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엽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_0912 발제 +1
희음
/ 2017-09-12
/ 조회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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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의 기입
“이러한 최초의 시작 부분에서 최초로 입문되는 것은 이미 변질되었고, 그리하며 기원에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회귀한다. 음성 언어는 다만 분절됨으로써만, 그리고 새로이 요구를 표현하기 위해 냉각됨으로써만 남방에서 이해된다... 언어/정열/사회는 북쪽에도 남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양극점이 차례차례 서로를 대체하게 하는 대리보충성의 운동이다. 이 운동을 통해서 악센트는 분절 속에서 손상되고, 공간화되면서 지연된다. 지역적인 차이는 욕망과 쾌락 사이의 차연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은 다만 언어의 다양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적 분류의 기준일 뿐 아니라, 언어들의 기원이다. 루소는 이 점을 선언하지 않지만, 우리가 보았듯이 그것을 기술한다.” (464-465)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언어들의 진정한 기원-혹은 비기원-은 하나의 기관을 다른 기관으로 대체하고, 공간과 시간, 시각과 목소리, 손과 정신을 분절할 수 있는 힘, 바로 이러한 대리보충성의 능력이다. 이는 자연과 관습의 분절로서, 자연과 다른 모든 것의 분절로서, 분절 일반이다.” (421)
“이러한 우회는 분절의 개념이 지닌 기능을 다시 파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분절은 언어를 개시한다. 그것은 음성언어를 정열에서 태어난 제도로 열어놓지만, 시원적 음성 언어로서의 노래를 위협한다. 그것은 언어를 욕구와 이성-이 둘은 공모자이다-쪽으로 끌어당기고, 이에 따라 자신을 문자 언어에 더 적합한 것으로 만든다.” (422)
“이러한 운동을 루소는 우발적인 사건처럼 생각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는 그 운동을 원초적 필연성에 따라 기술한다. 이 불행한 우발적인 사건은 또한 ‘자연/본성적인 진보’다... 따라서 분절이전에는 음성 언어도, 노래도 없고, 따라서 음악도 없다. 그러므로 정열은 분절이 없이는 표현되거나 모방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언어는 그자신의 퇴락 과정으로부터 탄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의 복원이 아니라 단지 간극을 추정하고자 하는 루소의 기술적 절차를 번역하기 위해, 그로부터 간극이 측정되거나 구조가 묘사되는 어떤 것을 영도 내지 단순한 기원이라 부르는 것은 경솔한 짓일 것이다. 영도 내지 기원은, 기원이 단순하다는 것, 기원이 또한 퇴락이 아니라는 것, 기원이 현전 일반의 형식 속에서 사유될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이러한 현전이 변형된 현전이든 아니든, 과거의 사건이든 영속적인 본질이든 간에). 단순한 기원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는 또한 간극이 어떤 단순한 축 위에서, 그리고 유일한 그런 방향 속에서 측정된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루소의 기술 속에 있는 어떠한 것도 우리가 이렇게 하도록 허락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킬 필요가 있을까?” (423)
“단순한 기원을 선언하려는 루소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루소의 담론은 언제나 기원의 대리보충 형태를 띠고 있는 복잡성에 의해 구속받고 만다. 그렇다고 그의 선언된 의도가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그것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체계 속에 기입된다. 기원에 대한 욕망은 필수불가결하고 파괴 불가능한 기능이 되지만, 이러한 기능은 기원이 없는 통사법 속에 위치하게 된다. 루소는 기원성을 대리보충성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한다. 우리의 로고스에 의해 구성된 모든 권리가 그의 편을 들고 있다. 곧 기원이라는 이름을 지닌 것이 대리보충성의 체계 속에 위치한 한 지점에 불과하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참을 수도 없는 것이다. 사실 대리보충성은 언어를 그 기원의 조건으로부터, 그 조건문이나 그 기원의 미래로부터, 언어가 마땅히 그렇게 존재했어야 하지만, 결코 그것이 그렇게 존재한 적이 없었던 바로부터 언어를 떼어놓는다. 언어는 그것이 일체의 기원과 맺고 있는 관계를 중지시킴으로써만 태어날 수 있었다. 언어의 역사는 기원의 대리보충의 역사다, 언어의 역사는 기원적인 대리보충의 역사이고 기원의 대리보충의 역사인 것이다.” (424)
