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 발제 2017년 9월 5일
길모
/ 2017-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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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늦었습니다.
문자 언어의 회전언어는 하나의 구조이면서도 방향이 정해진 구조이다. 그러나 이는 보다 복잡하게 설명되어야 한다. 언어의 방향화는 탈방향화(탈기원화)이며, 여기에는 역사적 직선이나 부동의 도표 대신 언어의 회전이 있기 때문이다. 루소의 선언은 남방과 북방이라는 양극화의 자연적 대립을 강조하지만, 루소의 기술은 이 양극화가 자연/사실/실체적이 아니라 합리/구조/관계적임을 드러낸다. 또, 정열과 필요 욕구의 대립이 남과 북이라는 각각의 언어 내부에서 하나의 기준축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것은 기술과 선언 사이의 이러한 괴리이다.
루소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어떤 언어가 분출되는 때는 정열적 욕망이 물리적 필요욕구를 능가할 때이고, 대리보충에 운동을 부여하는 상상력이 일깨워질 때이다. 그러나 언어가 성립되자마자, 필요욕구/정열이라는 양극성 및 대리 보충적인 모든 구조가 각각의 언어 체계 내부에서 작동한다. 언어들은 순수한 정열과 다소 가깝지만 필요 욕구와의 관련성도 있다. 따라서 순수한 정열과의 가까움 정도에 따라 더 정열적인 언어와 더 필요 욕구적인 언어가 나뉘게 된다. 그런데 루소는 이러한 기술에 멈추지 않고 우선적으로 정열을 표현하는 언어, 우선적으로 필요 욕구를 표현하는 언어를 선언해버린다. 이러한 선언은 기능적인 기원을 자연적인 기원으로 간주하려는 욕망에서 온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 기원의 필연성을 아무리 선언한다고 할지라도, 양극적 차이는 외적인 두 계열을 엄밀하게 구분하는 것을 막는다. 이처럼 루소의 텍스트는 기술과 선언 사이에서 이동하는데 사실 이 둘(기술과 선언) 자체가 자연적이고 고정된 지표가 아니라 구조적인 중심축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언어들의 기원과 언어들의 차이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즉 형태와 장소의 문제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루소가 언어의 자연적 원인으로 되돌아가는 까닭은 언어 이전의 사회적 제도는 없기 때문이다. 언어는 문화 요소가 아닌 제도 일반의 요소이기에 언어의 원인은 문화 이전, 즉 자연적인 원인일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루소에게는 언어의 본질은 정열이라고 할지라도, 언어의 원인은 자연(필요욕구)에 속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루소의 대리보충성의 두 가지 기원 및 장소의 문제를 다시 설명 할 수 있다. 필요욕구는 인간 정열의 기원이 된다. 대리보충성은 필요욕구와 정열 간의 구조적 규칙에 의거하며, 장소는 필요 욕구와 대리보충성을 배분하는 자연의 경제를 갖는다. 언어의 자연적 원인으로의 필요 욕구가 정열/대리보충성과 맺는 관계는 결국 이미 필요 욕구의 영역 자체가 복잡하고, 계층화되어 있고, 차별화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처럼 루소는 필요 욕구의 차원에서 이미 자연적 질서의 분절과 전도를 말하고 있다. 게다가 자연적 질서의 구조를 담당하는 자연적 장소에 대한 루소의 설명 또한 정태적 설명이라고 보기 어렵다. <언어기원론>과 <에밀>에서의 자연적 장소에 대한 루소의 주장은 마치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다른 주장들은 두 유럽이라는 다른 장소 사이에서 순환하면서 나름의 일관성을 갖추게 된다. 데리다가 이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루소의 모든 담론의 조건들이 이런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루소가 보기에 어떤 특정 문화의 빗장 풀기, 모든 다른 문화 일반에의 개방, 상상력을 통한 변화의 기동성과 가능성 같은 것들이 없다면 차이도 불가능해진다. 차이는 오직 어떤 특정 중간지대, 차이가 나는 것들 사이에서만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이에서의 차이’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 다른 차이로 이해되거나, 비차이(차이없음)에의 접근으로 이해 될 수 있다. 루소는 후자를 택하며, 특정 장소(프랑스)를 개방성/차이제거/특혜가 부여된 관찰 지역으로 삼는다. 이 관찰지역에서 문화의 자연적 원인들은 보다 잘 이해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핵심은 전도와 타락은 결국 대체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기원의 정상적 순서(남방) 속에서 음성 언어의 최초의 창안은 정열에서 비롯되며, 최초의 필요욕구가 가져온 자연적 결과는 인간을 이간시키는 것일뿐인데 이는 절대적으로 일반적인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기원의 이와 같은 정상적 순서가 북방에서는 전복된다. 루소는 북방을 죽음이라는 또 다른 기원으로 간주하고, 어떻게 필요 욕구가 사회의 기원이 되는지를 기술한다. 북방에서 정열은 노동에 의해 억압되며 정열은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정열을 가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분절(언어에 있어서의 차이)는 욕망이나 악센트의 에너지를 희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해 욕망을 이동시키고 억압하는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분절은 힘의 약화를 나타내는 기호가 아니라, 반대로 대립적인 힘들의 갈등과 힘에서의 차이를 나타낸다. 필요 욕구의 힘, 그것의 고유한 경제, 즉 노동을 필요하게 만드는 경제는 분명 욕망의 힘에 대항하여 작업을 하고, 이 힘을 억압하며, 분절 속에 그것의 노래를 꺾어버린다.
