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0925 <엄마됨을 후회함> 세미나 발제문
소리
/ 2017-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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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엄마됨을 후회함> “6장. 누구의 엄마도 아닌” 2017.09.25
발제자 : 소리
지나간 일은 잊으라
사회는 끊임없이 여성들로 하여금 과거의 후회는 잊으라고 말합니다. 6장 첫 시작에 나온 맥베스 부인의 말처럼 “구제할 가망이 없는 것은 잊어야 한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다.”라는 문장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도나스는 ‘엄마들의 후회’가 가지는 사회적 측면에 집중합니다. 엄마들의 후회는 단순히 엄마들에 일어난 일들과 결과를 연결하는 자기해석에서만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후회의 목리는 사회로 하여금 이들의 과거를 볼 수 있게 하고, 현재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의 시작은 엄마들의 후회의 목소리에서부터이며, 이 목소리는 목표는 엄마들의 본질적인 소망인 ‘누구의 엄마도 아닌’ 사람을 목표로 합니다.
엄마도 인간이다
우리는 종종 이 명확한 목표를 단순히 주변상황이 받쳐준다면, 즉 사회와 주변인들의 복지와 도움으로 엄마됨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분명 세금특혜나, 지불 가능한 주거공간 공공 유아원 등의 혜택들을 통해, 그리고 육아 분담에 대해 주변인들의 호희적인 태도와 적극적 참여 등의 대책들은 엄마로서의 버거운 삶이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어, 사회로부터 (아이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 이외에는) 끊임없이 주변화되는 것이 달라진다면, 엄마에 대한 신화적 미화가 없어지고 엄마들도 인간으로 대우할 수 있다면 많은 것이 변할 것입니다. 또한 이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 주체와 엄마로서의 주체라는 ‘슈퍼맘’의 이중고를 겪지 않는다면 더 많은 여성이 엄마됨을 후회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이가 인생의 큰 기쁨을 줄지라도 돈이 없다면 엄마의 삶은 더욱 고역이 되고, 주변인의 원조 없는 육아는 외로운 투쟁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위에 열거된 엄마들을 도울 수 있는 다양한 복지 정책과 의견들도 진정으로 엄마들을, 여성들을 해방시키지는 못합니다. 결국 여성은 천성적으로 엄마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귀결되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엄마가 되기 위한 장애물이 많으니 그 장애물들을 치워준다면 여성은 진정한 엄마로 거듭날 수 있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이 생각은 완벽한 엄마라는 허상과 엄마에 대한 미덕과 미화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생각의 좋은 버전일뿐입니다. 결국 여성은 엄마의 삶에 익숙해지거나, 아니거나 하는 문제는 외적인 요인에 따라 변화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정상적인 엄마 Vs 맘충
사회의 원조와 공동육아, 그리고 임신 출산 이후에도 경제적 지위를 보장해주는 제도들은 여성이 엄마가 되기에 더 수월한 조건을 만들어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 나오는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 인종, 계급, 교육수준, 남편의 육아참여 정도, 생활수준 등등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들 모두 엄마가 되는 것에 대하여 통념과는 다른 생각을 제시합니다. 이들은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합니다. 모성애, 엄마로서의 삶 이 모든 것들에서 이들은 억압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엄마들은 생활조건으로 공통적으로 꼽은 세 가지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엄마로서의 삶과 직업 사이의 줄다리기,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생활, 배우자나 주변사람들에 의한 체계적 지원의 결여가 그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도나스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생활조건이 엄마됨의 후회에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하는 요인들이지만, 이것들이 변화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여성들이 엄마됨을 후회하거나 엄마로서의 삶을 커다란 짐으로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생존투쟁의 원인은 엄마로서의 삶보다는 빈곤, 인종주의, 동성애혐오, 여성혐오주의와 같은 부적절한 조건들이 더 컸습니다.
문제는 엄마로서의 억압감인데 이것의 기저에는 ‘엄마로서의 정상적인 삶’에 대한 정상적 조건이 존재하는 것같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적 완벽에 대한 환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정상적’인 엄마에 대한 허상의 조건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합니다. 한국에 있는 맘충(mom+蟲)의 논란과도 같은 것입니다. 엄마에 대한 기대에서부터 출발한 ‘정상적 엄마’와 대비되는 것이 한국의 ‘맘충’입니다.
‘정상’이란 것은 한 사회에서 인정되는 특정 태도를 가르킵니다. 사회의 인정을 바라는 사람들은 모두 그러한 태도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바람직하고 올바른 것의 기준이 ‘정상, ‘평균’이 된 현재는, 인간이 도달해야하는 이상으로서 정상과 평균의 위상이 자리하게되는 역설에 처합니다. 즉 모두의 이상은 평균입니다. 인간은 이상적 표준이 되어야 하고, 이상적 평균의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19세기에 일어난 이러한 변화로 인해, 엄마들 또한 ‘정상적인 엄마’, ‘일반적인 엄마’, ‘평균적인 엄마’가 되기 위하여 도달할 수 없는 이 평균이라는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지는 게임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서 도달 가능한 이상으로의 이동은 빈번한 고통과 절망을 야기합니다. 완벽을 향한 달리기에서는 1초도 쉴 수 없습니다. 이 레이스 위에서는 불만이나 불행을 가진 여성은 쉽게 맘충, 비정상의, 이상한 엄마가 됩니다.
“여성들이 아무리 이상적 조건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고 그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한들 아이를 가진다는 건 불완전한 세상에 거는 도박이다. 그것은 새로운 인격체의 창조로서, 그 인격체가 어떤 성격과 부차적 욕구를 가질지는 아무도 모른다.(p.251)”
엄마 or 경력자 or N개의 정체성
사회는 여성을 엄마 혹은 경력자로서의 선택지 밖에 여성에게 주지 않는다. 이 제한된 선택지는 여성정체성의 다양성을 여성스스로도 인지할 수 없게 만들며, 두 가지 외의 다른 욕망을 가진 여성들의 현실을 가려버린다. 또한 ‘진정한 성공’을 거둔 사람만이 만족스러운 생활을 한다고 자부할 수 있으며, 육아에만 전념하는 엄마를 ‘자신을 포기한’ 사람으로 취급해버린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라는 이중 억압 체계는 여성들은 물론 타인에게 엄마의 삶이나 경력 외에도 인생의 의미를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는 성숙한 인간으로서의 여지가 없게 만든다.
엄마라는 역할로서의 삶과 관계로서의 삶에 대해 고심해야합니다. 엄마들은 언제나 아이를 돌보는 객체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아이가 있는 여성이나 없는 여성이 모두 통합될 수 있고,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성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후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들은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후회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리고 내는 것이 주체로서의 여성이 존재할 수 있는 첫 걸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