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엽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발제문(510-545) +2
김우리
/ 2017-09-26
/ 조회 2,212
첨부파일
- 그라마톨로지 발제문 510-545.hwp 다운 63
관련링크
본문
메모장에 아무리 복사해서 다시 올려도 글이 이상하게 올라가네요.
말로 하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아서^^;
알파벳과 절대적 재현(répresentation)
1> 언어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에서 ‘재현에 대한 비판’인 루소의 사유가 지닌 성격
데리다는 루소의 모든 사유가 어떤 의미에서는 언어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에서 공통적으로 ‘재현’(기의 또는 음성 언어를 재현하는 문자 언어/주권을 양도받은 대리자)에 대한 비판이며, 이 비판은 잃어버린 현전을 되찾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재현의 운동이 마침내 현전의 재전유로 귀결되어야만(devrait) 한다는 <조건법>은 루소의 모든 담론을 감시하는 목적론적이고 종말론적인 예기(anticipation)의 법이자 시제인데, 이에 따라 루소의 담론 안에서 최악은 언제나 동시에 최상으로, 잃어버린 현전의 시간 속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것은 언제나 동시에 되찾은 현전의 시간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것으로 기술된다.
루소의 담론에서 ‘법’은 ‘자연’을 대리보충하고, ‘문자’는 ‘음성 언어’를 대리보충한다. 두 경우 모두에서 대리보충은 ‘재현’을 의미한다. 이 대리보충적 재현의 운동은 기원으로부터 멀어지면서 기원에 접근한다. 언어적 영역에서 알파벳은 재현의 힘(puissance)을 가중시키면서 기원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두 번째 상태의 문자보다 더 순수하게 표음표기적이어서 목소리 앞에서 소멸하고 목소리를 존재하도록 하는 데 보다 더 적합하다. 즉 알파벳은 현전을 조금 더 상실함으로써, 그것을 조금 더 낫게 복원한다. 정치적 영역에서, 총체적인 양도(aliénation)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현전의 총체적 재전유를 의미한다. 남김없이(sans réserve)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양도는 “잃어버린 것[=현전]의 등가치를 얻게 해주고, 소유하고 있는 것을 보존하기 위한 더 많은 힘을 얻게 해준다.” 남김없는 양도는 남김없는 재현(=완벽한 재현)으로,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현전을 절대적으로 떼어내고, 자신에게 현전을 절대적으로 재-현전화한다(re-présenter). 이처럼 루소는 재현을 현전의 상실로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 재현으로부터 현전의 재전유를 기다리면서, 즉 재현을 우연이나 (현전을 재전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하면서, 현전화(présentation)와 재현전화(répresentation)의 명백한 구분, 즉 이와 같은 분열의 효과(effet) 속에, 기의와 기표 사이의 차이의 명증성과 그 효과 속에 자리 잡는다. 그러나 이는 양자의 차이와 그 구분 이전에 차이의 효과 자체를 생산하는 운동ㅡ차연의 기묘한 문자표기(graphique)ㅡ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2> 정치적 영역에서 대리보충: 일반 의지와 법률
도시 국가와 언어, 예술 안에서 합법성을 부여하는 심급은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피표상체(le représenté, 재현된 것, 기의, 주권)’이다. 한편 타락성은 표상체(le représentant, 재현하는 것, 기표, 대리자)를 신성화하는 데 있다. 정치적 영역에서 자유는 대리자의 힘(puissance)이 정지되고 피대리자에게 되돌아가는 순간에만 충만하다: “대리자들을 갖게 되는 순간, 국민은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주권 속에서, 현전의 즐거움(jouissance)의 양도할 수 없는 직접성 속에서, 근원이 자기 안에 간직되고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그 지점에 도달해야만 한다. 루소는 이 근원을 ‘의지’라고 규정한다. 그런데 이 일반 의지는 양도된 권력, 개별적 의지, 선호(préférence), 불평등이 될 위험이 있다. 이 위험은 ‘차연’의 순간에, 즉 주권적 의지가 위임되고, 그 결과 법이 법령들(décrets)로, 즉 문자들로 씌어질 때 개입한다. 문자는 불평등의 기원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방황할 수 없는(errer, 틀릴 수 없는) 일반의지가 “개별적 의지들의 유혹들” 속으로 인도될 수 있는 판단에 자리를 내주는 순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입법적인 주권’은 ‘법을 입안하는(rédiger) 권력’과는 분리되어야 하고, 일반 의지가 위임되지 않고 목소리에 의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국민의 조직체’의 목소리 안에서 일반 의지가 선언될 때, 일반 의지는 “법을 만든다(faire loi).”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개별적 의지들로, 사법관의 법적 행위들로, 법령들로 분할된다.
