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후기 <발터벤야민의 문예이론> -프란츠 카프카
토라진
/ 2017-09-04
/ 조회 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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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프란츠 카프카>에 대한 후기를 쓰기 시작했다. 소제목인 ‘빠촘킨’에 대한 내용만 한 페이지 반을 썼다. 이대로 가다가는 발제보다 후기가 더 길어질 것 같았다. 다시 읽고 문장을 읽기 쉽게 고쳐 봐도 재미가 없었다. 벤야민은 카프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전달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전달할 나만의 이야기 그물을 아직 다 짜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후기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이 텍스트가 나에게 준 어떤 감흥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카프카’와 ‘벤야민’이 전해준 어떤 전율 같은 것인데, 그것은 반복해서 읽을수록 더해갔다. 물감에 물을 잔뜩 섞고 그린 수채화가 다 마르길 기다렸다가, 다시 그 위에 옅은 색을 다시 덧칠하기를 반복할 때 서서히 드러나는 선명함 같은......그러나 결국 그들이 드러내 보인 것은 분명한 주제나 완결된 이야기로서의 선명함이 아니다. 색이 선명해지긴 했지만 무엇을 그렸는지는 알 수 없는 추상화 같다고 해야 할까? 암튼 나는 텍스트에 충실한 후기를 덮어두고 다시 무언가를 써보려 한다. 머릿 속을 떠다니는 성기고 거친 그물로, 아직 설익고 시린 눈으로 무언가를 끝까지 붙잡아보려는 안간힘으로 말이다.
카프카 안에서의 이야기, 또는 제스쳐
이번 벤야민의 텍스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카프카의 글쓰기 방식과 닮아 있다는 점이다.
카프카의 이야기들은 모호하거나 기이하다. 심지어 완결되지 않은 채로 끝나기도 한다. 벤야민은 이번 텍스트에서 이와 같은 카프카적인 글쓰기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우화와 사진 해설, 투고 기사, 민요 등 낯설고 기이해 보이는 이야기들을 끌고와 카프카의 이야기들에 접목시킨다. 그것은 마치 사람과 동물의 신체가 붙어 있거나 기형의 형태로 몸을 부풀리고 있는 듯 보인다. 그것은 카프카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이나 동물(반은 양이고 반은 고양이 등)과도 닮아 있다. 이는 때로는 유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는 바로 충만된 세계 전체가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정신은 그 위치와 존재 이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이 되어야만 하고 또 개별화되어야만 한다. 정신적인 것은, 그것이 여전히 어떤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한에는 유령이 된다. 이들 유령들은 개성이 있는 개체들이 되면 독자적 이름을 갖고 있고 또 존경하는 자의 이름과 특별한 결합을 하게 된다. 세계는 의심할 나위 없이 이들 유령들이 가득 차게 됨에 따라 더욱 과잉상태가 된다. 유령들의 무리는 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점점 더 많이 몰려든다......새로운 유령들이 끊임없이 기존의 옛 유령들에게 합세하게 되는데, 이 때 이들 유령은 독자적 이름을 가짐으로써 다른 유령들과 구별된다.(87)
이들 유령들은 보이지 않지만 독자적인 이름을 갖는다. 그것은 카프카의 작품 안의 동물 또는 기형의 인간들과 닮아있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로 불안해한다. 이 불안은 역사 이래의 모든 법을 거부했던 자가 감당해야 할 숙명적 죄책감 때문이다. (여기서의 역사는 벤야민식으로 말하자면 Vorwelt(前世)로 흔히 말하는 역사와는 다른, 신화적이며 원초적 상확 내지 신화적 역사라는 의미를 지닌다.)
벤야민은 보통의 질서에서 벗어나버린, 그러나 그 죄책감을 짐처럼 어깨에 떠받들어 등이 굽어 있는 ‘작은 곱추’를 카프카의 인물들에서 발견한다. 짐을 진다는 것은 잠자는 상태, 망각를 의미한다. 그 곱추는 메시아가 오면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곱추의 망각은 메시아에 의해 깨어나고 각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벤야민 자신이 화두로 삼고 있는 ‘메시아’에 대한 견해를 적극적으로 접목시키고 있는 부분이다. 그는 이런 ‘작은 곱추’라는 소제목의 마지막을 이런 문장으로 마무리한다.
