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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글쓰기는 굴 파기다 (어느 개의 연구, 굴 발제문)
삼월 / 2017-10-25 / 조회 2,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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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개의 연구

 

 여기 자신만의 연구에 몰두한 개가 있다. 이제는 늙어가고 있는 개는 젊은 시절 한 개 무리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 개들은 음악가였는데, 놀랍게도 앞발을 들고 서 있었다. 이는 개의 법을 어기는 일이다. 이들을 만난 후 개에게는 의문이 생겼고, ‘개들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학문을 하기 위해서는 지식, 열의, 여가가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식량이 필요하다. 먼저 개는 식량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그의 고민주제는 ‘땅은 어디서 영양분을 얻는가’로 옮겨간다.

 연구를 지속하려는 개는 자신이 다른 개들과 분리되고 있음을 느낀다. 개들은 그의 연구를 흡족하게 여기지 않지만, 음식을 제공하려는 호의를 보인다. 개는 노동과 생산에 관여하지 않으면서 다른 개들의 희생으로 영양분을 얻는 공중견의 존재를 알게 된다. 개는 영양분이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세우게 된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먹을 것이 저절로 입 안으로 굴러들어 온다는 그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개는 단식을 시작한다.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단식을 하면서 먹을 것을 기다린다.

 그러다 죽어가게 된다. 발작을 하면서 땅에 오줌을 적시고 피를 토하면서, 그의 몸 전체가 막 영양분으로 변하려는 참이었다. 자신의 가설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무엇인가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잠시 기절했다 깨어났을 때 그의 앞에는 막 사냥을 시작하려는 아름다운 개 한 마리가 서 있다. 이제 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냥을 시작하려던 개가 들려주었던 음악을 연구했다. 개는 이제 자신의 무능력이 앞다리를 쳐드는 일을 하지 못한데서 왔음을 알게 되었다. 법은 자유를 파괴한다. 그러나 그 자유 역시 일종의 소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굴을 팠는데 잘 된 것 같다’ 카프카는 글쓰기를 굴 파기에 비유한다. 그는 밤마다 굴을 파내려가 몸을 웅크려 누울 공간을 만들고, 먹을 것을 저장한다. 굴을 파는 이유는 추적자를 피하는 데 있지만, 무엇보다 굴 파기 자체가 즐겁기 때문이다. 광장과 성벽이 있는 굴속에서 그는 평화스러운 단잠을 자고, 욕망을 채우며, 자기 소유의 집을 가진다는 목표를 달성한다. 그렇게 굴속에서 잠들었다가 갑자기 깨어 작업들을 수정하느라 정신이 없다. 굴 파기는 육체노동이라기보다 정신노동이다. 그러나 몸 역시 고달프다. 그래서 이따금 굴을 저주하면서 집으로 되돌아가 다시는 굴로 돌아가지 않으려 마음먹기도 한다. 물론 그런 마음은 오래 가지 않는다. 며칠 후에는 함부로 내팽개쳐 두었던 굴이 성한 것이 기뻐 오히려 콧노래를 부르며 새롭게 일을 시작한다.

 그는 굴이 진짜 집이 아니라, 집짓기 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작업을 계속하는 동안 그에게는 예리한 비판감각이 생기고, 공격자들에 맞서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혼자만의 공간이었던 굴은 이제 침입자들로부터 지켜내야 할 투쟁의 공간이 된다. 어디까지나 그는 자신을 위하여 굴을 팠을 뿐, 방문자를 위해 판 것은 아니다. 굴 안에서 그는 아무도 신뢰할 수 없다. 믿을 수 있는 것은 굴과 자신뿐이다. 그는 굴이 나쁜 품성의 표시라 말한다. (p.693) 굴은 불안한 의식, 불확실한 자기 평가, 깨끗지 못한 욕망들에 평화를 불어넣어 주어 더욱 나쁘게 만든다. 굴은 구명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그의 성곽에는 자신의 피가 바닥에 새어들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굴은 새로운 힘을 주는 세계이며, 피로도 잊게 만든다. 피로는 소란과 열성으로 변해 미로를 헤치고 나갈 힘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굴은 복잡해지고 통로는 많아진다. 끊임없이 사각거리는 소리(종이에 글씨를 써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오고, 다른 짐승들의 굴 파기 소리도 듣는다. 굴은 그가 어릴 적 바랐던 멋진 체류지, 평화가 보장되는 공간이 아니다. 때로 그는 별 수 없이 굴을 파고, 굴 파기에 처박히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굴 파기는 거창한 탐사 작업이 아니었다. 그는 갑자기 자신의 예전 계획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될 때가 있다. (p. 709)

 굴로 누군가 다가옴을 느낄 때 그는 두려워한다. ‘바로 이 크고 민감한 작품의 소유주이기에 비교적 진지한 모든 공격에 대하여 무방비하다 함이 오히려 납득이 잘 간다. 굴을 소유하고 있다는 행복감이 나를 버릇 나쁘게 만들었고, 굴의 민감함이 나를 민감하게 만들었으며, 굴의 상처가 나 자신의 상처인 것처럼 나는 아프다. 바로 이 점을 예상했어야 했다. 내 자신의 방어만이 아니라 굴의 방어도 생각했어야 했다.’ (p. 713) 그는 굴의 파괴를 계획한다. 굴의 파괴는 공격자까지 함께 파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더 늙었으면 하고 바란다. 사각사각 소리는 더욱 커졌고, 다른 동물의 움직임은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 소통이 새로운 종류의 허기를 불러와 상대를 향하여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는 방식임을 그는 예상하고 있다. 물론 소통에 대한 꿈 역시도 굴 파기, 흙더미를 헤집을 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는 이따금씩 작업을 중지하고 귀를 기울인다. 자신의 소리를 들은 다른 동물도 그러할 것이라 예상하면서. 모든 것은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은 채였다. 그러나 예리한 통찰력이나 지독한 무력감, 그보다 강력한 어떤 것도 글쓰기를 중단시키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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