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 거대한 전환_2장 보수적인 1920년대, 혁명적인 1930년대_발제 (0826.토) +3
나나
/ 2017-08-25
/ 조회 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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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2017.08.26(토) 10:00 나나
<거대한 전환> 제 1부 국제시스템
제 2장 보수적인 1920년대, 혁명적인 1930년대
Ⅰ. 제 1차 세계대전
20세기에 들어서며 세계경제가 해체되고, 1930년대 들어서며 문명전체가 전환을 겪게 되는데, 이 둘 사이를 잇는 보이지 않는 고리가 바로 금본위제의 붕괴였음. 금본위제는 세계 경체를 떠받치던 마지막 기둥이었음 |
1) 세계경제의 해체
- 이미 900년대 이래로 세계경제는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으며 이것이 뿌리가 되어 생겨난 정치적 긴장이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으로 폭발하게 됨.
- 신세기적 변화라는 당시의 믿음과 달리 19세기 문명의 붕괴를 종결짓는 것이엇음.
-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 혼란을 갖고 옴
* 당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금본위제’에 대한 오류
1. 금본위제를 순수한 경제 제도로 여김
: 국제 금본위기의 붕괴 -> 단순한 경제제도의 몰락
2. 사회적 메커니즘의 일부라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음
: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영향력을 갖던 민주주의 국가들이 국제금본위기 붕괴의 대처에 가장 뒤처짐
3. 국제통화체제가 정치 기능을 갖고 있다 라는 사실을 아무도 생각지 못함
1차 세계대전과 전후 여러 나라에서 벌어진 혁명은 그 역사적 성격 면에서 19세기의 연장이었다. 1914~1918년간의 사태 역시 위기의 촉발과 악화였지, 위기의 원인은 아니었음 그러나 그 당시 도처에 널린 딜레마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했고, 전후 세계를 다시 조직하려는 과정에서 이것들이 하나둘 드러나게 되어 원인을 1차 세계대전 자체에서 찾으려는 오류를 범하게 됨. |
2) 베르사유 조약의 모순
- 제 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해 도입되었던 베르사유 조약은 정치적 긴장자체를 표면적으로는 완화 할 수 있었으나, 실제적으로는 정치적 긴장을 낳는 근본 원인 자체를 더욱 악화시켰으며, 오히려 장애물을 늘어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함
- 독일(패전국)들의 일방적(영구적) 무장해제를 강요하며 세력균형 원리의 복구를 불가능하게 만듬 (세력균형 체제의 필수적 전제조건인 독립적 강대국 단위들의 존재를 제한하여 그 체제의 성립 가능성조차 무산시킴)
- 이러한 현실에서 국제연맹의 존재는 유명무실 했으며, 전후체제에서 평화재건에 대한 망상만 남게 하였음.
3) 국제 연맹
-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위해 국제연맹의 기능에 걸었던 희망 역시 미국의 불참과 만장일치 규칙으로 방만해진 다수 약소국들의 무책임으로 사라지게 됨
- 경제차원에서 국제연맹은 평화수호를 위한 제2선으로서 국제통화체제의 복구 (세계경제의 복구)라는 목표 즉, 각국 통화 환율과 자유무역의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평화수호를 위한 경제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오트피낭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으며, 그 결과 존피어폰트 모건(J.P Morgan)이 주목을 받게 됨.
* 국제 연맹 : 일정한 원칙과 규범에 따라 투명하게 국제문제를 논의하는 국제연맹을 창설 → 문제의 발단 : 미국의 국제연맹 불참과 독일에 대한 불리한 처우 유럽 대륙의 세력 균형에 가장 중요한 나라인 독일에게 패전국으로서 경제적, 군사적으로 철저하게 족쇄를 쓰게함 -> 1320억 마르크를 배상금(금) 지불판정 -> 지불X -> 프랑스군에 의해 탄전지대(루르지방) 점령당함. → 결과 : 독일을 말려 죽이려는 체제에 불과하다는 강한 불만이 독일인 하층 부르주아부터 확산 -> 민족주의/나치즘 발호의 배경이 됨 폴라니는 근본적인 문제로 강대국인 미국이 국제연맹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서 19세기 평화 체제를 강제했던 세력균형이 작동할 수 없게 된 것을 문제로 설명함.
