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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차이의 이념적 종합 :: 문제설정 _후기 +4
오라클 / 2017-09-20 / 조회 3,002 

본문

4장 차이의 이념적 종합 :: 문제설정 

<3장 사유의 이미지>가 ‘개념적 사유’에 관한 것으로, 개념적 사유의 독단적 이미지를 비판하고 있다면, 

<4장 차이의 이념적 종합>은 ‘이념적 사유’에 관한 것으로, 이념적 사유의 잠재적 역량을 보여준다. 

 

[1] 플라톤의 이데아와 들뢰즈의 이념

 

이념idea은 플라톤의 개념으로서 이데아이다. 플라톤은 이데아idea와 이데아의 모사물copies로 나누고, 다시 모사물copies은 모상eikon(닮음)과 허상phantasma(환영)로 나눈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데아idea​(근거) ······ 모상eikon​(본뜬 상) ······ 허상phantasma​(헛된 상)의 방식으로 존재의 위계를 설정한다. 여기서의 phantasma(허상)가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시뮬라크르다. 인식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위계의 구조에도 포섭되지 않는 것들, 그것들이 바로 환영이고 시뮬라크르다.

 

들뢰즈의 이념은 플라톤의 이데아를 전복시키는 개념이다. 들뢰즈는 위계의 하위에 속하는 시뮬라크르를 위계의 상위의 속하는 이데아의 위치로 끌고 가지 않는다. 오히려 들뢰즈는 이데아를 시뮬라크르의 자리로 끌어내리고 있다. 4장에서의 이념은 이데아의 실재성을 담지하고 있는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다. “이념의 대상은 허구도, 가설도, 사변적 존재자도 아니다. 그것은 주어질 수도, 인식될 수도 없는 대상, 그러나 직접적으로 규정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재현되어야 하는 어떤 대상이다.” 

 

이념들은 ‘해답 없는 문제들’이다. 즉 이념의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물음들을 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물음들에 명확한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데, 문제의 해결가능성을 외생적 기준을 끌고 와서 그것을 해답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틀로서의 이념들은 문제에 대한 내부적인 조건들 -즉 미분적 관계들-을 탐색해나가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념은 무엇인가?”라는 이념이 갖는 본질에 물음은 결코 좋은 물음이 아니다. “이념은 결코 본질이 아니다”  그래서 본질의 물음, 일자, 상반성, 모순 등의 물음이 아니라, 오히려 우연, 사건, 다양체, 곧 차이에 대한 물음들을 생산하는 조건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무엇인가?”가 아니라 “얼마만큼?, 어떻게?, 누가?”라는 질문이 갖는 계열들의 생산.   

 

[2] 개념적 사유와 이념적 사유 (동일성의 개념 vs 차이의 이념 / 분석적 개념 vs 이념적 종합)

 

① 개념적 사유가 재현적이라면, 이념적 사유는 반복적이다. 

개념이 대상을 재현한다면, 이념은 허상을 반복한다. 재현이 개념적 차이라면, 반복은 개념없는 차이다. "차이와 반복이라는 두 기초개념의 마주침은 결코 처음부터 설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두 노선, 곧 반복의 본질로 이어지는 노선과 차이의 이념으로 이어지는 노선이 교차하고 간섭하는 모습들을 들여다 볼 때에나 비로소 나타나는 마주침일 것이다."

 

② 개념적 사유는 동일성으로 수렴하지만, 이념적 사유는 차이를 증식시킨다. 

개념이 분석적 사유라면, 이념은 종합적 사유이다. 그래서 개념적 분석은 동일성으로 수렴되지만, 이념적 종합은 차이를 생성시킨다. ​개념이 현실적 동일성을 표시한다면, 이념은 잠재적 차이를 표시한다. 두가지 반복 - ‘헐벗은 반복’과 ‘가면쓴 반복’이 있다. 헐벗은 반복이 개념의 동일성과 부정적 조건에 의한 반복이라면, 가면쓴 반복은 이념 안의 차이와 과잉에 의한 반복이다. 헐벗은 반복은 개념이나 재현의 동일성 안에 있지만, 가면쓴 반복은 이념의 타자성 안에 있다. 헐벗은 반복이 개념의 결핍에서 성립하는 부정적 반복이라면, 가면쓴 반복은 이념의 과잉에서 성립하는 긍정적 반복이다.

 

③ 개념적 사유가 경험적이라면, 이념적 사유는 초험적이다. 

