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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3장 사유의 이미지 (4절~6절) 발제문(0908) +1
개구리 / 2017-09-08 / 조회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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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사유의 이미지 (4절 ~ 6절)

4절 다섯 번째 공준: ‘부정적인 것’으로서의 오류

부정적인 것의 공준 혹은 오류의 공준.(여기서 오류는 사유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잘못된 모든 것을 동시에 표현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언제나 외적인 메커니즘들의 산물이다.)
  독단적 이미지는 단지 오류만을 사유의 재난으로 인정하고 다른 모든 재난을 오류의 형태로 환원한다. 즉 오류는 사유에 유일하게 속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제시된다.  오류는 그 자체가 공통감의 형식을 증언한다. 실수한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인식능력들 간의 협력의 관점에서 일어 날 수 있다. 실수는 한 인식능력의 대상이 다른 인식능력의 대상과 혼동 되면서 일어난다. 오류는 그 스스로 어떠한 형상도 지니지 않으면서, 거짓에 참의 형상을 부여하는 것이고, 그런 한에서 ‘진리’에 충성을 서약하고 있다. 오류는 감각 작용들을 넘어서는 공통감의 초월성과 모든 인식능력들을 넘어서는 어떤 영혼의 초월성을 함축하는 것이고, 이 인식능력들은 이 영혼에 의해 같음의 형식 안에서 협력하도록 규정된다. 사실 나는 지각하거나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두 사태를 혼동할 수 없다 해도, 내가 지각하는 사태와 내가 개념적으로 파악하거나 회상하는 사태가 서로 혼동되는 것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오류는 언제나 때 묻지 않고 청렴한 공통감의 형식 아래에서 양식이 겪게 되는 일종의 실패이다.
  독단적 이미지는 광기, 어리석음, 짓궂음이 오류로 환원되지 않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도 독단적 이미지에 대해서는 오로지 어떤 사실들밖에 없다. 어리석음, 짓궂음, 광기는 외적 인과성에 따르는 사실들로 간주되고, 이 사실들을 통해 공명정대한 사유를 탈선시킬 수 있는 외부적인 힘들 자체가 유희 관계에 놓인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이 힘들이 사유에 미치는 효과만이 오류가 되고, 이 오류는 외적 인과성들에서 비롯되는 효과들을 권리상 모두 수용한다고 간주된다. 그러므로 어리석음, 짓궂음, 광기를 오류라는 유일한 형태로 환원하는 것은 권리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어리석음의 문제
  비겁함, 잔혹함, 비천함, 어리석음 등은 단순히 육체적 역량들이나 개인적, 사회적 성격상의 사실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본연의 사유 자체 속에 있는 구조들이다. 어리석음을 초월론적 문제로 승격시키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사유의 공준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오류가 아니라) 어리석음은 어떻게 가능한가? 를 물어야한다.
  어리석음이 가능한 것은 사유와 개체화를 묶어주는 연계성 덕분이다. 어리석음은 바탕도 개체도 아니지만, 그 둘을 묶는 관계이다. 이 관계 속에서 바탕은 개체화를 통해 상승하게 되지만, 개체화는 바탕에 형상을 부여하지 못한다. 모든 규정들은 잔혹하고 사악해진다. 오로지 자신을 응시하고 창조하는 사유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이런 규정들은, 마치 허물이 벗겨지듯 자신들의 생생한 형상과 분리되고, 그런 상태로 우울한 바탕 위에 떠다니고 있다. 이 수동적인 바탕 위에서는 모든 것이 폭력이 된다. 광기가 솟아오르는 곳은 개체가 이 자유로운 바탕에 투영되는 지점, 그 결과 어리석음이 어리석음에, 잔혹성이 잔혹성에 잇달아 투영되고, 마침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그들의 정신 속에서는 어떤 인식능력, 어리석음을 보고 더 이상 그 것을 참으려 하지 않는 어떤 가련한 인식능력이 자라났다…‥” 이것은 인식능력이 정신철학에 활력을 줄 때, 다시 말해 여타의 모든 인식능력들을 초월적 실행으로 유도해가고, 이 실행을 통해 개체, 바탕, 사유의 삼자 사이에 폭력적인 화해가 가능해질 때이다. 그리하여 강도적인 개체화 요인들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하여 초월적 감성의 최고 요소, 즉 감각되어야 할 것을 구성하기에 이른다. 또 사유 안에서 바탕은 한 인식능력에서 다른 인식능력으로 자리를 옮기지만, 이때 바탕은 언제나 사유되지 않는 것이자 사유하지 않는 것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사유되지 않는 바로 이것은 필연적인 경험적 형식이 되어버렸고, 균열된 나 안에서 사유는 마침내 이 형식을 통해 오로지 사유밖에 될 수 없는 초월적 요소(“우리는 아직 사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혹은 “어리석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를 사유하게 된다.