그러나 자연 상태를 중단시키는 재앙은 (현전에) 접근하는 멀어짐의 운동을 열어준다. 재현은 그 자체로 현전으로부터 멀어지는 재앙이지만, 완벽한 재현은 완벽하게 현전을 재-현전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재현은 현전을 복원하고, 절대적 재현으로서 지워진다. 루소가 대리자들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대리자가 주권의 현전을 박탈하는(déposséder) 악을 더욱 더 가중시키는 만큼, 피대리자의 현전을 복원시킨다는 이와 같은 ‘재현의 논리’에 따른 것이다<24번 주석>. 이미지의 궁극목적(telos)은 그것의 고유한 비지각성이다. 완벽한 이미지가 사물 이외의 다른 것이 되는 것을 멈출 때, 그것은 사물의 시원적 현전을 존중하고 복원한다. 이것은 끝없는 순환이다: 재현의 ㅡ재현된ㅡ근원, 이미지의 기원은 차례로 자신을 재현하는 것을 재현하고, 이미지의 대체물들을 대신하고, 이미지의 대리보충물들을 대리보충한다. 자기 자신을 재현하는 주권적 현전은 “대리보충의 대리보충”에 불과하다. 데리다는 루소가 일반 의지를 “모든 법률들의 근원이자 대리보충으로” 정의하고, “이 법률들이 없는 경우 언제나 일반의지에 문의해야 한다[=법률들의 대리보충으로서 일반의지]”라고 쓴 것을 이와 같은 끝없는 순환을 나타내주는 문장으로 인용한다. 대리보충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결핍을 메울 때(즉 완벽하게 재현할 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자연의 결핍과 대리보충의 지연 사이의 그 구덩이(creux), 자연의 운동을 대리보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진보가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던 시기에 한정된다.
3> 언어적 영역에서 대리보충: 그림문자와 표음문자
문자의 첫 번째 상태인 직접적인 그림문자(pictographie) 또는 상형문자(hiéroglyphique)는 사물 또는 기의를 재현한다. 문자의 두 번째 상태인 상형-표음문자(idéo-phogramme)는 이미 기표와 기의가 혼합된 것을 재현한다. 상형-표음문자가 여전히 개념적 기의와 직접적인 관계를 지닌 기표들을 사용한다면, 문자의 세 번째 상태인 표음 문자는 무의미한 기표들을 이용한다. 즉 표음 문자는 기초적인 음성적 기표들만을 의미할 뿐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일정한 규칙에 따른 조립에 의해서만 의미를 지니는 기표를 이용한다. 그림을 대리보충하고, 무의미까지 밀어붙여진 분석이 알파벳과 문명사회에 고유한 합리성이다. 그것은 재현하는 것(기표)의 절대적 익명성이고, 고유한 것의 절대적 상실이다. [알파벳과 화폐의 유사성 생략]
그런데 이와 같은 문자가 지니는 가치는 애매하다(ambigu). 문자의 가장 오래된 단계에서는 일종의 자연적인 보편성이 있었다: 그림은 알파벳처럼 어떤 개별적 언어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림은 모든 감각적 존재를 복제(reproduire)할 수 있기 때문에 일종의 보편문자이다. 언어들에 대한 그림의 자유(독립성)는 그것이 복제하는 대상과 연결시키는 모방적 인접성에서 기인한다. 그림은 그것이 재현하는 감각적 개별자들처럼 완벽하게 경험적이고, 다양하고, 변화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달리 표음 문자의 관념적 보편성은 ‘소리’와, ‘음성언어에 의해 기호화된 의미’에 대한 표음 문자의 무한한 거리에서 기인한다. 그림문자와 표음문자라는 양 극 사이에서 보편성은 상실된다. 순수한 그림문자와 순수한 표음문자는 이성의 두 관념, 순수한 현전에 대한 두 관념이다: 전자의 경우, 재현된 사물이 그것의 완벽한 모방에 현전하며, 후자의 경우, 음성언어 자체가 자기 자신에게 현전한다.
보다 합리적이고, 보다 정확하고, 보다 분명하고, 보다 명증한 목소리의 문자는 목소리의 현전 앞에서 다른 문자보다 쉽게 지워진다는 점에서
댓글목록
namu님의 댓글
namu쌩큐! 너무 고맙고 친절한 발제!
김우리님의 댓글
김우리나무 선생님, 감사합니다. 11월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