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세미나] 화재경보 발제 171~221
우현
/ 2017-09-26
/ 조회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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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제15번
혁명계급(프롤레타리아트뿐만 아니라 과거 모든 억압받은 자들)은 행동을 통해 역사적 연속성을 폭파하려는 의식을 가짐
대혁명은 새로운 달력을 도입. 벤야민은 historischer Zeitraffer를 프랑스어 번역에서 ‘일종의 역사적 축도’라고 번역. 새로운 첫날은 이전의 모든 시간을 통합한다. / 아마 이날에 과거의 모든 반란의 순간들이, 억압받은 자들의 모든 풍부한 전통이 ‘수집’되기 때문일 것.
벤야민에게 달력은 공허한 시간의 반대를 대표. 공휴일은 “첫날들이면서 추억의 날들이다” 여기서 ‘첫’은 해방적이며 구원적인 단절을 가리킴.
벤야민에게 역사적 시간들은 시계들의 시간과 동류시될 수는 없음 / 혁명의 역사적 시간이 시계추의 기계적 시간과 대결하는 것. 혁명은 질적이고 메시아적인 시간의 난입에 힘입어 공허한 시간을 중지하려는 시도.
테제16번
역사적 유물론자는 과거의 이미지와 함께 유일무이한 경험을 한다.
“불현 듯” 어떤 특정한 과거의 단편이 특정한 현재와 함께 형성하는 비판적 성좌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
랑케와 폰 지벨의 타협주의적이고 유사-객관적인 접근이 과거의 이미지를 무력화하는 반면, 역사적 유물론의 방식은 역사의 귀중한 순간 속에 들어 있는 은밀한 폭발적 에너지를 되찾음.
테제17번
역사적 시간을 축적으로 보는 역사주의의 양적 개념에 맞서, 벤야민은 역사적 시간에 대한 질적이고 불연속적인 개념을 소묘.
벤야민에게 회억의 과제는 현재와 과거를 다시 연결하는 성좌의 구축. 이 성좌, 공허한 역사적 연속성에서 뽑아낸 이 순간은 모나드, 즉 모든 역사의 집결. 역사적 유물론자가 그 앞에서 정지해야 하는 과거의 특권적 순간은 메시아적 정지를 구성하는 순간.
메시아적 정지는 역사의 단절이지 역사의 종언이 아님.
역사주의의 보편사는 거짓된, 그저 인위적인 축적일 뿐.
테제17a번
벤야민에게 세속화는 정당한 동시에 필수적. 메시아적인 것의 전복적 에너지가 남아 있는 한 비판해야 하는 것은 세속화 자체가 아니라 메시아적 이념을 하나의 이상, 하나의 ‘무한한 과제’로 만든 사회민주주의적 신칸트주의.
벤야민의 사회민주주의 비난 지점은 관망주의. 사회민주주의는 ..“혁명적 상황”의 불가피한(물론 결코 오지 않을) 도래를 기다리는 것.
벤야민이 제안하는 대안은 동시에 그리고 분리 불가능하게 역사적이면서 정치적. 그 대안은 매 역사적 순간이 혁명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가설에서 출발.
(모든 혁명적 실천과 마찬가지로 파괴적인 차원을 포함하는) 이런 정치적 행동은 역사에 대한 메시아적 중단인 동시에 “과거 속으로 뛰어드는 도약”
계급 없는 사회는 결정적인 정치적-역사적 지표로서, 억압받는 자들의 전투에서 목표 구실을 하는 동시에 과거와 현재의 억압체계를 심판하는 기준 구실.
테제18번
- Jetztzeit는 ‘현재시간’ 또는 ‘지금’은 이번에는 메시아적 시간의, “영원한 등불”의 , 진정한 보편사의 “모델” 또는 전조로 정의
Jetztzeit는 과거의 모든 메시아적 순간들을 요약. 억압받은 자들의 모든 전통은 구원하는 힘으로서 현재의 순간 속에서 즉 역사가의 순간 내지 혁명가의 순간 속에서 집결.
테제A
현재 상황과 과거 사건 간의 성좌는 후자를 역사적 사실로 만든다.
“메시아적 시간의 파편들”이란 봉기의 순간, 그러니까 역사적 연속성에 하루살이 같은 중단을 일으킴으로써 과거의 순간을 구제하는 짧은 순간, 현재 한가운데서 만들어내는 틈.
“파편들”은 역사 속에 메시아의 시대가 임박하거나 잠재적으로 현존하고 있음을 가리킴
메시아적 파편들이 성좌를 이루는 질적 시간은 공허한 붕괴에 역사주의와 ‘진보주의’의 순전히 양적인 시간에 철저히 대립.
테제B
벤야민은 점술가들에게 정보를 구하는 자들을 거부. 외냐하면 그런 자들은 미래에 의해 예속되기 때문
반대로 유대 전통은 과거에 대한 회억을 요청. 이와 유사하게 현재 행동하는 혁명가는 자신의 영감과 싸울 수 있는 힘을 회억 속에서 길어 올린다.
역사적 회억과 전복적 실천 .. 변증법적 이미지. 속에서 결합.
벤야민의 목표는 혁명을 ‘공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리 결정되지 않은 과정으로서의 역사 개념을 위해서 변론하는 것.
3장 역사의 열림
- 1940년 ‘역사철학 테제’는 역사의 열림을 위한 일종의 철학 선언.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맑스주의 전통 지형 위에 명시적으로 위치.
벤야민이 칼 맑스의 유산과 맺는 관계는 대단히 선별적. 맑스주의에 대한 실증주의적/진화론적 독해(저항할 수 없는 진보, ‘역사의 법칙’, ‘자연적 숙명’)에 참조점 노릇을 한 맑스와 엥겔스 저작의 모든 계기들을 포기하는 길을 택함.
맑스주의를 재가공하고 비판적으로 재정식화. 역사적 유물론의 더미에 메시아적, 낭만주의적, 블랑키적, 무정부주의적, 푸리에주의적 “파편들”이 통합. 혹은 그 결과는 위의 모든 재료들을 융해해 당대의 모든 이형들과 근본적으로 구분되는 새롭고 이단적인 맑스주의 제조.
벤야민 사후 77년이 지난 때에 이 역사의 열림이란 무슨 의미일까?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열린 역사란 한편으로 파국들의(불가피성이 아닌)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자, 다른 한편 대대적인 해방 운동들을 고려하는 것을 의미
벤야민은 특히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을 참조. 그렇지만 억압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 일반과 희생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인식해야 한다는 그의 호소는 그의 기획에 더욱더 보편적인 사정을 부여.
사회주의를 산업노동자계급(그 역시 남성, 백인, ‘국민’, 정규직을 누리는 소수 분파로 환원)에 관련된 경제적 목표로 자주 환원해버린 역사적 좌파 내의 지배경향에 역행해, 벤야민의 성찰은 일반적 해방에 적합한 혁명 기획을 사유할 수 있게 해준다.
벤야민의 역사적 유물론 해석에서 열려 있는 것은 미래와 현재만이 아니다. 과거도 열려있음
과거의 열림은 다음의 것을 뜻함 / 그렇게 명명된 ‘역사의 심판들’에는 결정적이거나 불변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과거가 됐든 미래가 됐든, 벤야민에게 역사의 열림은 억압과 희생자들을 위한, 그리고 그 억압에 맞서 싸운 자들을 위한 윤리적, 사회적, 정치적 선택과 떼려야 뗄 수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