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세미나 > 세미나자료
  • 세미나자료
  • 세미나발제문, 세미나후기를 공유하는 게시판입니다.
세미나자료

[카프카] 0927 발제 -카프카 단편
희음 / 2017-09-26 / 조회 1,962 

첨부파일

본문

 카프카 단편 발제_20170927_희음

 

마을 선생

 

단편의 한쪽에는 ‘거대한 두더지’를 발견하고 그 두더지에 대한 발견의 순간에 대해 기술하였으며, 그런 자신의 작업 혹은 업적을 절대적인 것으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을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또 다른 쪽에는 그 작업에 대한 가치를 논한 문건을 어느 잡지사에 기고한 상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정작 마을 선생은 그 문건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며, 상인 역시도 그 문건 안에 쓰인 내용과는 다르게 그 ‘발견의 의미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으며, 그것에 주의를 한 이유는 단지 그것을 무가치화할 목적에서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두 사람 모두에게 무관심해 했다. 심지어는 상인의 문건을 선생의 문건과 혼동하기도 했다.

 

이것은 기표와 기의가 어긋나고 있는 것, 의도와 효과가 어긋나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나는 당신을 돕고 싶었어요. 하지만 실패했지요. 그것은 내가 행했던 가장 큰 실패작이었습니다.”(502)

그러나 상인의 욕망은, 진정한 의도는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그는 직접 그것을 무가치화할 목적에서뿐이었다고 말하지 않았나. 무가치화하는 것이 마을 선생을 돕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욕망은 그를 돕는 것과는 전혀 딴판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일까.

“모든 발견은 학문 전체에로 이끌려지게 되며, 그것으로 분명히 발견이기를 중지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발견은 당신에게서 벗어나 있을지 모르며, 그렇게 되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어떤 권능으로서도 방어할 수 없을 것입니다. ~ 사람들은 그 발견이 이루어진 장소 어디엔가에 작은 박물관을 세우게 할 것이고, 그것은 마을의 구경거리가 될 것입니다. 당신은 열쇠 보관자가 될 것이고, 그리고 외적인 영예 표시가 결여되지 않도록 학술 연구소의 봉사자들이 늘 달고 다니듯이, 가슴에 달고 다닐 수 있는 작은 메달을 수여받을지도 모릅니다.”(501)

이것은 문명과 명예와 가치화에 대한 상인의 한숨 같은 게 아닐까. 상인의 문건은 그 한숨의 생을 이미 살아버린 자의 노력 같은 게 아닐까.

 

 

나이 든 독신주의자, 블룸펠트


블룸펠트는 늙은 하녀의 서툰 집안일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동반자 혹은 위로를 주는 존재가 되어 줄 만한 ‘개’를 키우는 일에 대해 늘 상상하지만 익히 예상되는 여러 불편함 때문에 그 일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뜬금없이 그의 방 안에 셀룰로이드 공 두 개가 나타나 쉼 없이 튀어 오르고 그의 등 뒤에 머무르면서 그를 따라다닌다. 소리를 내고 불면하게 하는 등 그를 괴롭히는 걸 하루 내내 지속하는데, 그는 그 공을 떨쳐내고 그 공이 튀어 오르면서 내는 소음을 약화시키려고 애쓰는 데 그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다 하룻밤이 다 지나가고 그는 꾀를 내어 두 개의 공을 옷장 속에 가두는 데 성공하고는 여느 때보다 이르게 출근길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하녀의 못생긴 아들에게 자신의 열쇠를 건네며 그 공을 가지라고 한다. 그는 그의 일터인 내복 제조 공장으로 가는 동안 그 모든 일을 잊는다. 공장에는 비좁아 앉을 수도 없는 공간에서 서서 일하는 견습생 둘이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서로 귓속말을 하거나 꾸벅꾸벅 조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견습생들을 내치지 않는다. 견습생들이 그를 끊임없이 짜증나게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 그의 옆에 머문다. 두 명의 견습생, 두 개의 공. 너무도 닮아 있는 이 두 개의 쌍은 집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각각 블룸벨트를 괴롭히는 존재들 아닐까. 스스로는 유희하면서, 스스로는 어떤 의도도 갖지 않지만 누군가를 끊임없이 신경 쓰이게 하는 의뭉스러운 ‘카프카의 조수들’ 같은 존재. 그들은 어쩌면 작품 속 화자가 스스로 창안해낸 존재들이기도 할 것이다. 유희를 보여주면서, 유희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더한 강박 속으로 몰아넣는 존재들.

 

  

다리


한 편의 시와도 같은 단편. 몰락에의 열망. 몸을 돌렸을 때, 가차 없이 무너져 내리고 산산조각 나는 다리. 그 다리는 어떤 낯선 ‘그’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예기치 않은 어떤 사건. ‘한 번 설치되어 있는 다리는 부서지지 않고는 다리임을 그만둘 수 없’는 그 다리가 산산조각 나는 사건은, 자신을 그만두고자 하는 다리의 열망에 의해 응집된 한 순간의 ‘몰락’의 의한 것일 테다.

“나는 무너져 내렸고, 기어코 산산조각이 났다. 돌돌 구르는 시냈물 속에서 언제나 그렇게도 평화스럽게 나를 바라보던 자갈돌들이 날카롭게 나를 찔렀다.”

 

  

사냥꾼 그라쿠스


육지의 사냥꾼이 죽어 물위에서 떠돈다. 아니, 제대로 죽지 못해 죽음의 나룻배 위에 실려 이리저리로 떠다니게 된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 불행이다.

“나는 즐겁게 살았었고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죽었습니다. 내가 이 갑판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늘 자랑스럽게 차고 다니던 사냥총, 배낭, 상자 따위 넝마들을 훌훌 내던져버리고, 처녀가 혼례복을 입듯이 나는 살그머니 수의 속으로 행복하게 들어갔습니다. 여기에 나는 누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겁니다.”(543)

그 일에 그는 단호히 그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고, 또한 리바 시에 머물겠느냐는 시장의 제안에도 그는 그럴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영역 바깥이라고 말한다.

“나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 이상은 모릅니다. 그 이상은 할 수가 없어요. 내 거룻배는 키가 없습니다. 죽음의 가장 깊은 지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가고 있습니다.”(544)

온전히 죽지도 그렇다고 살아서 자신이 의지하는 바대로 키를 움직여 나아가지도 못하는 자의 깊은 멜랑콜리. 이것은 단지 반쯤만 죽은 사냥꾼 그라쿠스만의 이야기인가. 

 

댓글목록

세미나자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