*p426 언어기원론 5장
“따라서 대리보충성은 인간의 고유성을 만들어 주는 모든 것, 즉 음성 언어/사회/정열 등과 같은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인간의 고유성이간 무엇인가? 한편으로 그것은 인간 이전에, 인간 밖에서 그 가능성을 생각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우연적이거나 본질적 속성이 아닌 대리보충성 이후로/대리보충성에 입각하여 스스로 자신에게 예고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한편으로 대리보충성은 아무것도 아닌 것, 현전도 부재도 아니고, 인간의 실체도 본질도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말하면 바로 현전과 부재의 유희이며, 형이상학이나 존재론의 어떠한 개념도 이해/포괄할 수 없는 이러한 유희의 열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 고유성은 인간의 고유성이 아니다. 그것은 고유성 일반의 탈구 자체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인접성의 불가능성-따라서 그것에 대한 욕망-이다. 순수현전의 불가능성, 따라서 욕망인 것이다. 대리보충성이 인간의 고유성이 아니라는 것은, 단지, 또한 급진적으로, 그것이 하나의 고유성이 아니라는 점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대리보충성의 유희는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에 선행하며, 인간 밖으로 확대된다는 것도 의미한다. 인간은 대리보충성의 유희로부터 자신의 타자를 배제시키는 경계들(자연의 순수성/동물성/원초성/유년/광기/신성 등)을 설정함으로써만 인간이라 불린다. 이러한 경계들에 접근하는 것은 죽음의 위협으로서 두려움을 안기면서, 동시에 차연 없는 삶에의 접근으로서 욕망된다. 인간이라 불리는 인간의 역사는 이 모든 한계들 사이의 분절이다.” (427)
“아마 우리는 여기서 대리보충의 개념과 관련한 루소의 담론이 처한 상황과, 동시에 우리가 시도하는 분석의 위상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루소는 대리보충을 생각지 않고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자신의 말을 일치시키지 않고 있고, 자신의 선언에 자신의 기술을 일치시키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또한 이러한 괴리, 이러한 모순을 조직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루소는 낱말을 사용하여 사물을 기술한다. 그러나 이제 알고 있듯이,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낱말도 사물도 아니다. 낱말과 사물은 다만 대리보충적 구조만이 생산하고 나타낼 수 있는 지시적 한계들이다.” (427)
“루소가 동시에 구제하고자 하는 두 모순적인 가능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는 이 일에 어떻게 착수하는가? 한편으로 그는 분절을 원칙으로 하는 모든 것, 즉 분절과 더불어 체계를 이루는 무든 것(정열/언어/사회/인간 등)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면서 긍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분절에 의해 삭제되는 모든 것(악센트/생명/에너지/정열 등)을 긍정하고자 한다. 대리보충은 이 두 가능성의 분절된 구조이기 때문에, 루소는 이 대리보충을 분해하여 논리적으로 모순적인 두 개의 단순한 것들로 분리시킬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훼손되지 않은 순수성을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에 남겨두면서 말이다. 하지만 루소는 동일성의 논리처럼, 대리보충성이 표기(표기된 것) 속에 사로잡혀 그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고, 결론으로 내리고 싶지 않은 것을 기술한다. 즉 긍정적인 것이 부정적인 것이고, 삶이 죽음이며, 현전이 부재라는 점과, 항상 그래왔듯이 적어도 반복적인 대리보충성이라는 개념이 현전의 지평에 의해 지배된다면, 이 대리보충성은 어떠한 변증법으로도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 말이다.” (428-429)
네우마
루소 저작에서 자연적인 목소리, 곧 분절되지 않은 목소리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유년기의 목소리와 신의 목소리가 그것이다.
루소에게 자연적인 목소리는 우선 유년기의 목소리로 나타난다.