** 존피어폰트 모건(J.P Morgan): 당시 미국 최고의 금융자본가.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자본과 연결되어 있었고, 1920년대엔 독일의 전후 배상금 문제, 중·동유럽 금융 불안정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국제적 대부를 주선하는 주된 역할을 맡음 |
Ⅱ. 제1차 세계대전 이후
- 1920년대는 19세기 기준에서는 혁명적이었을지 몰라도, 실상은 1914년 이전의 체제로 회귀하고자 하는 반동적시기에 불과했음. 이는 아주 근본까지 보수적인 생각으로 오로지 1914년 이전으로의 체제를 다시 확립하는 것만이 평화와 번영을 복구하는 것이라는 생각의 오류를 범함.
- 이 때에는 군사적 패배에 대한 기계적 반작용 혹은 서유럽에서 익숙한 자유주의와 헌정주의 확립이 중·동유럽에 펼쳐진 것 이상은 아니었음. 러시아에서 나타난 혁명 (19세기 유럽의 체제를 1차대전 이후에 도입) 또한 영국, 미국, 프랑스 혁명 등에서 나타난 여러 이상들을 실현하는 체제를 확립 혹은 재확립 하려는 것일 뿐이었음
- 그러한 20년대의 실패에서 비롯되어 1930년대의 거대한 전환의 이유가 되게 됨.
1) 1930년대(거대한 전환)의 급작스러운 변화
1. 영국의 금본위제 포기
2. 러시아의 경재개발 5개 년계획
3. 뉴딜의 출범
4. 독일의 나치즘 국가 사회주의 혁명
5. 국제연맹의 붕괴와 폐쇄형 제국의 등장
2) 1940년대의 위기
- 금세기 초부터 이미 절름발이 상태로 기능하고 있었던 국제 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짐
- 이 위기의 근본원인은 제 1차 세계대전과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한 완전히 망가진 국제경제체제의 붕괴였음 (국제 통화문제와 직접 관련)
- 20년대에 나타난 유럽내부의 위기들은 대부분 대외경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드러남
러시아: 루블의 가치를 인플레이션으로 파괴해버림
독일: 금리 생활자에 대한 수탈이 나치혁명의 터전을 닦는 계기가 됨
국제연맹: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통화가치 회복에 명예를 걸고 진행하여 오스트리아가 회복에 성공하나, 아쉽게도 그곳이 자유주의 경제학자의 메카가 되는 결과밖에 낳지 못함
중·동 유럽권: 반혁명분자들이 통화 회복을 구호로 하여 권력에 대한 청구권을 주장
벨기에·프랑스·영국: 통화기준의 회복이 좌파 정권의 축출 명분이 됨. (특히 중·유럽권에서의 반동은 이후 1당 독재의 출현을 귀결, 폴라니는 이를 시계추의 진자운동이라고 표현함)
- 당시의 유럽 국가는 각국 통화의 안정화를 통한 과거형 국제 경제 체제로의 회기만을 추구
- 유럽통화의 안정화에 골몰한 결과 다른 혼란 양상이 미국까지 휘말리게 되었음
- 결국 유럽은 통화불안정을 전 세계적으로 전염시키며 체제 전체를 붕괴시킴
각국의 통화 불안정은 ‘자본의 해외도피’ 현상을 나타나게 했으며, 각 국민들에게 통화가치의 현대적 중요성 뿐만 아니라, 국제 경체 체제 내 각국 통화간의 상호 의존성을 일깨우며 국내 정치의 핵심사안이 됨. (통화가치를 좌우하는 것이 한나라의 경계선 밖에서 벌어지는 정치사건 일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생겨나며, 어느 나라 통화의 내적가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사회적 전복은 상호 의존된 세계경제 아래서 한나라가 스스로의 금융에 대한 주권을 가진다는 환상을 깨버림) * 자본도피: 자국통화자금을 통화가치가 보다 안정되어 있는 외화자금으로 바꾸는 일. 19세기의 큼직한 정치적 변동 국면에서도 나타나지 않던 현상 |
Ⅲ. 금본위제의 붕괴
1) 금본위제에 대한 믿음
- 당시 금본위제에 대한 인식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를 초월한 국제적 신앙이었음
- 사회주의자와 자본주의 옹호자들간의 대전쟁에서도 ‘화폐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는 전혀 논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일치한 반응이 나타남 (예: 맑스, 리카도)
- 그 시대의 모든 나라 모든 계급 모든 이름의 종교와 사회철학이 함께 받아들인 유일무이의 교리는 “국제 경제 체제가 작동하는 데 금본위제는 필수 불가결 하다는 것‘이었음
* 금본위제에 대한 믿음: 은행이 발행한 지폐가 가치를 갖는 것은 금을 대표하기 때문임 ** 맑스: 프루동의 ‘유토피아적 노동 화폐’는 자기기만이라고 증명하려 하였고, 맑스의 ‘자본’은 리카도적 형태의 상품 화폐론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음 |
2) 금본위제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
- 약소국(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에서는 거의 파괴돼버린 자국통화가치의 안정을 위해 극심한 긴축정책을 감수하였고, 자국 통화 가치의 상승을 위한 긴축 정책의 부작용을 야기하였음
- 강대국(서유럽의 승전국들) 에서도 자국통화의 환율 안정을 위해 엄혹한 시련을 견디어야 만 했음. 전쟁 전과 마찬가지로 돈을 빌려줄수 있었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금본위제로 복귀할 무렵이 되자, 자국 통화의 환율 안정화에 대한 부담을 지지 않을 수 없었음.