힘들의 이러한 갈등은 하나의 경제에 부합하는데, 이 경제는 더 이상 단순히 필요 욕구의 경제가 아니라 욕망과 필요 욕구 사이의 힘의 관계를 나타내는 체계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명의 힘이나 죽음의 힘으로 간주할 수 있는 두 개의 힘이 대립한다. 그런데 루소에 의하면 문자 언어는 북쪽(죽음)에 있다. 언어는 분절되면 될수록 분절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고, 엄밀성과 활력을 얻으며, 문자 언어에 더 적합하고, 더욱 문자 언어를 요구한다. 이것이 언어기원론의 중심 주제이다. 역사적 진보는, 즉 대리보충성의 이상한 표기에 따라 역사와 결합된 타락은 북쪽과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다.
없앤다는 것은 대리 보충물을 창출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대리 보충은 불완전하다. 악센트 기호는 언어와 무관한 필경사의 창안물로, 필경사는 원본의 복원을 개선하기 위해 대리보충적인 기호들을 덧붙이고자 하는 유혹을 언제나 받는다. 루소가 생각하는 훌륭한 필경사는 대리 보충적인 기호의 유혹에 저항하는 자이다. 루소는 이런 식으로 문자언어를 불신하며, 문자 언어의 일의성, 명료성, 정확성의 모든 수단을 철저히 파헤치고자 한다. 따라서 악센트와 악센트 부호들 사이의 차이는 질과 양, 힘과 공간적 간격처럼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를 분리시킨다. 루소에게 악센트 부호는 음성 언어를 재현하지 못하며, 모음이나 목소리는 언어의 이중 분절에 불과하다. 따라서 갈등은 악센트 법의 힘과 분절의 힘 사이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분절이라는 개념에 유념해야 한다. 원문자에 대한 규정은 이미 분절에 있었으며, 이 분절은 소쉬르에게서 자연적인 것으로 나오며 음성언어의 조건이다. 그리고 루소에게서도 이 분절에 대한 고려가 반복되고 있다. 루소는 문자 언어화가 기원에서 갑자기 도래한다고 말하고 싶어 하며, 언어의 문자 언어화는 언어의 언어화이고 분절과 문자언어는 언어의 기원 ‘후에’ 생긴 병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루소는 자신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 즉 분절과 문자언어의 공간이 언어의 기원‘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기술한다.
3. 분절: 앞에서 언급한 모든 것은 분절이라는 개념의 조작 속에 나타난다. 우리는 분절을 이해하기 위해 루소에서의 자연의 개념을 다루어야 한다.
‘막대기의 이 움직임’
언어의 기원과 관련해여 자연의 개념을 다루기 위해 루소가 도입하는 세가지 명제에서 출발해보자.
첫 번째 명제. “언어 능력은 인간과 다른 동물들을 구분시켜 준다.” 언어는 ‘최초의 사회적 제도’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적이 아니다. 그러나 언어는 인간에게는 본질에 속하기에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루소는 개별적인 언어와 말을 구분한다. 음성 언어 자체는 최초의 사회적 제도이지만, 그 형태는 자연적 원인에 의해 나누어진다. 1) (개별적 언어와 구분되는) 말은 일반적인 자연적 원인(필요 욕구와 정열의 관계)만을 지닌다. 2) 그러나 언어의 다양성은 자연적 이유들(물리, 지리, 기후)에 의해 분할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과 개별 언어의 분절이 일어난다.
