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후기 - 감성적인 것의 비대칭적 종합(1) +4
토라진
/ 2017-10-12
/ 조회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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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를 살라먹고, 이제야 후기를 올립니다.
오독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해한 수준에서 '내멋대로' 썼습니다.
텍스트의 막바지에 와서 매력에 빠진 듯한 불길한 예감이.......
여러분들과 함께한 덕분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후기 시작합니다.!!!!
“세계는 신이 계산을 하는 동안 이루어진다.”
신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어떤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 계산이 정확히 이루어진다면 나머지가 없는 명확한 정수의 세계, 예측 가능하고 분명한 세계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계산은 늘 정확하기 않고, 세계는 신이 계산을 마치기 전에 이루어진다. 그러니 언제나 동등하고 균일한 세계를 꿈꾸었을 신은 이렇게 한탄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생은 망했어!’ 재수, 삼수를 거듭해도 ‘잔여’와 같은, 가분수나 무리수로만 사유되는 이 세계를 명확하게 인식할 방법이란 없을 테니 말이다.
들뢰즈는 이렇듯 계산되지 않는, 무한히 이분화 되고 무한에 이르기까지 공명하는 이런 차이의 상태를 불균등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의 특성을 파악하는 것은 감각할 수 없지만 감각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으로서의, ‘감성적’인 것이라 칭한다. 이 감성적인 것은 비균등성과 함께 비동등성, 즉 차이의 문제와 언제나 함께 한다.
이 차이는 강도라 말할 수 있으며 이러한 강도-차이는 세계를 이루는 조건으로 도처에 있다. 즉 ‘도처에 있는 수문(水門)’인 것이다. 문을 열면 물이 덮쳐와 강도를 높이고 다른 차이를 만들어내지만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가 세미나 중간 중간에 들뢰즈를 읽으며 어떤 위로를 받는 동시에 어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마도 이런 ‘수문’들을 감각하며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수문 바깥에 있는 물과는 반대로 불로 모든 것을 소멸시켜 균일화하려는 신의 지속적인 노력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양식’과 ‘공통감’으로 그 효과가 드러난다. (공통감은 잡다의 질적 종합이며 양식은 차이의 양적 종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할 가능한 것의 가장 깊은 심층에서는 여전히 비동등한 것이 우렁차게 포효하고 있다는 점을 들뢰즈는 강조한다. 신이 외연 안에서 분할 가능한 것을 동등화시키려 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라도 말이다. 포효하는 불균등성의 들끓음. 그것만이 신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신을 무력하게 하는 힘이다.
“에메랄드의 결정면들 안쪽에는 빛나는 눈을 가진 물의 요정이 숨어 있다...... 모든 현상은 빛나는 눈을 가진 물의 요정과 같은 유형이고,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에메랄드이다.”
불균등을 드러내는 물의 요정은 차이의 간격 안에서 빛을 발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연장 안에서, 그리고 이 연장을 채우는 질 안에서 소멸된다. 에머랄드는 그저 에머랄드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처럼 보이는 물의 요정들은 자신 안으로 함축하는 안-주름운동을 끊임없이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서 안-주름 운동은 깊이를 낳는다.
“깊이는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그 유명한 지질학적 선(線)과 같다. 이 선은 사물들의 심장부로부터 비스듬히 나와서 화산들을 할당하고, 결국 ”자신의 분화구에서 터져 나오는” 어떤 끓어오르는 감성을 다시 통합한다.” 이 문장은 다시 셀링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깊이는 바깥으로부터 길이와 넓이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다. 깊이는 다만 그 길이와 넓이를 창조하는 분쟁의 숭고한 원리로 깊이 은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분쟁의 숭고한 원리 또는 끓어오르는 감성 등을 우리는 어디서 느낄 수 있을까? 매일 매일이 똑같아 보이는 균질화된 일상 속에서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꿈틀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혼자 있을 때는 결코 각인되지 않을 것이다. 타자와 만나는 순간, 그리고 그 만남의 감각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감각을 비트는 순간에 감지될 것이다. 그 순간에 강도가 감지되며 이 강도가 다시 감각을 낳고 기억을 일깨우며 사유를 강요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복은 우리에게 어떤 힘을 가져다주는 것일까?
“강도는 심지어 가장 낮은 것까지 긍정하고, 가장 낮은 것을 어떤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 여기까지 나아기 위해서는 폭포의 역량이나 깊은 전락의 역량이 필요하다.”
카프카의 단편들을 보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광경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나온다. 그리고 소설 속 화자는 그 높은 곳에서 ‘순식간에 넓어진 시야’와 ‘희망과 불안과 기쁨’을 갖는다. 화자는 사실 관망과 방관을 하고 어떤 실천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자신의 내면 안으로 깊이 파고든다.
