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 거대한 전환 :: 8장 & 9장 발제문 (0930.토)
이슬
/ 2017-10-10
/ 조회 3,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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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스피넘랜드 법 이전의 것들, 스피넘랜드 법의 결과들
- 영국의 노동 조직화는 중상주의 체제 아래에서 구빈법과 직인법에 의존하고 있었다. 1536년에서 1601년 까지 적용되었던 ‘구빈법’이 영국 노동관련 법규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고 나머지 절반은 1563년에 나온 직인법이었다. 직인법은 법적으로 모든 이들이 일을 하도록 강제된다는 것, 7년간의 견습을 통한 도제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 국가 공무원들이 매년 임금 수준을 새로이 사정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 법은 숙련 기술자들과 농업 노동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으며 도시와 농촌에 모두 적용되었다. 약 80년간 엄격하게 시행되던 직인법은 시간이 지나면서 매년 생계비 수준에 맞춰 임금을 새로이 산정한다는 조항 또는 크롬웰 정권의 왕정복고 이후에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보류 상태가 되어버렸다.
- 직인법은 그래서 구빈법으로 보충되었다. ‘빈민’이라는 용어는 생활이 곤궁한 사람들을 모두 포함하며, 또 누구든 생계 방편을 찾아 거처 없이 전전하는 상황이 되면 모두 포함되었다. 1601년의 구빈법은 몸이 성한 빈민이 스스로의 생계를 벌도록 일자리를 찾아야 하며, 그 일자리를 교구 차원에서 공급해주어야 한다고 정해주었다.
- 이 직인법과 구빈법이 합쳐져 노동법이라 할 만한 체계를 만들어주었다. 모든 교구들은 몸 성한 이들이 일할 수 있도록 하고, 구빈소를 운영하며, 고아나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직업 교육을 시키고, 노인과 병약자들을 보호하는 등의 일을 스스로 재원을 조달하여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빈민들을 위한 재원 조달이나 행정이 지역과 마을의 편차가 컸기 때문에 ‘더 좋은’ 교구로 마구 밀려드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통과된 것이 정주 및 퇴거명령법이었다.
- 그러다 산업혁명이 한창 시작되던 1795년이 되자 산업 쪽 요구의 압력으로 1662년의 정주법이 부분적으로 폐지되어 노동자들은 인신의 이동성을 다시 회복했다. 전국 규모에서의 노동 시장이 확립될 길이 열리면서 ‘생존의 권리’가 보장되는 스피넘랜드 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정주법이 폐지된 이유가 산업혁명으로 인해 임금만 많이 주면 일자리를 찾아 움직일 노동자들을 전국 차원으로 불러 모으기 위함이었는데, 다른 한편으로 스피넘랜드 법이 제정되어서 밥 굶을 걱정은 없어졌으니 누구도 임금을 찾아 고향을 떠날 필요가 없다는 원칙을 선포했다는 점에서 모순점이 명백했다.
- 당시 극빈자 문제가 악화되고 빈민 구호 지방세가 점차 오르게 된 것은 비가시적 실업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해외무역은 등락이 너무나 심했는데 낙폭이 생길 때마다 실업이 고용량의 증가보다 훨씬 큰 규모로 발생하였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없었고, 도시와 농촌 양쪽에서 일자리들은 심한 불안정상태에 놓여 있게 되어 급격한 실업증가가 이루어진 것이다. 영국에 가해진 사회적 손상도 많은 부분 무역이 최초로 농촌에 끼친 직접적 혼란의 여러 결과로부터 생긴 것이다.
- 1790년대 대불전쟁 기간에 종획운동이 일어나면서 농촌 빈민들의 생활수준은 압박받게 되었는데 조지 캐닝은 이때 구빈법이 영국을 혁명의 위험에서 구해주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당시 농촌은 지주들과 교구 성직자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정주법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시와 농촌의 임금격차는 그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노동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정주법의 폐지에 대한 전반적인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까딱하면 농촌 공동체는 실업자들로 우글거리게 될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농촌의 환경을 지켜내고 전통적으로 내려온 농촌의 위계질서를 강화하며, 농촌 노동자들의 도시 유출을 막고 농업 경영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농촌 임금을 올리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이 바로 스피넘랜드 법이었다.
- 스피넘랜드법은 구빈법 행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노동 능력이 있는 실업자를 노인·병약자·아이들과 제대로 구별하지도 못하여 극악할 정도의 퇴보였다. 또한 스피넘랜드 법은 시골 지주들과 교구 성직자들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켜주었고, 막상 거기에 필요한 빈민 구호 지방세의 뒷감당은 농촌의 중간 계급 몫으로 떨어졌다. 빈민 구호 지방세 납부자 중 많은 경우는 그 자신이 빈민이었다. 스피넘랜드 법은 사실상 고용주들에게 공공 재산을 이용하여 보조금을 주는 역할을 했으며 수당 체계는 임금을 생계 수준 아래로 누르는 역할을 하였다. 이 체제는 장기적으로 노동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다시 표준 임금표를 낮추게 했다. 문제는 이제 그가 존재하는 물리적 조건이라는 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인간적 삶의 모습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가난해도 품위 있는 삶을 유지하려던 중간계급은 새로운 계급, 즉 ‘독립적 노동자들’을 위한 사회가 필요했다.
- 영국 노동자들은 그 후 수 세대에 걸쳐 공적 구호에 대한 혐오, 국가 활동에 대한 불신, 사회적 자긍심 등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스피넘랜드 법을 철폐한 것은 영국 중간 계급의 작품이었다. 이제 수십 조의 법령이 철폐되고 새로운 법령들이 제정되었다. 구빈법 철폐는 대단히 급격한 속도로 이루어졌고 이는 사회에 무자비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임금 부조는 중지되었고 노역소는 치욕의 집이 되었다.