초험적이란, ‘단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말하는 언어, 유기적 신체들보다 앞서 표현되는 몸짓들, 얼굴들보다 앞선 가면들, 등장인물들보다 앞선 유령과 환영들’을 말한다. 즉 이념은 ‘비존재들의 운동, 감각되진 않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그것들의 운동들’이다.  

 

 ​ 개념적 사유가 지성의 능력이라면, 이념적 사유는 이성의 능력이다. 

경험을 개념화하는 것이 지성이라면초험적인 것을 이념화하는 것은 이성이다.​ 지성을 인식능력으로 사용할 때 개념들은 해답찾기의 수단이 되는 반면, 이성을 문제제기적으로 사용할 때 이념들은 참된 문제들을 구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성의 개념이 인식론의 영역을 구성한다면, 이성의 이념은 존재론의 영역을 구성한다. "이성은 지성들을 전체 안에서 통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념들의 능력에 해당한다. 문제로서의 문제가 이념의 실재적 대상이다. 지성의 개념들은 문제제기하는 이념들에 관련되는 한에서만 실험적 사용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 

 개념적 사유가 명제적이라면, 이념적 사유는 문제제기적이다. 

개념이 해답을 찾는 사유라면, 이념은 문제를 제기하는 사유이다. 따라서 개념적 명제는 하나의 해답을 찾아가는 닫힌 구조이지만, 이념적 문제는 끊임없이 문제를 생성하는 열린 구조이다. 개념적 명제는 진리의 정확성을 추구하지만, 이념적 문제는 진리를 넘어서는 진정성을 추구한다. "이념들은 ‘해답없는 문제들’이다. 이는 참된 문제들이야말로 이념들이고, 이런 이념들 ‘자체’는 해결된다고 해서 제거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결국 개념이 분석적 사유라면, 이념은 종합적 사유이다. 

 

⑥ 앎이 개념적 사유라면, 배움은 이념적 사유이다. 

사유의 초월론적 조건들은 ‘앎’이 아니라 ‘배움’을 기초로 조성되어야 한다. 앎은 경험적 형태에 불과하고 경험 속으로 거듭 떨어져 나오는 단순한 결과에 지나지 않지만, 배움은 어떤 초월론적 구조이다. (배움의 첫 번째 측면) 배움은 문제(이념)의 객체성과 마주하여 일어나는 주관적 활동들에 부합하는 이름인 반면, 앎은 개념의 일반성을 지칭하거나 해(解)들의 규칙을 소유하고 있는 평온한 상태를 지칭한다. (배움의 두 번째 측면) 배우는 자는 각각의 인식능력을 초월적 실행으로 끌어올린다. 배움의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개인 전체를 관통하는 과격한 훈련, 도야나 정신적 성숙을 위한 교육인 파이데이아가 있을 뿐이다.

 

⑦ 개념적 사유가 의식의 재현이라면, 이념적 사유는 무의식의 현시이다. 

문제제기적 심급을 표현하는 이념과 배움은 의식의 재현이 아니라, 무의식의 현시이다. 이 현시는 무의식 전체가 실리는 배움의 실재적 운동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는 공통감이나 경험적인 것을 기초로 하는 인식능력 사용의 관점에서는 이해불가능한 것이다. 이념은 모든 인식능력들을 주파하고 규정된 인식능력의 초험적 사용을 가능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개념들을 기초로 하는 공통감이 아니라, 이념들을 요소로 하고 있는 역설감이다. 

 

⑧ 개념적 사유가 가능성에 해당한다면, 이념적 사유는 잠재적 역량이다. 

진정한 대립은 이념(구조-사건-의미)과 재현 사이에 있다. 재현 안에서 개념은 가능성에 해당하지만, 이념의 잠재성은 어떠한 가능성과도 무관하다. 재현이 사유하는 주체에 의한 대상의 재인에서 비롯되는 ‘앎의 요소’인 것과 다르게, 이념은 무한한 ‘배움의 요소’이다. 그 이유는 배움이 진화하는 과정이 전적으로 본연의 문제들에 대한 총괄적 이해, 특이성들의 포착과 응축, 신체와 이상적 사건들의 합성을 거쳐가기 때문이다. 

