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그라마톨로지』 9주차 발제문 및 후기
영수
/ 2017-09-05
/ 조회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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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그라마톨로지』 읽기 9주차 발제와 후기를 맡은 영수입니다.
발제문과 후기가 늦게 올리게 되었습니다.
발제문은 크게 첨가된 것은 없지만, 발제 당시 읽었던 글을 한글로 더 다듬었고 오타를 고쳤습니다.
9주차의 『그라마톨로지』(제 3장)부터 데리다는 루소 『언어기원론』의 생성과 구조라는 제목으로, 특히 1부에서는
『언어기원론』의 위상에 대해 알아봅니다.
우리는 먼저 『그라마톨로지』의 글이 각각의 논문 모음이라는 것-소쉬르, 레비스트로스, 루소-에 주목해야 합니다.
데리다의 『입장들』 인터뷰에 의하면 루소에 관한 『그라마톨로지』의 후반부는 『글쓰기와 차이』의 논문들이 쓰여진 이후에
작성된 것이라고 합니다. 데리다적인 해체구성(deconstruction)의 읽기가 정점에 이른 시기에 쓰여진 논문인 것입니다.
데리다는 루소의 생전에 출간되지 않은, 그리고 가장 사소하고 주변적인(margin) 책을 가지고 와서
루소에 대한 프랑스의 대가들의 전통적인 독해들에 대해 반박하는 논문을 작성했습니다.
이 3장 1부에서는 먼저 2장 후반부의 핵심적인 논의인 "이 위험한 대리보충..."(과 이 책)의 핵심적인 논의인
대리보충, 목소리의 위상, 자기감응(auto-affection)에 대해서 정리해 줍니다.
루소는 목소리-직접성-자연-현전-자유, 글쓰기-매개성-문화-외재적-예속의 대립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존의 루소의 대가들(쟝 스타로뱅스키)이 가진 전통적인 견해는 『언어기원론』이 『인간불평등기원론』이나 『에밀』에 비해
앞선 작품이면서 사상적 완숙기로 가기 전의 초기작이라고 결론내립니다.
『언어기원론』의 9장 <남부지방 언어들의 형성>과 『인간불평등기원론』이 동일한 관심사를 다루고 있고
주장도 양립하지 않는다는 논증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데리다는 바로 그 지점을 파고 들어가면서-해체구성하면서(deconstruct)- 다음과 같이 논의를 전개시킵니다.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연민을 성찰의 행위에 앞서는 정서, 자연적 미덕으로 간주한다면,
『언어기원론』에서는 판단력이 연민을 사전에 각성해야 한다고 본다.
『언어기원론』이 체계의 면에서, 그리고 역사적으로 『인간불평등기원론』보다 앞서는지 연민에 대해 부여하는 위상을
검토하면 나타나게 된다."
이후에 데리다는 루소가 제기한 연민과 상상력에 대해서 논의를 흥미진진하게 전개해 나갑니다.
제가 발제한 3장 1부에서는 평이하게 연민의 내용적인 측면에 대해서 소개를 하기 때문에
논의를 따라가는 것이 크게 어렵지는 않으며, 연민과 상상력이라는 주제가 현대에 다시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데리다의 선구적인 논의의 중요성에-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967년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핵심적인 것은 인간에게는 동물과 다르게 연민의 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루소가 연민을 부각시키는 것은 앞서 홉스가 전개한 "만인은 만인의 적"이라는 정치철학적 논의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서입니다.
루소는 인간이 선의 개념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악한 것은 아니며,
인간은 호전적인 것이 아니라 공포에 질려있는 존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동물이 느끼지 못하는 연민을 느끼는데, 그것은 인간만이 상상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상력을 통해 인간은 타자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게 되고 공동체를 만들 수 있으며
자유를 얻게 되며 완성 가능성(perfectability)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데리다가 루소에게서 부각시킨 연민과 상상력에 대한 논의는 지금 읽어도 흥미로운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이니 루소와 데리다에게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 부분을 따로 읽어나가도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