 

5절 여섯 번째 공준: 지칭의 특권
논리적 기능의 공준 혹은 명제의 공준.(지칭은 진리의 장소로 간주되고, 의미는 단지 명제의 중성화된 분신이나 무한정한 이분화에 불과하다.)
  보통 의미는 참의 조건으로 정의 된다. 하지만 조건은 조건화 대상보다 훨씬 넓은 외연을 지닌다고 가정되므로, 의미는 오류까지 가능케 하지 않고서는 결코 진리를 근거짓지 못한다. 그러므로 거짓 명제도 의미를 지닌 명제이다. 무-의미는 참도 거짓도 될 수 없는 것의 특징일 것이다. 하나의 명제에는 두 차원이 있다. 명제가 어떤 이념적인 사태를 언표하고 표현하는 표현의 차원과, 명제가 언표 되거나 표현된 것이 적용되는 대상을 지시하고 지칭하는 지칭의 차원이다. 전자는 의미의 차원, 후자는 참과 거짓의 차원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의미는 자신이 근거짓는 것에 무관심하지 않고서는 명제의 진리를 근거짓지 못할 것이다. “진리와 거짓의 물음은 명사와 언표들이 지시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지, 그것들이 표현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러셀의 말처럼, 참과 거짓은 자신들에게 지정된 조건이나 덧붙여진 새로운 가치와는 독립해서 예전 상태로 계존 현존한다고 가정된다.

 

의미와 명제
  의미는 명제에 의해 표현된 것이다. 표현되는 것은 지칭되는 대상으로, 표현하는 자의 체험 상태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여기서 의미(sens)와 의미 작용(signification)을 구별해야한다. 의미작용이 가리키는 것은 개념이자 이 개념이 재현의 장(場)속에서 조건화되어 있는 대상들과 관계하는 방식이다. 반면 의미는 재현 이하의 규정들 안에서 개봉되는 이념과 같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말하는 것의 의미를 말할 수 없다. 의미는 진정 말해져야 할 것이고, 경험적 사용 안에서는 말해질 수 없는 것, 단지 초월적 사용 안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의미가 동시에 말해지는 단어는 단 하나뿐이다. 아브락시스, 스나크, 블라투리 같은 무의한 단어. 의미가 인식능력들의 경험적 사용에 대해서는 필연적으로 무-의미이다. 무-의미의 메커니즘은 의미의 최고 목적이고, 이는 어리석음의 메커니즘이 사유의 최고 목적인 것과 같다. 만일 우리가 말하는 것의 의미를 우리 스스로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의미를 어떤 다른 명제에 의해 지정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번째 명제도 역시 자신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이 명제의 의미는 또 다른 명제에 의해 지칭되며, 이런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의식의 모든 명제는 무의식, 순수사유의 무의식을 함축하고, 이 무의식은 무한 퇴행이 일어나는 의미의 권역을 구성한다.

 

의미의 역설들
  의미의 첫 번째 역설은 증식하는 이중화의 역설이다. 하나의 ‘이름’이 표현하는 것은 그 이름을 이중화하는 다른 하나의 이름에 의해 지칭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중성화하는 이분화의 역설은 언어의 본질적인 역설이다. 이것은 명제를 보류 상태에 빠뜨리고 이념적 내용이나 내재적 소여만을 간직한 분신을 끌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을 만들어 놓는다. 명제의 분신은 명제 자체와 구별될 뿐 아니라 그 명제를 정식화하는 자와 구별되고, 또 그 명제가 취급하는 대상과도 구별된다. 이것이 명제의 복합 테마이다. 이 복합체는 이념적 사건이며 객체적 사태이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로 실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명제에서 분신을 이끌어낼 때 출현하게 되는 단순한 환영(幻影)으로 인해, 의미는 사물과 단어들의 경계에 드리운 안개에 불과하고, 발생의 능력을 빼앗겨 비신체적인 불모성을 겪고 있는 비-효력으로 나타난다.

