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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세미나] 화재경보 115~170쪽 세미나에 대한 후기 +1
최원 / 2017-09-25 / 조회 2,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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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재경보 세미나에서는 미카엘 뢰비의 설명이 가지고 있는 몇몇 문제점들에 대한 논의를 했습니다. 뢰비는 벤야민의 텍스트 가운데 자신의 관점에 잘 맞지 않는 부분은 제외하려는 경향이 보이기도 하고, 자신이 중시하는 어떤 개념에 집착함으로써 벤야민의 텍스트를 명시적으로 오독하기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의견이 조금 갈리기도 했습니다. 뢰비의 해석은 종교와 맑스주의를 연결시키려고 하고, 계급 없는 사회에 대한 꿈을 간직하고 있는 점이 마음에 든다는 의견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러한 점들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텍스트를 잘못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크다는 의견 또한 있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낙원으로부터 불어오는 폭풍’에 대한 그의 해석이 벤야민 자신의 이야기와는 백팔십도 다른 해석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벤야민 자신에게 ‘낙원에서 불어오는 폭풍’은 진보의 폭풍입니다. 여기서 낙원이라 함은 진보가 꿈꾸는 어떤 이상적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고, 진보가 결국 이루어야할 목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낙원에서 불어오는 거센 폭풍으로 인해 역사의 천사는 날개를 접지도 못한 채 미래 쪽으로 밀려가고 있다고 벤야민은 말하지요. 따라서 여기서 벤야민은 낙원을 결코 긍정적으로 논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뢰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낙원 개념에 대한 긍정적 생각 때문에 벤야민의 텍스트를 완전히 거꾸로 읽고 있습니다.  

 

뢰비는 특히 벤야민의 테제를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의 한 구절과 연결시키면서 그 두 사람이 벤야민을 베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만, 그들의 텍스트를 잘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렇게 말합니다. “화염검으로써 인간을 낙원으로부터 기술적인 진보의 궤도로 몰아낸 천사는 그 자체가 이런 진보의 상징이다.”  

 

여기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하는 낙원은 좋은 것이며 천사는 인간을 낙원에서 쫓아내서 기술적 진보의 궤도로 들어서게 만든 자로서, 즉 “진보의 상징”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벤야민에게 천사는 진보의 상징이기는 커녕 진보를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고 하고 진보가 만들어내는 잔해 또는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다시 결합해서 진보와 대결하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하는 것은 벤야민의 정반대인 것이지요. 그 두 사람은 그냥 상투적인 에덴동산에 대한 비유를 차용하면서, 에덴동산=자연에서 쫓겨나 기술적 진보=문명의 길로 접어든 인간의 타락에 대해 논하고 있을 뿐이지요. 그런데 뢰비는 왜 이 완전히 대립된 주장을 같은 것으로 등치시키는 걸까요? 바로 뢰비는 여기 나온 벤야민의 ‘낙원’이라는 말을 유토피아 및 원시적인 무계급사회로 바라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가 벤야민의 종말론적 사고를 목적론적 사고와 이론적으로 구분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뢰비는 사실 벤야민과 그의 동시대인들 사이의 관계를 매우 단순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확실히 숄렘이나 루카치와 벤야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만 그리고 있는데, 실제로 그들과 벤야민이 맺은 관계가 그렇게 정리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브레히트와의 관계는 또 너무 부정적으로만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이들 간의 관계의 복잡성을 살펴보고 분석하지 않은 채 그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 줄 세우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과연 벤야민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룩셈부르크, 레닌, 블랑키 등에 대한 평가도 너무 편협합니다. 뢰비는 룩셈부르크와 레닌을 대립시키면서는 자생성주의를 주장하면서 레닌을 비난하는데, 그렇게 놓고 보면 블랑키야말로 전위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음모론적 권력장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주장했던 사람임에도 그는 블랑키에 대해서는 좋게만 이야기 하지요. 문제는 이들이 모두 어떤 곤란을 겪었다는 것이고 모순들 속에서 사유하고 실천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 곤란과 모순들 자체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요? 벤야민 자신에게서도 하나의 관점을 따라 그의 논의를 깨끗이 단숨에 정리해버리는 것보다는 그가 이론적 사유를 하면서 겪었던 내적 갈등이나 곤란 등을 드러내기 위해 그의 사유의 복잡성, 심지어 균열들을 분석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한편,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이유를 뢰비는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승리의 필연성을 믿는 진보사관과 승리사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봤는데, 그것은 일리가 있을지라도 과연 벤야민의 실천이 그런 공산주의자들의 실천과 얼마나 다르게 나타날 수 있었을까 의문스럽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히틀러 집권 바로 전에 바이마르 공화국은 매우 큰 위기를 겪고 있었지요.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나치와 손을 잡고 동맹 파업을 벌입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바이마르 정권만 무너뜨리면 곧 대중들이 자신을 지지해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알다시피 결과는 완전히 예상을 빗나갔지요. 대중이 공산주의자들이 아닌 나치를 지지했기 때문입니다. 벤야민 또한 혁명적 봉기의 정당성만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면이 있는데, 그것이 과연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실천과 얼마나 다른 실천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는 대중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분석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데(왜 대중들은 나치를 지지했는가, 왜 자신의 예속을 욕망했는가?), 벤야민에게는 다른 전통 맑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유가 없다는 문제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댓글목록

강길모님의 댓글

강길모

페북 링크해주신걸로 찾아와서 잘 읽었습니다. 페북의 어떤 댓글에 대해 상당히 노하신거 같아서 뭐지? 했는데... 후기를 읽어보니 왜 그런 반응을 보이셨는지 이해가 됩니다. 그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 데리다 세미나 뒷풀이때 여쭤보고 싶어지네요. 비슷한 일들을 근래 몇번 겪기도 했고, 제 자신도 종종 그런 잘못을 저지르니... 어쨌든, 질문을 두 가지 드리고 싶습니다.
1. 뢰비와는 무관한 벤야민 해석에 대한 질문입니다. 벤야민이 낙원을 진보의 목적으로 설정하고, 이곳에서 불어오는 폭풍으로 인해 역사의 천사가 날개를 접는다고 한다면, 벤야민은 진보 자체는 거부하되 맑스주의란 진보와는 다른 것으로 기능하기에 접점을 이어간다고 볼 수 있을까요? 벤야민의 종말론적 사고와 맑스주의 사이의 접점을  예전부터 잘 이해하지 못했고, 납득하기 어려워서 드리는 질문입니다. 저는 진보를 배제한 맑스주의라는 것 자체가 가능한지도 회의적이긴 합니다. 혹은 애초에 제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인가요?

2. 마지막 단락에 대한 질문입니다. 뢰비의 이야기대로 33년 히틀러의 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공산주의자들의 진보/승리사관이라고 해도(저는 이 진단 자체에 동의하지 않기 어렵습니다.당시 독일인들에게 지도자 독재를 거부할 정치적 상상력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고, 저에게는 이 부분이 정통 맑스주의자들에게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유가 없다고 지적하신 것과 궤를 같이 합니다.), 그들의 실천과 벤야민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다를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한 질문입니다. 전자가 목적론적 사고라면 후자를 종말론적 사고로 보고, 이런 사고에 입각한 실천행위를 봉기행위 자체의 공간내기에 초점을 맞춰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경우 그 점에서 전자와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텐데요(제 생각이 아니라 벤야민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논의를 접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르지 않을거 같다고 의문을 제기하시는 것은 공간내기 자체만으로는 다른 실천에 대해 논하는 것이 불충분하다고 보고 계신건지요? 아니면 단순한 형식논리만으로는 공간내기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시는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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