- 스피넘랜드 법이 철폐되던 시기 노동자들은 육체적으로 인간 이하가 되고 말았고 소유 계급은 도덕 차원에서 저질이 되고 말았다. 학자들은 정치경제학이 인간 세계를 지배하는 법칙을 밝혀내는 새로운 과학이 발견되었다고 합창했다. 이러한 법칙에 따라 동정심은 내동댕이쳐졌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동료 인간들에 대한 연대는 부정되었다. 시장 매커니즘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인간의 노동을 상품으로 만들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9장. 구호 대상 극빈자 문제와 유토피아
- 구호 대상 극빈자 문제는 진보 문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한 나라의 부는 인구와 비례하며 그 나라의 빈곤은 그 나라의 부와 비례한다. 애덤 스미스조차 가장 부유한 나라라고 해서 임금도 가장 높은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 당시 영국 사정을 보았을 때 상업이 곧 정체 상태로 들어갈 것이라는 예견이 받아들여졌다. 1782년 당시 경기 침체로 인해 수출액이 거의 반세기 이전의 수준으로 줄어들고 무역은 아직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 때 영국의 발전이 눈부셨지만 그것은 운 좋게 전쟁이 터져준 결과일 뿐이었다.
- 영국에 빈민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16세기 전반으로, 이들이 눈에 띄게 된 것은 장원이나 ‘어떤 봉건적 상급자에게도’ 귀속되지 않은 개인들이라는 새로운 현상으로서였다. 이들이 자유노동자들이라는 단일 계급으로 형성된 것은 부랑 행위를 잔혹하게 처벌하고 동시에 대외무역이 지속적으로 팽창하여 국내 산업이 성장한 것이 합쳐진 결과였다. 17세기 끝 무렵 빈민들이란 그저 빈민 구호 지방세에 대한 부담에 불과한 존재였다. 당시 영국은 반봉건이 아닌 반상업 사회였기에 이들은 빈곤이 큰 문제가 아니라는 봉건시대의 사고방식도, 실업자란 단지 몸이 성한 주제에 일은 하지 않고 빈둥대는 게으름뱅이라는 성공한 종획운동가식의 사고방식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퀘이커 교도들은 빈민들의 문제를 풀기 위해 집단적인 자력 구제의 원칙을 적용했다. 로슨은 오늘날의 공공 고용 기관에 해당하는 ‘직업 알선소’를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명예혁명 이후인 1696년에는 빈민들이 어차피 원하지 않는 여가 시간을 유용한 용도로 쓸 수 있게 하자는 존 밸런스의 ‘근면 협회’ 설립 제안이 탄생했다. 이는 노동을 교환한다는 점에서 직업 알선소와는 다르다. 그들을 하나의 협회 또는 법인으로 조직하여 자신들의 노력과 노동을 하나로 합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는 기초 생활 물자는 배급으로 처리되고 또 여기에 성과에 따른 보상 원칙을 결합한 것인데, 처음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이윤을 내지 못하고 말았다. 하지만 1696년에 제출된 존 로크의 노동 할당제는 농촌 빈민들을 지방의 빈민 구호 지방세 납세자들에게 일꾼으로 배당하여 납세자들이 할당받는 일꾼의 수만큼 납부액을 지정하도록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는 나중에 길버트 법 체제 아래에서 시행되며 악명을 얻게 된 머슴 체제의 기원이다.
- 밸런스의 제안 100년 후 제러미 벤담은 그가 계획했던 ‘원형 감옥’을 새로 고안한 기결수 운영 공장에 그것을 적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곧 이어 기결수들을 대신하여 빈민들을 데려다 쓰자는 쪽으로 바뀌게 된다. 그가 제안한 ‘근면의 집’은 12개로 나뉘어진 5층짜리 ‘원형 감옥’식 건물로 부조를 받는 빈민들의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곳이었다. 이는 온갖 범주의 실업자들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는데 ‘쓸모를 잃은 숙련공’과 ‘일시적 경기침체’로 구분하였다.
- 오언은 벨러스로부터 노동 화폐의 생각을 취하여 1832년 그의 ‘ 전국 공평 노동 교환소’에 적용했지만 실패했다. 오언은 그 다음 2년간 전개한 노동조합운동은 노동계급의 경제적 자급자족의 원리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이것은 차후 100년간 ‘단일 대규모 노동조합’을 외치며 터져 나온 온갖 폭력적인 운동의 맹아가 되었다.
- 스피넘랜드 법이 만들어지던 시점에서는 구호 대상 극빈자 문제의 진정한 성격이 아직 사람들의 마음속에 명확히 이해되지 않고 있었다. 빈민들이 없다면 누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거나 전쟁에 나가는 위험한 일을 하려들까, 구호 대상 극빈자들을 공공 사업의 이윤을 위해 고용하면 사적 이윤을 위해 고용하는 것만큼 채산성이 나오지 않는가. 당시까지도 시장 체제에 내재한 취약점들이 여전히 은폐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 구호 대상 극빈자의 성격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퀘이커 교도 밸런스, 무신론자 오언, 공리주의자 벤담 등 너무나 다른 사상을 가진 이들이 제시한 계획이 놀랄 만큼 똑같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환상은 실업자들을 조직하여 잉여를 생산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고, 이는 막 생겨나던 시장경제라는 체제 안에서 구호 대상 극빈자 문제가 갖는 성격을 모두들 얼마나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