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0924)후기 - 카프카 단편 +2
토라진
/ 2017-09-24
/ 조회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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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를 건너 다시 만나서 그런지 세미나원들이 더욱 반갑고 이야기하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이번에 읽은 분량은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거나 작품, 잡지 또는 묘기 비행 등에 대한 논평을 하는 것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카프카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는데요. 물론 다소 거친 감정과 스토리 전개가 곤혹스럽기도 했지만, 그가 가진 날것의 본질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습작 같은 작품들이어서,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점이 어떤 측면에서는 위로가 되기도 했구요, ‘이런 거장도 이런 습작 시절이 있었던 거겠지.....’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역시 카프카는 카프카구나, 싶은 우리의 결론!!!
카프카에게서 빠져나오지 못나는 이유를 한주 한주 발견해 나가고 있는 ‘카프카 세미나’인 것 같습니다.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지 않았다면 이런 발견의 기쁨을 느낄 수 없었겠죠?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 즐거움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다음 주에도 변함없이, 그러나 한 발자국 더욱 깊숙이 카프카에게로 다가가 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도착했다’ - 세계 안에 던져진 개인>
카프카 작품의 대부분은 한 인물이 어떤 장소에 느닷없이 던져지면서 시작된다. <변신>에서의 그레고르도, <성>이나 <소성>에서의 K도 마찬가지다. 이번에 읽은 <브레스치아의 비행기>에서도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도착했다.’
도착해서 ‘우리’가 발을 딛고 나아가는 곳에서, 그리고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세계가 비로소 펼쳐진다. 그것은 삼월의 표현대로라면, ‘언표 함으로써 펼쳐지는 세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전에 구축된 익숙한 세계가 아니라 낯선 새로운 세계이다. 그래서 <브레스치아의 비행기>에서는 ‘우리’는 마치 탐험가가 된 듯 비행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관찰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찰은 높은 곳에 올라가 비행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관중의 모습에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매번 시도할 때마다 관중들은 높은 곳으로 올라갔고, 짚으로 만든 의자 위에 올라서서 양팔을 활짝 벌려 균형을 잡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희망과 불안과 기쁨을 한꺼번에 보여줄 수 있다.”(352쪽)
높은 곳에서 세계를 응시하는 것. 그것은 앞에서 읽었던 <형제살해>에서 팔라스가 이층 창문에서 살해 장면을 바라보았던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조망하고 응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비행장에서의 관중들은 하늘의 광경을 더 잘 보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땅이 하늘로 전도되어 나타났을 뿐 이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응시가 희망과 불안, 그리고 기쁨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땅도 아니며, 하늘도 아닌 곳에서 인간은 어쩌면 이런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쩌면 반신(半申)적인, 인간도 신도 동물도 아닌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경계인의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탐구와 세계와의 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카프카에게 이런 감각은 어쩌면 평생 떨쳐버릴 수 없는 달콤한 고통이었으며 자기 성찰을 위한 고배(苦杯)였을 것이다.
<너무 가깝거나 먼, 불가해한 세계 또는 언어의 소통>
카프카의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 세계의 부조리와 부정성 속에서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는 섣불리 신을 불러오거나 삶을 긍정함으로써 굳건하게 살아나가는 힘을 애써 끌어오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자신과 세계를 들여다볼 뿐이다. 어떻게 하면 더 자세히 들여다 볼 것인가? 그것이 그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 해답에 대해 스스로도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문제를 쥐고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 그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젋은 오스발트의 이야기]라는 소설작품에 대한 비평의 형식을 띤 <어느 청춘 소설>에서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는 이런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너무 가까이 있어 오히려 그녀를 잘 보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녀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쯤이면 벌써 우리는 그녀에게서 멀리 벗어나 있고, 그녀의 모습은 멀리 조그맣게 보일 뿐이다. “그녀가 작은 머리를 자작나무 난간에 기대고 있으면 달은 그녀의 한쪽 얼굴을 비추고 있다.(359쪽)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알 수 없다는 그의 한탄은 자신의 한계에 대한 고백이자 세계의 불가해성에 대한 통찰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한계성 안에서 글을 쓰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카프카에게 있어서 글은 다만 이런 실패 속에서 전전긍긍하는 인간과 변함없이 냉정한 세계의 관계에 있어서의 미세한 변화와 흐름들을 그려내는 데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여름 이후로 이 책은 주인공과 사람과 신의와 그 밖의 모든 좋은 일들과 더불어 모조리 멸망의 길을 걷게 되고, 오직 주인공의 시문학만이 남아 승리를 노래할 뿐이다.(359쪽)
하지만 여기서 ‘시문학의 승리’라는 것은 앞서의 실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 힘든 싸움의 분투를 굳이 ‘승리’라고 하고 싶었던, 그 소심함이 어쩌면 그가 글을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던 힘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카프카의 글에 대한 열정은 <영면하게 된 어느 잡지>라는 작품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울분으로 드러난다. [헤페리온]이라는 잡지의 폐간에 대해 논하는 논평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여기에는 자신이 쓴 작품들이 대중에게 인기 없고, 이상한 이야기로 들린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름의 자부심을 잃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힘을 북돋워주는 일도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계속해서 진실하게 남아 있기 위해서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양식(糧食)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362쪽)
카프카는 자신만을 양식으로 삼아야 하는 글 쓰는 자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외로움과 처절한 싸움의 상흔들은 때로는 자부심으로 때로는 울분으로 드러나고 있다. 거칠지만 날것의 카프카는 이렇듯 이곳저곳에서 출몰한다.
