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그라마톨로지를 위하여> 11주차 세미나 후기 - 길모 +1
길모
/ 2017-09-07
/ 조회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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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와 루소 사이의 분절
3장 <인간기원론의 생성과 구조>에 접어들면서 독해가 더욱더 어려워지고 있다. 데리다의 난해한 구성과 문체에 번역의 부족함이 더해지니 텍스트를 이해하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런 어려움에 한가지의 더 어려움이 더해졌는데, 왜냐하면 3장부터 데리다가 본격적으로 루소와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세미나 이전까지, 나의 루소에 대한 인식은 매우 명확했다. 자신의 이론의 정합성조차 확보하지 못하는 반쪽짜리 사상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천재성은 가지고 있지만 그 영감에 합당성을 부여하지 못하는 선동가. 그런 루소의 텍스트를 분석하는 데리다의 텍스트를 분석하는 일은 달갑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분명히 데리다는 취향의 호오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나에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세미나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와 데리다의 만남을 다시 생각하는 일은 필요하다. 내가 가지는 가장 큰 의문은, 왜 하필이면 데리다는 루소를 ‘쓰고 있는가’이다. 왜 하필 루소인가? 어쩌면 이는 데리다의 텍스트와 무관한 방식으로 해체론에 접근하려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데리다가 원하지 않는 질문이리라. 그리고 데리다가 루소를 쓰는 까닭은 나름의 충분한 설명을 가지고 있다. 진정으로 루소가 현전을 고집하면서도 끝끝내 분절의 힘을 놓지 않기 때문이라는 정합적인 설명이 이미 있다. 이를 받아들일 경우, 루소야말로 언어의 원종합으로서의 그라마톨로지에 적합한 사상가, 루소의 당대에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던 그라마톨로지의 공간을 열어놓았으나, 기존의 현전의 공간에 집착했기에 혼란을 겪었던 사상가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어느정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데리다가 왜 하필 루소를 쓰고 있는지를 물어 보고 싶다. 이 질문은 데리다의 텍스트에 대한 태도와 차연의 도입 사이의 절합관계를 동시에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차연은 데리다 자신이 밝히듯이 이접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루소의 철학 전반과 자신의 해체론을 이접하고 있다. 그 사이의 차연은 매우 미묘하다. 외견상 루소는 자기 취향에 근거한 근본 결론을 세워놓고 거기에서부터 어떻게든 근거를 쌓아나간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근거를 쌓는 중간 중간 계속해서 심각한 모순이 발생한다. 그런데 루소는 그 모순을 끝까지 확장시켜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의도에 맞는 결과물을 내어놓지만 그 결과물은 비정합적인 선언으로 가득 차있다. 반면 데리다는 그런 루소의 의도와 루소가 확장하면서 드러내는 기술을 구분하면서 후자를 정합적으로 이해 할 수 있게 만든다.
데리다 없는 루소, 혹은 데리다 이후의 루소를 생각해본다. 데리다라는 탁월한 독해가 없이 루소의 언어기원론에서 과연 그라마톨로지가 성립할까? 내가 위에서 데리다와 루소의 만남을 명확하게 이접이라고 표현하는 까닭이다. 데리다는 정말 대단한 사상가이지만, 내 자신이 이런 방식을 모든 텍스트에 적용해서 독해를 해야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즉, 데리다의 독해법이 과연 이론의 독해법이 될 수 있을지 확신 할 수 없다. 분명히 데리다 자신의 철학은 이론이 될 수 있지만, 그의 독해법 자체가 이론의 독해법이 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인 것이다.
모순덩어리의 발상과 최고의 지성이 마구잡이로 혼합되어 있는 글을 쓴 작가가 루소이다. 이러한 구성 자체가 데리다가 읽어낸 루소의 사상, 분절의 사상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세계의 모든 모순적 텍스트들은 그라마톨로지를 예고 할 수 있다. 그들과 루소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루소 본인에게 그 역량이 있는 것일까? 오히려 데리다라는 독해자의 개입이 그 차이를 지시하지 않을까? 문제는, <그라마톨로지를 위하여>라는 저서를 이런 방식으로 읽어낼 경우, 이접의 논리에 대해 재고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 경우, 서로 다른 것들을 엮는 해체론적 개입이 무작위로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데리다는 텍스트 자체에 대한 내재적 독해를 강조하기에 루소와의 만남만이 이 이접이 구체적으로 가능했던 유일한 통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라마톨로지라는 주제를 위해 루소 텍스트 내부를 독해해야 하는 필연이, 데리다의 개입 없는 선언과 데리다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기술 사이의 분절만으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해당 텍스트에 대해 내재적 독해에 매달려서 기술을 찾아내야 하는 합당함이 곧바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우리의 세미나가 막바지에 이른 지금까지도 내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은, 과연 무엇이 ‘그 텍스트의 내부’인가이다. 선언은 분명히 내재적인 것으로 간주 할 만하다. 그러나 데리다가 기술을 고려하는 순간, 이는 데리다 없이 불가능했거나, 혹은 차연 자체가 무작위적인 것으로 열려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내가 현시점까지 생각하는 것은, 데리다 없는 <언어기원론>은 분절의 사상에 충분히 접근하지 못한다는 쪽이며 이런 입장을 취할 경우 위에서 가졌던 의문들의 대부분이 해소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여전히 문제가 되는 지점은, 과연 이 상황이 데리다 자신이 텍스트 내부에 머물러있음을 의미하고 있느냐는 점이다.데리다는 우리에게 철저하게 텍스트 내부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본인은 처음부터 이미 텍스트 외부와 내부의 경계에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아직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 어렵다. 맨 처음에 제시했던 대로(그리고 세미나에 참여하는 많은 분들과 마찬가지로...) 독해 자체에 버거움을 느끼고 있기에,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가 데리다에 대한 오독이나 몰이해의 산물일수도 있다. 세미나가 마무리되는 시점에는 보다 나아간 문제의식, 혹은 오독이나 몰이해를 인정한 이후의 다른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 자신만의 문체, 자신만의 사상을 갖추지 못한 얼치기인지라 하나의 텍스트를 접할 때마다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오역과 비문 + 데리다 자신의 난해함으로 가득 찬 텍스트를 읽은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못해서 후기마저 어지러운 듯하다. 읽는 이에게 부당한 너그러움을 부탁하며 후기를 마친다. 후기의 마지막에 와서 이러한 부탁을 하게 되는 역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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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님의 댓글
뉴미길모~ 후기 잘 읽었어요 :-) '데리다가 철저하게 텍스트 내부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 정말 그런가요? 데리다는 '문제'(여기서는 그라마톨로지?)를 제시함으로써 닫힌 텍스트를 열어놓으려고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에요. 그 '문제'는 데리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 찾아내야 할 문제일거 같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