비록 카프카가 기도를 드리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 그는 여전히 말르브랑쉬가 <영혼의 자연적인 기도>라고 일컬었던 것, 즉 주의력을 최고도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피조물들을, 마치 성인들이 그들의 기도 속에 그렇게 하듯이, 이러한 주의력 속에 포용하였던 것이다. (90)
벤야민이 카프카에게서 보았던 '기도 속에서와 같은 주의력'은 ‘공부’의 방식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다. 여기서 ‘공부’는 단호하고 광신적인 제스쳐이다. 이를 위해서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카프카에게 나타난 인물들이 하는 ‘공부’는 연구되기만 하고 더 이상 실행되지 않은 법에 대한 것이다. 벤야민은 노자를 끌어들이면서까지 적극적으로 이것을 해석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공부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부들은 무엇인가를 유용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無에 가까운 것이다. 다시 말해 道에 가까운 것이다. (92)
벤야민에게 있어서 카프카 작품에 드러난 ‘공부’의 방식은 이러한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無이자 道였으며, 정의로 나아가는 문이었다. 이러한 공부는 한발 한발 이해의 한계에 도달할 때 까지 밀고 나가는 몸짓 또는 제스쳐로 나타난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끝까지 바라보는 태도와 함께 드러난다는 점을 벤야민은 간파해낸다. 카프카가 단 한 번 발견한, 서사적인 느릿느릿한 보조와 일치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한 단편 <산초판사의 진실>의 다음 인용을 살펴보자.
차분한 바보이고 서투른 조수였던 선초 판사는 자기의 주인을 자기보다 먼저 떠나 보냈다. 부세팔로스는 그의 주위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았다. 단지 등에서 짐만 벗겨진다면 짐이 벗겨진 그 등이 사람의 등이나 말의 등이냐 하는 물음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끝까지 지켜보는 것’은 ‘갇힌 자’, ‘짐을 진 자’, 벤야민식으로 말하자면 ‘작은 곱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몸짓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지켜본다는 것이 관조적인 태도로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런 시선은 적극적으로 이야기 안으로 자신을 던져 넣는 방식임을 강조한다. 또한 그것은 카프카의 삶의 방식이자 운명을 대하는 그의 태도와도 일치한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 축에 속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해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한발 한발 자신을 밀고 나갔다.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이해의 한계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을 좋아했다.......카프카는 자기 자신을 위한 비유를 창작해 내는 보기 드물 정도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77)
결국 카프카는 자신 스스로가 곱추가 되길 자처했다. 그렇다면 이 작은 곱추가 끝까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또 다른 곱추들의 몸짓일 것이다. 산초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돈키호테에게 기사소설을 끊임없이 가져다주고, 돈키호테가 죽은 후에도 살아남는다. 벤야민은 이 점에 주목하며 '등에서 짐을 벗게 된다면?’이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짐을 벗게 되는, 벤야민 식으로 말하자면 메시아가 오는 순간을 우리는 과연 알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그저 무언가를 하지 않음으로써 하는, 그런 몸짓 또는 제스쳐만이 남게 되는 건 아닐까?
‘곱추-기형-죄-운명-한계’라는 지평선이 있다면 ‘집중-기도-각성-하지 않음으로써 하기-끝까지 지켜보며 살아남기’가 기다란 사다리가 지평선 위를 가르고 있다. 그 사다리를 타고 오르다가 땅으로 다시 떨어져 불구나 기형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죽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불구가 될지언정 끝까지 살아남는 것. 그것이 카프카 문학이 벤야민을 통해 내게 전한 전율의 실체인 듯하다. 성긴 그물과 마음을 긋는 감상들이 내게 또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지 모르겠다. 그저 살아남아 흔적을 반복하는 수밖에......그러다 보면 근사한 그림은 아니더라도, 분명한 색 하나는 드러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