*p431 에밀
“말할 줄 알기 전에 말하는 것, 이것이 루소가 방향을 잡아 기원의 반복을 집요하게 이끌고 가는 한계점이다... 어린아이는 말할 줄 알기 전에 말한다. 그는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언어에서 부족한 것은 자신을 대체하는 능력, 다시 말해 하나의 기호에 다른 기호를, 하나의 표현기관에 다른 표현기관을 대체하는 능력이다... 여기서 어린아이는 단 하나의 언어만을 지닌 것의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 하나의 기관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루소의 어린아이다. 그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단 하나의 언어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31)
*p432 에밀
“어린아이는 자신이 느끼는 불편함의 형태들을 서로 대체할 수 있을 때 말할 줄 알게 된다. 그때 그는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슬며시 이동할 수 있고 하나이 기호를 다른 기호 속으로 슬그머니 밀어 넣을 수 있고 의미를 나타내는 실체들과 유희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인간의 질서로 규정된 대리보충의 질서로 들어가는 것이다.” (432)
“분절은 수족의 기관들의 분절이고, (고유한) 몸 (속에서)의 차연이다. 그런데 자연적 표현에서 이러한 차연을 없애는데 가장 적합해 보이는 것은 숨결이 아닌가? 말하고 노래하는 숨결, 언어의 숨결이지만 미분절된 숨결 말이다. 이러한 숨결은 인간적인 기원이나 목적지가 없다... 그것은 초인간성으로 통하는 도상에 있다.” (433)
“순수한 숨결과 손상되지 않은 생명력, 노래와 미분절된 언어, 곧 공간적 간격이 없는 음성언어라는 이러한 전범적인 모델이 비록 유토피아적이고 비상식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패러다임을 갖고 있다... 그것은 네우마이다.” (434)
*p434 음악사전
데리다에 따르면 네우마는 말할 줄 알기 전에 말하기의 대표적인 사례이고, 차이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순수한 현전, 미분절된 현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루소는 이러한 지속적인 자기현존이 신에게만 허여된다고 간주한다.
“고독한 산책자”에 나오는 구절에서 데리다는 순수현전에 대한 네 가지 의미를 분석한다.
1) 자기 자신에게 현전하는 즐거움, 곧 어떤 외부에 의해서도 변질되지 않는 순수한 auto-affection은 신에게만 허여된다.
2) 운동, 생명, 시간의 향유, 자기현전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운동은 간격, 차이, 불연속성이 없어야 한다.
3) 이 운동은 비분절된 말이고, 낱말들 이전의 말이며, 말을 할 만큼 충분히 살아 있는 말이고, 어떤 대상과도 관련을 맺지 않을 만큼, 또 어떠한 치명적 차이나 부정성도 자기 자신 안에 맞아들이지 않을 만큼 충분히 순수하고 내적이며 동질적인 말이다. 노래
4) 그러나 우리는 거의 불가능하고 대리보충성의 강제들과 거의 무관한 이러한 경험을 (우리의 마음이 이를 체험할 만큼 충분히 순수하다면) 이미 대리보충으로서, 보상으로서 체험한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과 신의 경험의 차이이다. (435-436)
유토피아적인 이런 네우마 언어를 “언어기원론”은 네 장(8-11)의 기술을 통해 부정한다. 여기서 기술되는 것은 분절 이전에, 곧 지역적 차이 이전에 언어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들의 두 극(남방/북방) 사이의 지역적 차이는 언제나 분절의 유희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리학을 고려하지 않고는 언어의 구조나 일반적 본질이 기술될 수 없다. (437)
여기서도 역시 선언과 기술 사이의 구별이 작동한다. 루소는 “언어기원론” 9장에서 언어의 역사에는 단 하나의 기원, 단 하나의 제로 지점이 있다고 선언하며 남방을 꼽는다. 데리다는 “언어기원론”과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관계를 문제틀로 삼으며 두 저서의 기술에서 발견되는 외견상의 괴리를 설명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루소는 두 저서에서 태초에 대한 연속적인 두 개의 상태를 기술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연속적인 질서를 부여하지 않으면서도 “인간 불평등 기원”으로부터 “”언어기원론“으로의 약간씩의 변화가 연속성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두 저서의 차이점 역시 드러낸다. (438)