 

[3] 산술적 사유와 미분적 사유 (산술적 개념 vs 미분적 이념)

 

① 미분적 사유, 혹은 미분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미분법은 수학적 도구일 뿐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미분법은 변증법적 문제나 이념, 한 문제의 과학적 표현, 해의 장의 수립 등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전체를 보편적으로 지칭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학 뿐 아니라 이미 산출된 각각의 장에는 변증법적 이념들의 이러저러한 수준이나 국면이 구현되어 있고, 그 각각의 장은 자기자신의 고유한 미분법을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영역에서도 미분법을 응용할 수 있다. 이 때, 변증법은 자신의 문제들에 대해 직접적인 미분법을 수립하는데, 이는 이념의 운송이나 운반이라는 의미의 은유로서 모험하는 것과 같다. 예를들어, 마르크스적인 의미의 사회적 이념은 생산관계와 소유관계들을 표현한다. 이 관계나 비율들은 구체적인 인간들 사이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을 소유하는 원자들 사이에 또는 소유의 주체들 사이에 성립한다. 경제학은 그와 같은 사회적 다양체에 의해 구성되고 미분비들의 변이성들에 의해 구성된다. 경제적인 것은 해석을 요구하는 어떤 미분적 잠재성을 지칭하는 사회적 변증법 자체이다. 다시 말해 경제학적인 것은 주어진 한 사회에 제기되는 일련의 문제들 전체, 이 사회의 종합적이고 문제제기적인 장이다. 

 

② 산술적 사유가 개념적 사유와 연관된다면, 미분적 사유는 이념적 사유와 연관된다. 

산술적 사유는 현실적으로 경험가능한 산술적 개념을 표시한다면, 미분적 사유는 경험 너머에 있는 초험적인 미분적 이념을 표시한다. “미분법은 어떤 문제조합법의 도구이다. 미분법은 예전에는 해결할 수 없었던 초험적인 문제들을 표현한다. 문제가 필연적으로 해에 내재한다는 것은 문제의 초월성, 그리고 문제가 해들 자체의 조직화에 떠맡는 지도적 역할을 증언한다. 미분적 요소는 결코 재현에 의해 매개되거나 개념의 동일성에 종속되는 일이 없는 ‘본연의 차이가 벌이는 유희’이다.”

 

③ 산술적 사유가 고정된 값을 표시한다면, 미분적 사유는 경향성의 벡터를 표시한다. 

산술적 사유가 독자적 위치를 표시한다면, 미분적 사유는 상호규정성을 표시한다. 즉 산술적 사유가 현재의 지점ㆍ가능성을 표시한다면, 미분적 사유는 변화의 방향성ㆍ잠재성을 표시한다. 따라서 산술적 사유가 현실화된 힘을 드러낸다면, 미분적 사유는 n승의 잠재적 역량을 드러낸다. “(양화 가능성과 규정가능성의 원리) dx는 x에 비해, dy는 y에 비해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는 이 영(零)들의 의미에 놓여있다. (질화 가능성과 규정가능성의 원리) dx는 x에 대한 관계에서 볼 때, dy는 y에 대한 관계에서 볼 때, 전적으로 미규정상태에 있다. 하지만 dx와 dy는 서로 관계할 수 있고, 그런 한에서 완전히 규정가능하다. 그렇게 때문에 어떤 규정가능성의 원리가 본연의 미규정자에 상응한다. (잠재력과 완결된 규정의 원리) 미분은 어떤 이념적 차이이고, 미분비가 잠재력의 순수요소인 것처럼, 미분은 순수한 거듭제곱, 곧 역량이다.” 

 

댓글목록

유택님의 댓글

유택

기계언니 오라클님 후기
열심히 읽고 내일 들뢰즈 세미나 가야겠어요.
요새 이진경샘 노마디즘1권 다 읽고
2권 열심히 읽는중인데요.
넘 놀라워요 들뢰즈-가타리.
이해가 좀 힘들지만 ㅋㅋㅋ
왜 이들의 철학이
그냥 관념이 아니라 실천으로 이어지는지
어렴풋이 알듯말듯..
그런 의미에서 왜 최진석샘이 인터뷰에서도 삶에 대해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지 살짝 알듯 말듯 ^^;;

선우님의 댓글

선우

아고, 고생 많으셨어요 오라클 님!
얼마나 공들였는지 느껴집니다.
덕분에 복습했습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결석자에게 빛이 되는 정성스러운 후기, 감사합니다.
물론 역량 탓에 쏙쏙 흡수하지는 못하지만,
오늘도 세미나 시간에 내 귓가를 스쳐지나가는 말들이
내 잠재성의 물음으로 되돌아오길 기대하면서!

행인1님의 댓글

행인1

와...대단합니다. 잘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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