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후기 <발터 벤야민: 화재경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테제1-7번 +3
우주
/ 2017-09-13
/ 조회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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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발터 벤야민 : 화재 경보』를 통해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테제 1번부터 7번'까지를 살펴봤습니다.
우선, 뢰비의 빡빡한 연구에 감탄합니다. 이 책의 핵심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읽기임에도 벤야민의 다른 텍스트들과 동시대의 사람들의 텍스트들을 병기함으로써 치밀한 연구를 진행하여 벤야민의 시적이고 은유적인 사유를 논리의 영역으로 데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연구자들이 그러하듯 뢰비에게도 자신의 관점이 있습니다. 그 관점에 동의할 수 있는가, 동의할 수 없는가, 그렇다면 왜 그런 입장들을 가지는가는 공부를 하면서 스스로 끊임없이 사유해야 할 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뢰비는 유대교 신비주의자 숄렘의 텍스트나 성경을 많이 가져오면서 ‘메시아의 구원’이라는 테마에 집중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테제 1번에서 “사람들이 ‘역사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인형(유물론)이 ‘진정한 유물론’이 아니라면 벤야민의 사유 속 ‘진정한 유물론’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추적이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벤야민에게서 맑스주의자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맑스주의적 사유들을 찾아내기 위해 어떠한 면모들을 발견할 수 있는지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메시아의 구원’이라는 메타포로 벤야민의 사유를 이해하는 방식이 ‘맑스’적이지 않은가. 이 부분에는 이견이 있었습니다. 벤야민의 사유를 유대교적 메시아주의보다는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이해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입장과 유대교적 메시아주의와 맑스주의는 (원론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다는 입장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후자의 입장에 있었던 저는 벤야민의 사유가 메시아주의와 맑스주의의 중간쯤에 위치하기에 ‘원론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유대교는 아니지만 ‘기독교’적 메시아주의 안에서는 예수를 ‘혁명가’로 바라볼 수 있기에 ‘억압받은 자’들에 대한 관심이라는 측면에서는 ‘맑스’와 ‘예수’가 차이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근래 들어 ‘예수’가 바라 본 사회의 모습을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의 ‘공산주의’의 모델로 그리는 움직임은 있습니다. 아감벤이나 바디우의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들도 있기에 ‘예수’를 ‘혁명가’로 이해하는 것은 유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원론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자칫 ‘맑스주의’에서 맑스가 노동자의 입장에서 자본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연구, 역사 유물론적 사유와 그 안에서의 주체화의 문제를 지워버리는 위험이 있습니다.
테제 5번의 “이미지”에 대한 벤야민의 사유는 시간을 연속적으로 이해하지 않지 않습니다. 이를 ‘비의식적 시간’, ‘무의식적 시간’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정신분석학의 사유와도 흡사한 면모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불현듯” 등장했다 사라지는 이미지들 안에 “과거의 어떤 파편이 현재의 어떤 순간과 함께 형성하는 비판적 성좌를 발견하”려는 벤야민은 전통적인 역사가들의 태도와 맞서는 “역사적 유물론자의 능동적 개입을 강조”합니다. 억압당하는 자, 배제된 자, “문명, 진보, 근대성이라고 불리는 위엄 있고 웅장한 수레의 바퀴 아래 깔린 자”들의 일시적 이미지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런 벤야민의 사유들이 (테제 2번에서) ‘미래’가 아닌 ‘과거(회억)’에서 “희미한 메시아적 힘”을 찾는 시도로 연결되고 무엇보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로부터 기다려졌던 자로서의 우리가 이 암담한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메시아”가 되어 “자기-구원”을 이루는 방식은 어떠한 형태로 드러나야 하는가. 어떠한 실천이 필요한가가 지금의 고민이기도 합니다.)
테제 5번에서 출발한 벤야민의 ‘이미지’의 사유는 테제 6-7번에서 “타협주의 역사가”들(랑케와 쿨랑주)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랑케의 ‘실제’는 사실상 모든 시대의 승리자의 시각을 공고히 할 뿐입니다. 이런 태도는 역사주의를 승리자와 동일시하면서 생기는 태만입니다. 태만에 의해 멜랑콜리에 빠진 자는 아첨하는 신하로서의 운명에 복종함으로써 수레바퀴 아래 깔린 자들을 배반하는 동시에 그들의 목소리가 사라지도록 만듭니다.
그러나 ‘피지배자들’의 발언에 어떠한 윤리로 다가서야 하는가의 의문은 여전히 남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무엇인지, 그들은 하나의 표상으로 이름 붙여질 수 있는지, 오히려 갈등이나 반목하고 있지는 않은지 등등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가 사유해야 할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도 벤야민 세미나는 자기 언어로 벤야민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가득했습니다. 벤야민(혹은 벤야민의 사유)은 아스라이 빛나지만, ‘과거’로부터 오는 ‘목소리’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며 스스로 메시아가 되어 자기-구원에 이르려는 사람들이 ‘현재 시간’을 채우는 중입니다.
댓글목록
우주님의 댓글
우주가끔 집에 와서 세미나에서 제가 한 이야기를 반추해봅니다. 가끔은 그 뻘소리에 부끄러움이 엄습하기도 합니다. 오늘도 몇 마디의 뻘소리를 외쳤지만- 그런 '언어화'의 과정이 '사유'를 발전시키는 힘이 될 수는 있지 않은가 하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
희음님의 댓글
희음
그런 아무것도 아닌 흩날리는 뻘소리들, 그러나 숨은 빛으로 낮은 곳에서 반짝이고 있는 뻘소리들이 모여 우리 세미나의 '지금 시간'이 더 풍성하게 채워질 수 있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예수를 혁명가로 보는 시선, 그 때문에 그것이 맑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트 혁명과도 연결될 수 있다는 우주 님의 말씀이 흥미로웠습니다.
개인적으론 이번에 뢰비를 읽으면서,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 언급된 '과거로부터 기다려졌던 자들'이라는 말이 성좌처럼 빛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되어지던 메시아로부터의 구원, 미래를 바라보며 염원하는 그런 수동적 기다림과 벤야민의 적극적 기다림이 어떻게 구별되는지에 대한 해답 같은 걸 저 구절에서 보았거든요. 과거가 기다린 것이 바로 우리이며, 그런 점에서 우리가 과거의 억압받은 것들, 영원히 찬 묘지 아래에 묻힐 수도 있었던 것을 부활하게 하는 메시아라는 것이 그의 말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늘 지난 시간을 이리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정리해 주시는 우주 님께 특별한 애정과 감사를 전합니다.^^
우주님의 댓글
우주
저도 테제 5번과 테제 2번을 연결시키는 희음님의 생각에 감탄했습니다. ^^ 벤야민의 사유가 그렇게 흐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저도 동의합니다. ^^
누가 저에게 예수가 더 좋은가, 맑스가 더 좋은가 묻는다면 저는 대답을 못 할 것 같아요. ㅎㅎㅎ 예수는 저에게 더 이상 신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인간 예수는 무척 매력적이거든요. 맑스의 사유가 정답은 아니었지만 맑스에게서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듯이...
맑스에게 비어 있던 부분을 벤야민에게 발견할 수 있어서, 벤야민 공부가 힘들어도 즐겁네요. 앞으로도 어버버하고 뻘소리하며 계속 어려워하겠지만. ㅎㅎㅎ 저의 가장 큰 관심은 여전히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와 '어떻게 실천하며 살 것인가'기에 벤야민을 통해 '더더욱 나답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