들뢰즈에 의하면 깊이는 존재의 강도이고, 거꾸로 강도는 존재의 깊이이다. 우리가 카프카의 작품을 통해서 그의 강도를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런 존재의 깊이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내면 안으로 깊이 파고들고 높은 곳에 높이 오를수록 자신의 내부와 외연의 거리는 커진다. 그것은 폭포처럼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전락의 가능성을 가지게 된다. 카프카의 인물이 높은 곳에서 불안과 두려움과 동시에 희망과 기쁨의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듯 보인다.
물론 카프카는 들뢰즈가 말하고 있는 타자와의 접속과 종합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들뢰즈는 깊이와 거리들이 근본적으로 감각의 강도와 연계되어 있다면서 깊이의 지각을 가져오는 것은 강도가 지닌 점진적 감소의 역량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여기서 점진적 감소의 역량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를 들면 높은 곳에 한동안 있으면 높이를 잊게 되고, 속도를 높여 달리는 차 안에서는 속도감을 느낄 수 없는 것과 같은 감각이지 않을까? 이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멸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것은 그대로 죽은 것이 아니다. 내부에 들끓는 감성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 그것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게 한다. 그리고 그 전락의 역량은 낮은 곳의 것들 또는 타자를 긍정하며 접속할 수 있게 한다. 불안하고 불균등한 상태, 떨어질 때 느끼는 어지러운 몸의 감각을 견딜 때에만 우리는 서로를 만날 수 있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감성적인 것의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될 수 없지만 동시에 오로지 감각밖에 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위의 말은 역설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러한 역설이야말로 양식과 공통감과 대립하면서 인식능력들이 화산같이 폭발하는 선(線) 위에 놓여서 한 능력의 불똥에서 또 다른 능력의 불길을 내뿜게 되고, 한 능력의 한계에서 또 다른 능력의 한계로 이어지는 도약이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역설이야말로 한 방향으로 동등화 되거나 소멸되지 않는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카프카의 문장을 소환해본다.(카프카가 주되게 언급되는 이유는 내가 지금 그와 연애중이기 때문이다. 다른 나의 연인들은 과거에 잠들어 있거나 너무 먼 미래에서 헤매는 중이다.ㅋㅋ)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이 술주정뱅이에게서 배운다면 틀림없이 굉장히 유익할 텐데!” 이 문장은 <어느 투쟁의 기록>과 <술 취한 자와의 대화>에서 똑같이 언급된다.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의 능력이 술 취한 사람의 능력으로 이어지는 도약은 카프카 작품에서는 미세한 감각을 극대화해 세밀하게 묘사하거나 불균등하고 이질적인 상황과 인물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 분열적이며 초월적인 세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들뢰즈 표현에 의하면 이런 의미일 것이다. “강도는 그 정도나 등급이 아무리 낮은 경우라도 분열을 가져오는 특성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복원하게 된다. 그 의미는 지각의 예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 실행의 관점에서 드러나는 감성의 고유한 한계에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또 하나의 역설이 존재한다. 강도는 감각 불가능한 것, 감각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감각을 비틀고 폭포 아래로 뛰어 내리는 전락을 감수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감성적인 것의 비대칭적 종합’이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감성적인 것의 역설적 힘을 통해 비대칭적이며 불균등한 세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 접속하고 통합을 이루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 가능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생각이 멈춘 자리에서 술 취한 자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덧붙이며) “거미의 공중그네”
세미나가 끝나고 세미나원들과 거닌 산책길에서 거미집을 봤다. 나뭇가지와 나뭇가지로 이어진 거미줄에 걸려 있는 벌레들을 보며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잡혔다. 정말 거미줄에 벌레들이 잡히는구나. 이렇게 먹이감이 칭칭 감겨서 죽어가는건가?”
거미줄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누군가가 말했다.
“거미줄 치고 있는 거미잖아.”
그랬다. 거미줄에 걸려 있는 것은 거미의 먹잇감이 아니라 거미였다. 창백한 장밋빛이 가슴과 다리를 잇는 부분에 문신처럼 박혀 있었으며 몸은 까맣고 가는 털로 뒤덮여 있었다. 죽은 듯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를 자세히 들여다보자 서늘하게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독기를 품은 거미의 당당한 기세와 더불어 정교하고 복잡하게 지어진 거미줄을 보고 느낀 경탄 때문이었다. 거미줄은 크고 복잡했다. 나뭇가지의 거리를 가늠할 수 있게끔 선명하게 이어져 공-간을 점유하고 있어 어떤 ‘강도’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그 거미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들뢰즈와 카프카를 오가는 상념 안에 드디어 거미가 거미줄을 치기 시작했다.