“전자(인간 불평등 기원)는 시작을 표시시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것은 순수 자연 상태에서 처녀성의 특성들을 날카롭게 다듬고 급진화시킨다. 후자(언어기원론)는 시작들을 느끼게 하고, ‘지구 표면에 흩어진 인간들’이 막 태어나는 사회에서 순수 자연 상태로부터 지속적으로 벗어나는 운동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인간을 탄생의 이행 속에서, 기원으로부터 발생으로의 이 미묘한 이행 속에서 포착한다. 이 두 개의 기획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둘 사이에는 우선성 조차 없다. 그리고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순수 자연에 대한 기술은 그 안에 이런 도약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는 거의라는, 포착 불가능한 경계다. 자연도 사회도 아닌, 거의 사회인 것이다. 탄생 중에 있는 사회...“(441)
“따라서 만약 “인간 불평등 기원”에서 “언어기원론” 사이에 약간의 이동이 존재했다면, 이는 이러한 지속적인 벗어남, 순수 자연에서 탄생중인 사회로의 이 느린 이행에서 기인할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명백함은 그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분절된 것에서 분절된 것으로, 순수 자연에서 문화로, 충만함에서 대리보충성로의 어떠한 연속성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탄생을, 대리보충의 탄생하는 존재를 기술해야 하는 “언어기원론”은 두 개의 시간을 화해시켜야 한다. 자연 바깥으로의 탈출은 점진적이면서 급작스러운 것이고, 순간적이면서 끝나지 않는 것이다. 구조적 휴지는 뚜렷하지만, 역사적 분리는 완만하고 힘이 들며 점진적이고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이중의 시간성에 관하여 “언어기원론”은 여전히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일치한다.“ (443)
이 ‘간단한 손가락 운동.’ 문자와 근친상간의 금지
루소는 자연 상태에서 언어/사회 상태로의 이동, 즉 대리보충성의 도래를 외재적 재앙을 통해 기술한다. 그리고 대리보충/분절/기호/대표의 시대는 근친상간의 금지와 더불어 열린다. 데리다는 루소가 선언은 않지만 언어의 기원은 금지도 위반도 아닌 차연임을 기술한다고 밝힌다.
“우리가 앞으로 보겠지만 왜 문명인의 기원, 언어들의 기원 등, 한마디로 대리보충적 구조의 기원과 문자의 기원과 같은 기원은 재앙적인가? 왜 그것은 전복/회귀/혁명의, 그리고 일종의 퇴보와 같은 진보적 운동의 형태로 된 혼란 다음에 오는가?” (444)
*p445 언어기원론
“미개한 인간의 자연적 나태는... 자연적 체계에 필요 불가결한 시원적 결정 요소이다. 그것은 인간이 미개함과 이것의 황금시대로부터 자발적으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한다...
논리적으로 볼 때, 계절의 불안과 차별화라는 재앙은 무기력한 체계의 안쪽에서는 발생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상상할 수 없는 것, 예컨대 자연에 완전히 외재적인 어떤 약간의 충격 같은 것을 상상해야 하는 것이다. 외관상 ‘자의성’을 띠는 이러한 설명은 어떤 심층적인 필연성에 부합하고, 그리하며 많은 요구들을 타협시킨다. 부정성/악의 기원/사회/분절은 바깥으로부터 온다.“(446)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운동 속에, 자연적 능력들-그리고 본질적으로 완벽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상상력의 일깨움 속에 무언가 재앙적인 것이 있다는 것은 “언어기원론”의 한 명 제인데, 우리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 제1부의 마지막에서 그것의 근거 혹은 철학적 구도를 만난다.“ (448)
*p449 인간 불평등 기원론
“우리가 여기서 외적 목적론이라 부르는 것은 방법에 관한 일종의 담론을 고정시키게 해준다. 즉 기원의 문제는 사건적이지도 구조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과 권리, 역사와 본질이라는 단순한 양자택일을 벗어난다...