- 영국 파운드 가치의 안정성에 대한 불신은 마침내 최고의 금 보요국인 미국의 달러가치의 변동으로까지 나타남.
- 억지로 유지한 통화가치로 인해 타국의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큰 경제적 부담을 가져옴
- 결국 1933년 미국의 금본위제를 탈퇴하면서 전통적으로 유지되어온 세계경제의 마지막 흔적이 소멸되게 됨
* 미국의 금본위제 탈퇴
1927년 영국 파운드 가치를 지지하고 그 안전을 지키기 위해 자국의 인플레이션에도 불구하고 이자율을 낮게 유지하던 당시 최대의 금 보유국 미국은 1929년 경기침체와 잠재 인플레이션의 만연화로 인해 미국달러의 가치변동 문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자,
결국 1933년 금본위제를 공식적으로 포기함으로써 금본위제로의 전 세계적 회귀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게 됨. 이는 역사의 흐름을 단 한순간에 역전시켜버린 사건이었음.
3) 금본위제 복구의 실패
- 각국 통화가치의 안정에 필요한 정치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무수히 많은 국제회의가 개최됨.
- 모든 종류의 국제적 협력이 지향하고 있던 곳은 금본위제의 복구였고, 국제연맹의 후원으로 각 국 정부는 자국의 통화가치 안정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시도함 (수입쿼터제 실시, 대외부채 지불불능선언, 지불유예협정, 양자간 무역협정, 직접 청산체제, 물물교환 협정, 자본수출금지, 외환통제, 외환평형기금 등)
- 그러나 애초 의도와는 다르게 자급자족형 폐쇄경제를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역설적이게도 금본위제의 실패를 초래함
- 각국이 자국 화폐의 대외적 가치를 유지하며 되돌리고자 했던 자유무역의 결과는 자유무역의 교살이었음 (오히려 그 과정에서 실시된 조치들로 인해 압살되고 맘)
- 결국 금본위제의 소멸과 함께 안정된 국제 통화체제를 회복하기 위해 형성되었던 제도들은 그런 현실을 위한 제도로 탈바꿈함
- 이런 경향에 따라 국제연맹과 오트피낭스는 모두 평화유지라는 존재명목을 잃고 급속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짐
Ⅳ. 금본위제의 소멸, 그리고 거대한 전환
1) 금본위제 이후 각국의 대응과 변화
- 이러한 위기와 함께 세계의 많은 부분에서 19세기 사회의 국내 제도들이 완전히 파괴당하는 격변이 나타났으며, 파괴된 제도들은 크게 변형되거나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었음
1. 자유주의적 국가의 많은 나라는 전체주의적 독재로 대체됨
- 독일의 파시즘, 러시아의 사회주의, 미국의 뉴딜정책 등
2. 19세기의 중심적 제도(자유시장에 기반한 생산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우와~~!! 나나 수고했어요. 이렇게 발제문을 먼저 올려주니까,
책을 읽는데 정말 도움이 되는군요. (저는 아직도 읽고 있다는!!)
텍스트만 따라가도 전체 맥락이 그려지는 너무 좋은 발제입니다.
내일 세미나가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나나^.^
올리비아님의 댓글
올리비아
오 ~ 눈에 쏙 들어오는 발제문 . 좋습니닷 ~~
지금 열심히 책 읽는중이요 ~~~
내일 뵈욥 ~~ ♥
요고마고님의 댓글
요고마고세미나 내내 읽으면서 감탄, 직접 발제하시는 모습에 또 감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