공중에 거미줄을 치는 거미를 우리는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공중에 중력을 거스르며 거미줄을 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을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새가 나는 것도 엄청난 에너지의 집중이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과 호박벌(bumble bee)은 공기역학적으로 날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날개가 몸집에 비해 매우 작아서) 다른 벌처럼 날아다닌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이들 뿐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렇게 어떤 힘인가에 저항하면서 또한 싸워가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이 때로는 포획된 벌레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는 죽은 것처럼 여겨지게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거미가 도도하게 독기를 품으며 살아 있는 것처럼, 우리는 살아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다시 산책로를 걸으며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게 되었다. 한여름에 과일 껍질을 버린 쓰레기통에서 나타나는 날파리들과 금붕어를 키우는 어항에서 발견되는 작은 소라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하는 궁금증들이었다. 아무리 봉인하고 막아도 먹이를 찾아 날아오는 날파리들, 세균이 묻을까 박박 씻은 어항에서도 자연스레 생기는 소라들은 과연 어떤 존재들일까? 자연발생설의 제기와 그것의 반론들이 오갔고, 결국은 알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알 수 없는 세계. 신도 감히 조율할 수 없었던 이 세계의 불균등성에서 우리는 어쩌면 가능성을 볼 수 있는 건 아닐까? 그것은 보이지 않지만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안-주름들과 깊이의 강도 속에서, 떨어질 것을 각오하며 전락의 두려움을 기대와 전망으로 바꾸는 힘들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끊임없는 움직임. 그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유희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거미줄에 매달린 거미가 그네를 타는 것처럼 보이는 거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네의 움직임은 거미의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경계의 흔들림이며 타자와 접속하는 통로일 것이다. 하지만 그 끊임없는 움직임, 즉 각자의 높이와 깊이를 만들어내는 부단한 노력과 분투는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거미가 거미줄을 짓고 새가 하늘을 나는 일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넓게 봐야지, 크게 보고......” 영화의 대사처럼, 넓고 크게 보기 위해서 우리는 망루에 올라야 할 것이다. 그것은 위험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즐길 수도 있다. 어떤 망루에 오를 것인지, 그리고 그 높이는 얼마만 한 것인지 그것은 어쩌면 세계와 내가 만나는 주사위 놀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여전히 알 수 없음. 그것이 들뢰즈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이자 텍스트의 핵심인지도 모르겠다.(텍스트 자체가 잘 알 수 없음 – 결국 들뢰즈는 자신의 텍스트로 세계의 본질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ㅋㅋㅋ) ................................................................................................................................................................................,..끝.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배움은 기호들에 대한 응답이고, 우리는 한 사람이 어떻게 배워가는지,
어떻게 철학자가 되는지 알 수 없다." 라는 문장이 떠오르는 후기입니다.
후련하고 뿌듯하시죠?^^
사월이 때문은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사월이가 열 일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펼쳐주시다니. . . ㅎㅎ
담주는 꼭 오셔요. 이제 결론, 막바지입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길고 긴 명절연휴가 이제 막 시작되려던 그날의 세미나 후기가 이제 당도했군요. ㅎㅎ
수문이 부숴지기라도 한 듯 폭풍처럼 쏟아져내리는 후기, 잘 읽었습니다.
저는 그 날의 세미나를 무척 재미있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반장님의 고통을 뒤로 하고요.
신을 혼란에 빠트리게 하는, 포효하는 불균등성의 들끓음 때문이었을까요?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이 술주정뱅이에게서 배운다면 틀림없이 굉장히 유익할 텐데!”라는 문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저는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술주정뱅이라는 주장을 했더랬습니다.
그는 술에 취해있었고, 글 안에서는 생각은커녕 이상한 말만 해댔거든요.
결국 그는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고, 술주정뱅이도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둘 다일수도 있고요.
분열된 세계처럼 분열된 인간인 그는, 주로 술주정뱅이로 살아가지만 가끔은 곰곰이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유택님의 댓글
유택
뭘 좀 알아야 저도 정성스럽게 댓글을 달 수 있을텐데 많이 부끄럽네요 ^^;;
토라진님의 소중한 후기, 이 야밤에 읽고 또 읽으며 복습합니다.
차이와 반복 차이와 반복..
자꾸 본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제목만이 제 머리속에서 붕붕 떠다니는 이 밤..
옴마야 내일 오전10시까지 세미나 갈 생각하니 ㅠㅠ 까마득해요.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
연두님의 댓글
연두
이제야 읽었네요. 으앙. 역시 들뢰즈는 매력 있어.
지난 번 세미나 참석을 못하며 본문도 못 읽었는데, ㅡㅡ;;;
토라진님 후기가 많은 도움이 되요...
도처에 있는 수문, 포효하는 불균등의 들끓음, 폭포 아래로 뛰어내리는 전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