<분열된 자아 또는 타자화된 ‘나’>
[막스 브로트와 프란츠 카프카의 『리하르트와 자무엘』의 제1장]은 친구와 여행하면서 번갈아 쓴 여행기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우선 리하르트는 은행원이지만 직장인답지 않게 섬세한 감성과 상대에 대한 심리를 잘 이해한다. 자무엘은 예술협회 서기로서 예술적인 감성을 갖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직업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폭력적이며 감각보다는 현실적인 성취욕이 강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결국 한 사람 안에 두 가지의 상반된 특성이 혼재되어 있고, 그러므로 그것은 위아래가 뒤집혀 놓인 똑같은 인형과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결국 이것은 카프카 안에 있는 두 가지 속성이 이런 방식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카프카는 죽을 때까지 직장에서의 일과 글을 쓰는 일,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았으며 두 가지 다른 정서를 가진 자신의 분열적인 자아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작품에 녹아냈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분열적인 자아가 함께 여행을 가는 방식에 주목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이라는 낯선 경험을 통해 타자를 다시 인식하게 된다. 여행을 통해 상대의 밑바닥 심성과 기질을 적나라하게 알게 되면서 그 사람과 멀어지게 되는 경우는 흔하다. 이 작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리하르트와 자무엘은 서로에 대해 환멸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 환멸을 앞에서의 자아의 분열과 연결시켜보면,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환멸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절친인 ‘브로트’를 끌어들임으로써 ‘브로트 아닌 브로트 또는 브로트 같은 브르트’로서의 자신을 객관화하고 타자화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위치의 좌표를 정확하게 알고 내면의 정체성에 대해 면밀하게 관찰하고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카프카는 세계의 인식을 이렇듯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데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탐구는 인간 보편의 문제로 나아간다. 발가벗은 그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우리의 모습에 세계는 이미 들어있음을 카프카는 감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미세 감각을 통해 다다른 환상의 세계>
카프카는 풍경이나 장소의 묘사에 집중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외부를 인식하는 감각에 대한 묘사에는 탁월했다. 특히 시선이 집중되는 방식, 소리가 들리는 형태, 피부로 느껴지는 감촉 등에 대해 섬세한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다.
<큰 소음>이라는 작품은 습작처럼 보이는 작품이다. 그저 들려오는 소음에 대한 묘사가 이어질 뿐 어떤 사건이 전개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감각은 독특하고 특별하며 적확하다. 이러한 감각의 훈련은 환상적인 상상력과 통합되면서 카프카만의 독특한 문학 세계가 형성된 것 같다. 이런 작품 중 하나가 <양동이를 탄 사나이>이다.
<양동이를 탄 사나이>에서 나는 양동이를 타고 석탄을 구하기 위해 날아간다. 그러나 석탄을 얻지 못하고 석탄가게 부인이 휘두른 앞치마에 사라져버린다. 석탄 가게 주인과 그의 부인, 나 사이에서 말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각자의 심리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불분명한 상태가 된다. 양동이를 타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절실함을 이해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카프카에게 있어서 환상은 현실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미세한 감각의 탐험을 통해 현실은 환상을 통해서 비로소 인식되는 것이다.
<유예된 시간 속, 사건의 흐름에 대한 응시>
[시골의 결혼 준비]는 사실 카프카 자신의 일기 같기도 하다. 자신의 애인 펠리체와의 약혼과 결혼을 여러 번 번복하고 미뤄왔던 자신의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약혼녀가 있는 시골에 가서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입장인데도, 그는 어떤 이유에서건 그곳에 가 닿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유예되거나 폐기된 결혼을 상상하면서 결혼식에 참석하게 되었을 때와 그렇지 않았을 때를 상상한다. 그것은 아직 가 닿지 않은 사건을 끊임없이 유예시킴으로써 이미 결정되어 버린 어떤 사태 이전의 시간을 지연시킨다. 시간이 지연되면 사건은 진공 상태 속에 들어가게 되고, 중력의 힘에 이끌리고 있는 ‘나’는 그 세계와 단절되게 된다. 끊임없이 단절되는 이곳에서 ‘나’는 안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안전은 늘 불안과 부끄러움과 함께 한다. 이런 불안과 부끄러움을 감수하면서도 그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럴 수밖에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글을 쓰는 가장 솔직한 사람. 아마 카프카는 그런 사람이이지 않았을까? 그의 작품이 특별하고 가치 있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소통의 불가능성으로부터 오는 자기표현의 문제들과,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일어나는 공감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카프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군요. 정성스러운 후기도 잘 읽었습니다.
후기를 통해 카프카의 소설을 펼치며 맞닥뜨린 세계와, 카프카를 이야기하며 우리가 만들어갔던 세계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소통의 불가능성과 공감의 문제......오래전부터 나를 통과하며 내 안의 무언가를 흔들어놓고 있는 화두이기도 합니다.
카프카를 통해 서로 다르지만 같은 흐름을 타는 기분이 들어요.
따뜻한 커피 한잔 마시고 싶어지네......
한 잔 드릴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