두 번째 명제: “한 인간이 다른 사람에 의해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는 유사한 존재로 인정되지마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그와 소통하고 싶은 욕망 혹은 필요욕구가 이 인간으로 하여금 소통수단들을 찾게 만들었다.” 루소는 최초의 도약의 순간에서 언어의 기원을 재포착하려고 시도하며, 이로 인해 자연의 순수상태 및 시원적 분산에서 언어들의 탄생에 대한 설명 방도를 찾아내는 일에 마주하게 된다. 오두막 시대나 원초 시기는 자연의 순수상태에 가깝다고 가정되지만 여기에는 어떤 격변이 있다. 그러나 언어가 탄생하는 순간에는 전제 할 수 있는 사회적인 무언가는 없으므로, 여전히 언어의 탄생은 자연적인 원인 안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세 번째 명제: “그리하여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감각적인 기호들의 제도가 나오게 된다. 언어의 창안자들은 이런 추론을 하지 않았지만, 본능이 그들에게 그와 같은 추론의 결과를 시사해 주었다.” 루소가 주목하는 자연적 원인은 자연적 성향의 도구인 감각이다. 루소는 타자의 감각에 작용하기 위한 두 가지 수단인 움직임과 목소리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 감각의 분산은 언어의 자연적 조건을 결정짓는다. 자연적 조건, 즉 (감각의) 시원적 분산이 언어의 환경과 본질을 지속적으로 특징 짓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언어가 공간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 간격이 생겨야 한다는 것은 그것의 기원을 나타내는 표시이지만 분산은 과거나 언어 이전의 상황이 아닌, 그저 공간이다.
각각의 명제를 통한다고 해도 루소의 자연의 개념은 여전히 명료하지 않은데, 루소의 의도를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연적인 것은 우선 가치화되고 자격을 박탈당한다. 시원적인 것은 우월한 것 속에 붙들려 있는 열등한 것이다. 몸짓 언어와 목소리 언어, 시각과 청각은 똑같이 자연적이지만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자연적이다. 루소는 몸짓 언어에 대한 찬양으로 논의를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몸짓보다 말을 위에 위치시킨다. 그러나 제3장 2. 모방 전체의 결론에서 나타나듯이, 루소의 모순은 외양에 불과하다. 자연의 직접성은 기원이자 동시에 종말이기에, 또 자연의 개념이 분극적 구조의 개념이기에 담론의 모순들은 자연 개념의 구조를 통해 조정되고, 필연적이 되지만 해결한다. 어떤 자연법의 모든 결정 이전에, 담론을 효율적으로 구속하는 자연이란 개념의 법이 있는 것이다.
이는 루소가 몸짓 언어를 찬양하면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분명하게 나타난다. 루소는 사랑이라는 정열이 노래로 된 말의 기원이 된다고 말하지만, 그림을 사랑의 가장 훌륭한 통역자로 만든다. <언어기원론>은 이런 방식으로 모든 모순을 해결하는데, 모순을 두 양극으로 요약하면서, 무언적 기호에 대한 찬양으로 시작해서 비난으로 결론을 낸다. 이러한 구도는 현전화와 관련되어 있다.
무언의 기호가 직접성 속에서 표현될 때, 표현하는 것과 표현되는 자는 고유하게 현전한다. 반면 간접성 속에서 표현할 때는 기호에 대해 예속적이 되고 현전의 고유성 대신 나타나는 것은 의미작용의 끝없는 운동이 된다. 루소는 말이 없는 기호의 최초의 순간으로, 분절과 차이 이전의 필요 욕구를 넘어서지만 이에 선행하는 정열이 표현되는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언어는 있다. 막대기의 움직임의 예는 루소가 신체 밖으로 떨어져나가지 않은 기호, 직접적인 기호로 간주하는 몸짓 언어의 성격을 보여준다. 막대기로 연인의 그림자를 그리는 행위는 대상과 아주 가까이에 있고, 아주 작은 차이를 지닌다. 이 작은 차이를 기호의 기원이며 직접성과의 단절로 볼 수 있다. 이 정열의 몸짓은 시원의 순수성 속에서 고찰됨으로써 부재와 죽음을 간직한 말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몸짓이 말에 선행하지 않을 때에 몸짓은 말을 대리 보충한다. 상호적이고 끊임없는 대리 보충성이 언어의 질서이며, <언어기원론>이 선언하지 않고 기술하는 언어의 기원이다. <언어기원론>과 <인간 불평등 기원론> 모두에서 몸짓은 몸짓의 대체물인 말에 대리보충으로 첨가된다. 몸짓은 말보다 규약에 덜 종속되지만, 거리나 공간적 간격의 환경을 전제한다면 효율적이지 못하다. 이때는 말이 몸짓을 대리보충한다. 이처럼 언어에서 모든 것은 대체물이고, 대체물이라는 이 개념은 자연과 문화의 대립에 선행한다.