의미와 문제
  질문은 그 자체가 선재한다고 가정된 명제의 중성화된 분신이고, 이 명제는 대답의 구실을 할 수 있거나 해야만 한다. 질문(interrogation)은 어원적 의미대로 공동체(상호성)의 틀 안에서 성립한다. 질문한다는 것은 공통감(상식)을 함축할 뿐만 아니라 어떤 양식을 함축한다. 양식은 경험적 의식들에 대해 이 의식들의 상황, 관점, 기능, 권한들 등에 따라 지식과 정보를 분배하고, 그 결과 어떤 의식은 다른 의식이 모르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간주한다.(몇 시죠? 시계를 갖고 있으니까)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질문의 형식은 해당 명제를 대답으로 간주하도록 유도해주면서, 동시에 포착된 해의 경우들에 따라 하나의 문제가 경험 안에서, 그리고 의식에 대해 분해, 환전(換錢), 왜곡되는 방식을 표현한다. 질문은 우리에게 자신이 분해하고 있는 것에 대한 예감을 불러일으킨다.
  의미는 문제 자체 안에 있다. 이 의미는 복합 테마 안에서 구성되지만, 이 복합 테마는 문제와 물음들의 총체이고, 이 물음과 문제들의 총체에 대한 관계 안에서 명제들은 대답의 요소와 해의 경우들로 기능한다. 사람들은 의미나 문제가 명제 외적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또 의미나 문제가 본성상 모든 명제와 다르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본질적인 것을 놓칠 뿐 아니라 사유 행위의 발생, 인식능력들의 사용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된다.

 

일곱 번째 공준: 해의 양상들
양상의 공준 혹은 해들의 공준.(문제는 내용상 명제들을 기초로 전사되거나 형식상 해결 가능성에 의해 정의 된다.)
   참과 거짓은 오로지 해들이 있을 때만 시작하고, 오로지 대답들에만 해당 자격을 부여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제임을 ‘인정’하지만, 마치 문제는 앎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사라져버릴 예정의 잠정적이고 우발적인 운동에 불과하고, 이 운동의 중요성은 단지 인식 주체가 종속되어 있는 부정적인 경험적 조건들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들을 ‘주어진 것들 data’ 가 아니라 나름의 자족성을 지닌 어떤 이념적 ‘객체들’로 간주해야 한다. 참과 거짓은 해들과 관련되기는 고사하고 무엇보다 먼저 문제들에 영향을 미친다. 하나의 해가 진리를 지닌다면, 그것은 언제나 자신이 답하는 그 문제에 따라 마땅하게 주어지는 진리이다. 또 문제가 어떤 해를 갖는다면, 그것은 언제나 자신의 고유한 진리나 거짓에 따라, 다시 말해서 자신의 의미에 따라 마땅하게 주어지는 해이다. 바로 이것이 “참으로 위대한 문제들은 단지 해결되는 순간에만 정리된다.”든지 “인간은 오로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만을 제기할 뿐이다.”와 같은 말들이 담고 있는 뜻이다.

 

진리론과 해들의 가상
  명제를 기초로 문제를 전사하는 ‘자연적 가상’은 문제의 진리가 오직 해를 받아들일 가능성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적 가상’으로 이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가상에 사로잡혀 공통감의 명제들을 기초로 문제를 전사하고, 철학적 가상에 사로 잡혀 문제들의 진리를 공통의 장소들, 다시 말해서 해를 받아들일 논리적 가능성에 의존하도록 만들고 있다. 철학사에서 기껏해야 변한 것은 이 가능성의 형식뿐이다. 다른 어느 누구보다 칸트는 참과 거짓을 문제와 물음들 안에서 검증할 것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의 비판은 독단적 이미지나 공통감의 지배 아래 머물러 있고, 여전히 문제의 진리를 해를 받아들일 가능성을 통해 정의한다. 그가 놓치고 있는 것은 본연의 문제가 지니고 있는 내적인 성격이자 내면적인 명법(命法)적 요소인데, 이 요소를 통해 문제의 진위가 결정되고 문제의 내생적 발생 능력이 측정되는 것이며, 또 이런 발생 능력이 변증론이나 문제 조합법의 대상 자체, ‘미분적인 것’이다. 문제들은 시험이자 선별들이다. 문제들의 한복판에서 진리가 발생하고 사유 안에서 참된 것이 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라는 것은 사유 안의 미분적 요소이고 참된 것 안의 발생적 요소이다.