따라서 자연 상태에서 언어/사회 상태로의 이동, 즉 대리보충성의 도래는 생성과 구조, 사실과 권리, 역사적 이성과 철학적 이성의 단순한 양자택일에는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진다. 루소는 대리보충을 어떤 부정성으로부터 설명한다. 그런데 이 부정성은 그것이 뒤흔들러 오는 체계에 완전히 외재적이다... 대리보충성의 재앙성은 장 자크에게 ‘대리보충’과 ‘치명적 기쁨’을 얻게 해주는 재앙처럼, 분명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이성/언어/사회의 가능성, 즉 대리보충적 가능성은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450-451)
“이와 같은 축제 다음에 무엇이 이어지는가? 그것은 대리보충/분절/기호/대표의 시대이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시대이다. 축제 이전에는 근친상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근친상간의 금지도 사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축제 이후에는 더 이상 근친상간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금지되기 때문이다. 루소는 이 점을 분명히 표명한다.” (458)
“그리고 그는 ‘누이’라는 말에 의해 요청된 주석에서, 근친상간의 금지가 축제 다음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 인간 사회를 탄생시키는 행위로부터 태어날 수밖에 없었고, 이 금지를 신성한 법으로 확립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약간은 궁색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459)
*p459 언어기원론 주석
“그래서 루소는 하나의 조건을 전제로 해서만 규약을 신성화한다. 그것은 보편화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인위적 수단들 가운데 인위적 수단이라 할지라고 자연에 일치하는 거의 자연적인 법칙으로 간주된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금지가 바로 같은 경우에 해당한다. 그것은 또한 최초의 유일한 규약에 속하고, 최초의 만장일치에 속한다. “사회계약론”은 법의 가능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만장일치로 “언제나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라고 말한다. 하나의 법이 법들의 기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461)
“따라서 사회/언어/역사/분절, 곧 대리보충성은 근친상간의 금지와 함께 태어난다. 이 금지는 자연과 문화 사이의 틈새이다. 이러한 진술은 루소의 텍스트에서 어머니를 명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의 자리를 보다 잘 보여 줄 뿐이다. 제도적 기호들의 시대, 즉 표상체(대리하는 것)와 피표상체(대리되는 것) 사이의 규약적 관계의 시기는 이러한 금지의 시대에 속한다.
이제 우리가 자연적인 여자(자연, 어머니, 혹은 말하자면 누이)가 욕망 속에서 , 다시 말해 사회적 정열 속에서 욕구를 넘어 대체되고 대리보충된 피표상체나 기의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여기서 유일한 피표상체, 즉 루소가 금지의 성스러움을 찬양하면서 기표를 통해 대체하기를 요구하는 유일한 기의를 갖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는 사물을 보여 줄 수 없는 불가능성이 있지만, 이 불가능성이 자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루소 자신이 말한다. 그것은 또한 문화의 많은 요소들 가운데 하나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화 자체의 요소이고, 정열/사회/언어의 선언되지 않은 기원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기의를 기표로 대체하고, 기표들을 다른 기표들로 대체하게 하는 최초의 대리보충성이고, 장차 낱말들과 사물들 사이의 사이에 관한 담론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 대리보충성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그것의 파생된 효과들 가운데 몇몇 예를 통해 다만 간접적으로 제시될 뿐이다. 그것 자체는 제시될 수도 명명될 수도 없고, 다만 손가락의 말없는 운동으로 지시될 뿐이다.
어머니, 자연, 근본적 기의로서의 존재, 이 셋과 맺는 관계의 전치. 이것이 물론 사회와 언어들의 기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후의 기원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가?“ (461-462)
“이러한 최초의 시작 부분에서 최초로 입문되는 것은 이미 변질되었고, 그리하며 기원에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회귀한다. 음성 언어는 다만 분절됨으로써만, 그리고 새로이 요구를 표현하기 위해 냉각됨으로써만 남방에서 이해된다... 언어/정열/사회는 북쪽에도 남쪽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양극점이 차례차례 서로를 대체하게 하는 대리보충성의 운동이다. 이 운동을 통해서 악센트는 분절 속에서 손상되고, 공간화되면서 지연된다. 지역적인 차이는 욕망과 쾌락 사이의 차연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은 다만 언어의 다양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적 분류의 기준일 뿐 아니라, 언어들의 기원이다. 루소는 이 점을 선언하지 않지만, 우리가 보았듯이 그것을 기술한다.” (464-4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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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음님의 댓글
희음
김혜원 선생님이 몸이 안 좋으셔서 오늘 참석을 못하는 대신 제게 발제문을 보내 주셨습니다.
세미나 멤버들에게 거듭 사과의 말씀을 전하시네요. 김혜원 선생님 몫까지 힘을 내서 알찬 세미나가 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