여기에서 말과 가시적인 것(몸짓 언어)의 대립을 다시 살펴볼 수 있다. 말이 현전의 부재(죽음)를 함축할 때, 보다 살아있는 몸짓 언어는 말의 부재를 대리보충한다. 결국 말에서 몸짓으로의 회귀는 언어의 창안과 정열의 탄생 이후에 가능해지며, 가장 자연적인 것으로의 대리 보충적 회귀이지 언어의 기원으로의 회귀는 아니다. 말없는 기호의 가치는 말에서 간결성과 은밀함의 가치이기에 말의 경제를 이룬다.
그런데 루소에게서 언어의 정열에 찬 기원은 음성언어보다 문자언어에 가까운데, 다른 곳에서는 필요 욕구를 표현해왔던 몸짓이 문자언어에서만큼은 정열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루소의 의도의 통일성, 구속의 필요성에 부합한다.
1)의도의 통일성: 루소는 직접적인 현전의 욕망을 언급하는데, 이 현전이 목소리에 의해 보다 잘 표현되면 말이 정열의 언어가 되고, 반면 몸짓 및 시선에 의해 잘 표현될 경우 가장 원시적인 문자, 상형문자가 정열의 언어가 된다.
2)이러한 문자개념은 루소를 훨씬 넘어선다. 개념성 속에서 해결되는 불통일의 장소, 차연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루소도 전체 개념체계가 무너지지 않는 한 대리보충적인 차연을 특별하게 생각하는데, 이 차연은 정열과 필요욕구의 이상한 통일성을 억누른다. 루소는 문자언어를 음성 언어의 정념적 기원 이후 부수적으로 오는 대리보충적인 것으로 보려 한다. 그러나 문자는 음성 언어의 기원 이전에 정열을 표현하고 필요 욕구를 말하고 있다. 즉 에크리튀르는 음성 언어로 말하기 직전에 존재했던 것이다. 웅변이 이미지에 의존하는 것은 이를 말해준다. 문자로 쓰는 것의 이점은 이질적이거나 또는 그렇게 선언한 가치들의 통일성에 있는데, 루소는 직접적인 현전을 고집했기에 이를 선언 할 수 없었고, 기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루소가 음성언어만이 정열을 표현하거나 자극한다고 했을 때, 이는 소리의 내재적 침투성이 가지는 현전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컨대, 나의 수동성과 정열은 청각기관이 벗어날 수 없는 악센트들에 완전히 내맡겨 져 있다. 그러나 동시에 목소리 속에서 대상의 현전은 이미 사라진다. 대상-사물이 사라짐으로써 목소리는 이 사물에 소리나는 기호를 대체한다. 이것이 현상을 내재화하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는 시원적인 공동작용과 공감각을 전제하지만 동시에 허구를 음성언어의 기원 자체에서 설정하는 것을 전제하기도 한다. 또한 음성언어에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대상의 현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음성적 기호이다.
그리하여 음성언어의 문제와 관련해, 루소는 말이 없는 사회에 대한 향수를 갖게 된다. 말을 하지 않고 몸짓 언어만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필요욕구의 사회, 사회 이전의 사회에 대한 향수 말이다. 이 맥락에서 음성언어의 도래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말이 없는 사회를 주장하는 루소의 맥락에서는 그 어떤 것도 음성언어를 필연적으로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추가로, 순수한 필요욕구의 언어가 동물 언어와 구분되는 기준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정은 더욱 복잡해진다. 결국 루소는 동물언어와 인간언어의 결정적인 차별점을 드러낸다. 차이는 어떠한 기관/감각에도 기인하지 않는다. 단지 동물언어(동물성 일반)은 고정성-상징적 무능력-비대리 보충성의 생생한 신화를 나타낸다. 대리보충성의 유희가 아직 개시되지 않은 삶, 차연도 분절도 없는 삶이 바로 동물의 삶이다. 반면 언어들의 진정한 ‘기원’ 혹은 비기원은 한 기관을 다른 하나의 기관에 대체할 수 있는 힘이고, 공간과 시간, 시각과 목소리, 손과 정신을 분절할 수 있는 힘이며, 대리보충성의 그 능력이다. 즉, 자연과 규약의 분절로서, 자연과 자연의 모든 타자들의 분절로서 분절 일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