6절 여덟 번째 공준: 결과로서의 앎
목적이나 결과의 공준, 앎의 공준(앎에 대한 배움의 종속성과 방법에 대한 교양의 종속성)
  이념을 탐험한다는 것과 인식능력들 각각을 초월적 실행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결국 똑같은 일이다. 이것은 배움의 두 측면이다. 첫 번째 측면에서 볼 때 배움은 문제(이념)의 객체성과 마주하여 일어나는 주관적 활동들에 부합하는 이름인 반면, 앎은 개념의 일반성을 지칭하거나 해(解)들의 규칙을 소유하고 있는 평온한 상태를 지칭한다. 배운다는 것은 이념을 구성하는 보편적 관계들과 이 관계들에 상응하는 독특성들 안으로 침투한다는 것이다. 수영을 배운다는 것은 곧 신체의 특이점을 객체적인 이념의 독특한 점들과 결합하여 문제제기의 장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합은 의식의 문턱을 규정하고, 이 문턱의 수준에서 현실적 행위들은 대상의 현실적 결합관계들에 대한 지각에 맞추어 조정된다. 문제제기적 이념들은 미세 지각들의 대상, 의식 이하 차원의 대상이다. ‘배움’은 언제나 무의식의 단계를 거치고 언제나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그런 와중에 자연과 정신 사이에 어떤 깊은 공모 관계를 수립한다.
  배움의 두 번째 측면, 배우는 자는 각각의 인식능력을 초월적 실행으로 끌어올린다. 배움의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개인 전체를 관통하는 과격한 훈련, 도야나 정신적 성숙을 위한 교육인 파이데이아가 있을 뿐이다. 방법은 모든 인식능력들의 협력을 조정하는 앎의 수단이다. 또한 공통감의 표출이거나 자연적 사유의 실현으로서 선한 의지를 전제하고 이 의지는 사유 주체가 ‘미리 숙고해서 내린 결정’에 해당한다. 하지만 교양은 배움의 운동, 비자발적인 것의 모험이다. 이 운동과 모험은 감성, 기억, 사유 등을 필요한 모든 폭력을 통해 차례로 엮어가고, 마침내 니체가 말한 “일군의 사유자들의 훈련”, “정신 훈육”으로 귀결된다.
  배움은 단지 앎과 무지 사이의 중간단계로 앎이라는 결과 안에서 사라져야 한다. 헤겔에서조차도 엄청난 배움과 학습의 길은 절대지(絶對知)로서의 앎의 이상에 종속되어 있다. 플라톤은 예외적이다. 그에게 배운다는 것은 영혼의 초월론적 운동이고, 앎으로도 무지로도 환원될 수 없다. 사유의 초월론적 조건들은 앎이 아니라 ‘배움’을 기초로 조성되어야 한다. 사실 플라톤에게서 시간이 사유 속으로 차이를 끌어들이고 학습이 이질성을 끌어들인다 해도, 여전히 그 차이와 이질성을 유사성과 동일성의 신화적 형식에 종속시키고 앎 자체의 이미지에 종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새로운 메논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앎은 경험적 형태에 불과하고 경험 속으로 거듭 떨어져 나오는 단순한 결과에 지나지 않지만, 배움은 어떤 초월론적 구조이다. 이 구조를 통해 차이와 차이, 비유사성과 비유사성이 서로 매개됨이 없이 하나로 묶이고 시간은 사유 안으로 도입된다. 그러나 이 시간은 텅 빈 시간 일반의 순수 형식일 뿐, 이러저러한 신화적 과거나 이러저러한 사라진 신화적 현재가 아니다.”
  사유는 사유 안에서 태어난다. 사유하기의 활동은 본유성 안에 주어지는 것도, 상기 안에서 가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 활동은 다만 사유의 생식성 안에서 분만될 뿐이다. 이런 사유는 이미지 없는 사유이다. ​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경아 님,  고생 많으셨어요.
어려웠던 본문, 발제 준비로 한 주 내내  붙들고 씨름하신
경아 님의 끈기로 우리가 함께 통과한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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