행태에 더 큰 중요성을 갖는 동기는 사회적인 인정의 문제이다.
1870년대 이후 여러 계급들과 집단들이 이따금씩 보호주의를 지향하는 전반적 운동에 참여했지만, 목표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아니었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로 여겨진 것은, 관련자들의 직업적 위치, 안전과 안정성, 인간의 삶의 형태와 사회 내에서의 존재의 범위, 인간환경의 안정성 등과 같은 것이었다.
(예 : 수입관세의 궁극적 목적)
집단적 이익이라는 것을 너무나 협애하게 정의하고 이해하게 되면 사회정치적 역사를 크게 왜곡하게 된다. 그 이익을 경제적인 것만으로 포착할 경우 사회의 보호라는 절대적인 망토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떤 계급이 전체 역사의 드라마에서 얻게 되는 배역은 그 계급이 사회 전체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 계급이 성공을 거두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다른 계급들의 이익을 얼마나 폭넓게 다양하게 끌어안을 수 있고 또 거기에 봉사할 수 있는가이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의 환영을 받은 학자들의 주장
산업혁명이 노동계급에게는 재난이었다는 것이 전통적인 관점이었는데, 새로운 주장은 그것을 혜택이라는 관점에서 보았다. 즉 공장 체제 도입 이전보다 나아진 생활수준으로 인한 혜택이었다는 것이다.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은 환영했고,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해온 이들은 당황했다. 경제적 차원에서의 개선이 일어난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과연 이것은 사실일까.
사회적 재난이란 문화적 현상이다. 그러므로 인구 통계나 소득 수치로 측량할 수 있는 경제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산업혁명과 같은 경제적 대지진이 흔한 일은 아니다. 그러한 문화적 현상은 다양한 인종의 다른 민족들이 서로 부딪혀서 벌어지는 문화적 접촉 영역으로 오면 이는 흔한 일이 된다. 양쪽 모두 접촉이 벌어지는 순간 약한 쪽에게는 궤멸적인 타격이 가해지며, 그는 질이 현저하게 낮은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원인은 경제적인 착취 때문이 아니다. 그 희생자들이 원래 살고 있었던 문화적 환경이 붕괴되는 데 있다. 경제적으로 겪는 과정은 직접적인 파멸을 가져오지 않는다. 인간적 파멸의 진정한 이유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데 있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는 그 사회의 여러 제도들 속에 묻어 들어가 있는 법인데 바로 그 사회의 제도들이 회생할 수 없는 손상을 입게 되었을 때 함께 무너지는 것이다. 제도들 속에 묻어져 들어가 있던 자신의 자긍심과 도덕적 ․ 정신적 좌표도 함께 붕괴되어버린다.
문화적 진공 상태
식민지 아프리카의 일부 원주민 부족들의 상태는 19세기 초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와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 남아프리카의 카피르족은 본래 그 어떤 사회보다 사회적으로 안정된 조건 아래에 살고 있었지만 이후 더러운 누더기를 걸치고 들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인류학자들은 부족사회와 함께 무너진 그들의 상태를 가리켜 ‘문화적 진공 상태’라고 말했다. 그들이 부족사회에서 대대로 지녀온 기술들은 쇠퇴하고 그들이 존재했던 정치적 ․ 사회적 조건들은 낱낱이 파괴당했다. 한마디로 살아갈 모든 동기 부여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지루함과 권태에 치여 죽을 지경이 되고, 전혀 쓸데없는 것에다가 그들의 생명까지도 소진해버리게 된 것이었다. 본래 가지고 있었던 문화가 심어준 동기 부여나 삶과 행동의 목적 따위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백인들의 문화 속으로 동화될 수도 없었다. 인종적인 편견과 속물근성으로 인해 그 길은 막혀 있었다. 자긍심에 가득 차 있던 흑인들의 모습은 저질의 떼거지로 전락한다.
