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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후기_발터 벤야민: 화재경보 <서론>
희음 / 2017-09-11 / 조회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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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한숨을 내쉬었을 뿐인데 일주일이 지나 있네요. 시간에게 배반당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그 지나간 시간 안에 과연 ‘미래가 놓고 간 단어’(벤야민) 같은 것이 있을까, 나 혼자만 그런 성좌적 선물을 박탈당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그리고 두리번거림... ‘유토피아적 미래에 도달(뢰비)’하기 위해서는 과거로 우회하는 방법을 통해야 하는데, 우회를 한다 해도 그 과거 안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것이 없다면, 혹은 빛나는 어떤 장면도, 기억도 없다면 그 우회의 걸음은 헛걸음이 될 테니까요. 사설이 길었습니다. 실은 후기가 늦어진 데 대한 변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세미나 시간에도 위에서 언급한 ‘유토피아적 미래’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뢰비의 말처럼 벤야민이 과연 ‘유토피아’라는 이상적 왕국에 대한 상을 제시한 것이 맞는가 하는 문제제기 덕분에 그에 대한 알찬 논의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신학적·정치적 단편>에서 벤야민은 ‘세속적인 것의 질서’를 따라가는 행복추구의 법칙에 메시아의 왕국은 도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또한 파국 추구의 법칙이기도 하면서 눈 굴리기와도 같은 기묘한 혁명적 치달음에 대한 말이기도 합니다. 그 단편에서 벤야민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이라는 저작이 ‘유토피아’에 대한 훌륭한 상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죠. 블로흐는 우리가 자아라는 협소한 영역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나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유의 나라란 묵시록의 특성을 갖춘 유토피아적 의미에서의 마지막 상태를 가리킵니다. 뢰비는 유토피아와 관련된 벤야민의 메시아적 역사철학의 단초가 1914년에 그가 쓴 <대학생들의 삶>이라는 초기 연설문에서도 들어있다고 말하며 놀라워 합니다.

 

“반대로 여기서 우리는, 사상가들이 유토피아의 이미지들을 제시하면서 늘 그렇게 했던 것처럼, 역사를 하나의 초점에 집약하는 특정한 상황에 비추어 고찰할 것이다. 최종 상황의 요소들은 진보주의의 무정형한 경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엄청난 위기에 처해 있으며 고도로 비난받고 조롱받는 창조들과 생각들로서, 그 요소들은 심오한 방식으로 모든 현재 속에 구현되어 있다. ······ 이 상황은 ······ 메시아의 왕국이나 1789년의 의미에서 혁명 이념처럼 그것의 형이상학적 구조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

 

인용된 부분과 관련하여 어떤 해석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갈리기도 했습니다. 벤야민이 말하는 ‘유토피아’와 관련된 의미에 대해서 말이죠. 제 경우, 유토피아라는 미로를 조망하는 특별한 망막 같은 것이 어떤 과거 안에 이미 심어져 있다는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고도로 비난받고 조롱받는 창조들과 생각들’, 즉 당대에 억압되고 잊혀진, 피지배자들 혹은 소수자들의 모든 얼룩들의 역사 안에 이미 그것이 들어 있다는 데 방점을 찍었죠. 벤야민이 유토피아의 요소가 ‘모든 현재 속에 구현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 보았어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토피아의 ‘이미지’일 뿐이고 실제로 유토피아란, 그 단어 뜻 그대로 ‘없는 장소’로서, 도래할 때로만 언제까지나 남겨져 있는 것일 테고, 우리는 그 ‘때’를 응시하면서 세속적인 것의 질서를 따라가는 일 외에는 할 것이 없겠죠.

 

그렇다면 뢰비의 화두처럼, 메시아의 왕국과 혁명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두 ‘유토피아의 이미지’는 어떻게 벤야민의 말 안에 충돌 없이 담길 수 있는 걸까, 하는 질문에 저 또한 한참을 붙들렸습니다. 메시아의 왕국은 수동적인 기다림에 대한 제시이고, 혁명은 그와는 정 반대되는 능동적인 물리적 발산 행위에 대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선가 벤야민이 말했던 ‘적극적 수용’의 자세와 관련하여 그 매듭의 고리가 풀리는 듯도 했습니다. 혁명의 때를 기다리는 것, 어느 날 과거의 한 장면이 나의 망막 앞에 하나의 빛나는 별자리로 그려질 때를 대비하여 나의 망막을 매일의 눈물로 닦아두는 것. 즉, 나의 신체를 그 혁명의 때를 알아차리기에 적합한 것으로 바꾸어 힘 있게 기다리는 일 말이죠. 억압된 것들의 역사 속에 깃든 '창조들과 생각들'의 망막과 나의 망막이 하나로 포개지게 될 그날을 기다리는 것.

 

그러나 혁명에 대한 말은 벤야민의 <카프카론>에서 그 어조가 조금 바뀌기는 합니다. 단식광대는 단식을, 학생은 공부를, 대장장이는 망치질을, 두더지는 땅 파기를 하면서, 무언가를 향한 수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그저 하는 것, 하면서도 하지 않는 도(道)로써 한 가지를 하며 각자의 리듬을 열어가는 일을 그는 마치 혁명의 행위, 혁명의 때보다 우위에 두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렇게 리듬을 열어가는 일이, 혁명의 때를 알아보는 망막을 기르는 일의 하나라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진정한 혁명의 때는, 메시아의 왕국은 영영 하나의 소실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요. 벤야민의 더 많은 저작들을 읽어야만 그의 마음 안의 진실을 알 수 있겠지만요. 아니 제대로 알 수 없을 확률이 더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몇 년 그가 남긴 글자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서야 그가 놓고 간 몇 단어의 비밀이 어느 찰나에 성좌처럼 빛날지도 모른다는 믿음으로...

 

뢰비가 정리해 주는 벤야민의 철학사적 위상 또는 개념 정리가 일목요연하여 눈에 잘 들어오긴 했지만, 읽기에 그리 흥미롭지는 않았습니다. 너무 큰 그림을 그린 탓에 벤야민이 창안한 주요 알레고리의 개념들이 주먹구구식으로 뭉뚱그려진 듯했기 때문이죠. 그의 정치적 입장이나 관심에 치우쳐 벤야민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듯한 부분도 눈에 띄었고요. 그 때문인지(아니면 그에 부합하기 위함인지^^;;) 후기도 횡설수설일 겁니다. 멤버들의 주요 지적과 논의들이 고루 담기지도 못했고요. 그래도 남은 세 번의 뢰비 읽기에서 보다 흥미로운 논지의 조각들이 있을 거라 믿습니다. 이제는 각각의 테제에 대한 파고들기가 시작되니까요. 세미나에 새로 합류한 황혜리 선생님이 세미나 막바지에 해 주신 유쾌한 발견의 말씀을 인용하며 이 정신없는 후기를 마칠까 합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세미나에 함께하는 바로 이 시간과 공간이 메시아의 왕국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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