경제적인 필요와 욕구가 생겨난다면 극복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인류학자들의 연구 조사 결과는 이러한 생각의 말문을 닫아 버린다. “개인들로 하여금 움직이게 만들어주는 노동의 목표란 문화적 차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식량의 부족과 같은 외부적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것의 성격이 문화적 차원에서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상태라면 단순히 그 배고픔에 대한 인간 육체의 반응으로서 노동의 목적이 생겨난다고 할 수는 없다”
“미개인들은 자신들의 집단이 파괴된 후 뿔뿔이 흩어져 졸지에 금광의 광부나 선원으로 전환......열심히 살아갈 모든 동기를 빼앗겨버린 상태로 방치되어......냇가에 그냥 멍하니 드러누워 고통도 모르는 채 그대로 죽어가기도 한다. 이러한 일들은 너무나 괴상하고 낯선 것으로 보일 것이며, 사회의 본성과 정상적인 작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완전히 병리학적인 현상으로 보일 것이다.”
“폭력적인 방식으로 외부에서 도입된 혹은 최소한 외부에서 생겨난 변화의 한가운데로 어떤 집단의 인간들이 휘말려들 때에 바로 이러한 사태가 보통으로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마거릿 미드Margaret Mead) 여기에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사회사가들은 꿈쩍도 않고 있다고 폴라니는 비판하고 있다.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야를 경제주의적 선입견만큼 효과적으로 흐려 놓는 것도 없다. 식민주의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오로지 착취 문제에만 초점이 몰렸기 때문에 이 점은 특히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한다. 착취 문제는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인 문화적 타락이라는 측면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공동체 해체의 파국
원주민들이 삶을 영위해온 기초적 제도들이 급속하고 폭력적으로 무너지게 된 것은 시장경제가 시장경제가 아니었던 그들의 사회를 덮치면서 벌어진 일이다. 노동과 토지가 상품이 되어버리면서 유기적 사회의 문화적 제도들을 낱낱이 해체해버렸다. 이러한 과정은 소득이나 인구 수치의 변화로 측량할 성질의 것은 아닌 것이다. 폴라니의 주장대로 본래 경제는 사회에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었는데, 사회가 경제에 묻어들어 가게 되면서 벌어지게 된(혹은 될) 참상으로 읽힌다.
인도의 예. 영국에서 기계로 만들어져 싼값에 들어온 물건들 때문에 촌락에서 손으로 짠 차다르(여인들이 머리에 둘러쓰는 천)가 가격경쟁에 밀려 계속 헐값에 팔리는 바람에 촌락 공동체가 파괴되어 버린 일이 있었다. 공동체 파괴의 원인이 경제적 경쟁의 힘에 있었지만, 실제 벌어진 사태는 경제적 착취와는 정반대의 것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사례이다. 실제로 많은 인도인이 굶어죽었는데, 그것은 대기근 때문도 아니었고 착취 때문도 아니었다. 공동체가 해체되기 이전에는 기근에 대처하는 방법이 있었다. 마을마다 작은 창고를 두어서 흉년에 대비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장 경제 체제가 생겨나면서 곡식 창고는 쓸려나갔고 시장 규칙에 따라 살 수밖에 없게 된 사람들은 굶어죽는 수밖에 없었다.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이라는 명분하에 자유무역은 인도 사회 조직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저질화시켰으며 굶주림으로 떼죽음을 겪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경제 발전이 아니라 사회적 장치의 복구임을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예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경제학은 이러한 사회적 파국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원천인 자유방임 경제 회복을 주장하고 있다.
보호주의 운동에 대하여
집단주의 운동이라는 것의 원천은 어떤 단일의 집단이나 계급이 아니었다. 물론 그 운동의 결말은 관련된 계급 이익의 성격에 따라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 것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었다.
사회 전체의 이익 가운데에 위험에 처한 지점들이 어디였는가는 시장이 사회에 가한 공격의 주요 진격 방향들에 따라 결정되었다. 경쟁적 노동 시장은 인간에게 타격을 가했다. 국제 자유무역은 농업에 위협이 되었다. 금본위제는 생산 조직들에 재난을 가져왔다.
폴라니는 보호주의 운동을 설명하기에 앞서 인간과 자연, 생산조직의 보호 운동 과정을 따로따로 다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