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차이와 반복 후기-대자적반복 3(0825) +3
노마드
/ 2017-08-29
/ 조회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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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이어....
모나드性을 지닌 반복은 무의식으로 나아간다. 무의식에서는 물음과 문제라는 살아있는 활동이 있는데 이 활동에 욕망이 에너지를 제공한다. 물음과 문제를 통해 끈덕지게 자신을 주장하는, 대단히 광적일 수 있는 무의식은 특정한 방식으로 자신의 고유한 ‘입벌림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전치와 위장의 옷을 입을 수밖에 없는 이러한 탐험은 매우 고통스럽고, 고통 그 자체로서 물음과 문제의 풍모는 차이와 반복의 이산적 형식을 통해 표현된다. 해답을 찾는 것인가? 상응하는 답은 없다. 부정과 죽음과 시간을 모르는데... 애초에 해답을 찾으려는 목적 따윈 없다.
무의식 안에서 첫 번째 수동적 종합(하비투스)은 능동적 종합으로 나아가는 한 방향과 반복의 품 안에서 차이를 포괄하는 두 번째 수동적 종합(에로스-므네모시네)으로 나아가는 방향으로 갈라진다. 이 두 번째 종합의 선행단계와 대비되는 수준에서 산출되는 재조직화를 통해 이드, 자아, 초자아로 변용(양태변화)된 나르키소스적 자아, 애벌레-주체는 시간성을 잃고 텅빈 공간적 현상으로 나타난다. 미로와 같은 이 텅빈 시간은 곧 죽음본능이다. 프로이트가 가끔 리듬이나 진폭의 차이라고 역설하다가 마침내 거부한 이 죽음(본능)은 사실 생명체 안에 현전하고 어떤 전형을 갖춘 주관적이고 분화된 경험으로 현전한다. 물음과 문제의 원천이자, 자양분이자, 항구적 존속성의 표지가 바로 이 죽음이다!!!
여기서 나르키소스적 리비도는 죽음본능과 상호 보완하며 세 번째 종합을 이룬다. 시간의 모든 차원이 재조직화되는 탈성화된 에너지로서, 때로 ‘사유’와 결부되기도 하는 세 번 째 종합은 유달리 굴곡 심한 원환(영원회귀)을 형성한다. 긍정하는 역량으로서의 차이와 반복놀이, 그리고 그것을 끌고 가는 죽음본능 이라니...
이렇게 4절의 고원을 넘고 5절로 가다가...
그렇다면 차이의 즉자존재는 어떻게 전개되는가? 복수의 계열을 기저로 삼아 구성된 묶기(한 계열에서 다른 계열로 이어지는)가 있어야 하는데, 이 차이가 곧 강도적 차이이다. 다질적 계열들의 소통의 체계에 서식하는 애벌레-주체(수동적 자아)들만이 예컨대 ‘사유와 철학’ 같이 강요된 운동(역동성)을 견뎌내고,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차이나는 강도들의 체계를 관계 짓는 매개는 무엇인가? 그들 간의 소통은 저마다 내포하고 있는 ‘어두운 전조’를 통해 가능하다. ‘어두운 전조’는 차이의 즉자존재이며, 지속적인 전치와 위장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차이소를 소통시키는 작인의 동일성으로서나 즉자 측면으로 볼 때나 차이는 언제나 내적이며, 체계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시간상 문학체계 직전에서 멈추었다.
오늘 나는 단 한 번이라도 반복을 미래 범주로 만든 적이 있는지... 차이를 훔쳐내는 데 그치는 반복이 아니고, 차이를 포괄하되 여전히 같음과 닮음에 종속시키는 반복도 아닌, 고통인지 희열인지 모를 결정적인 어떤 한 순간이자 매 순간인 적이 있는지...
계속 묻고, 또 다르게 물을 수밖에 없다.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잘 읽었어요 노마드 님.
신경증자, 정신병자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대가로 바탕을 탐험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
계속 아른거리네요. 바탕에 대한 탐험과 함께 가는 고통, 고통의 문제...
긍정이 죽음에서 자양분을 얻는다. 죽음, 긍정, 그리고 영원회귀. 이 세 개가 다른 원환을 그리는 걸텐데...
들뢰즈의 이 사유가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좀 자유롭게 할까요?
선우님의 댓글
선우
"계속 묻고, 또 다르게 물을 수밖에 없다."
노마드 님의 마지막 문장을 보며, 지금 이렇게 이 책을 함께 공부하는 세미나가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떻게 물어야할지도 모르겠는 것들을
버벅거리며 묻고, 또 묻고...^^
namu님의 댓글
namu인생에 마치 답이 있는 것처럼 뽄새를 취하고 마치 겨냥하는 총구처럼 살아가는(살았던) 내 삶이 어리석단 생각이 드네요. 들뢰즈의 총구없는, 초월론적인 장으로서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비인칭적인 죽음이란? 우리의 죽음이란 잠재적인 우주의 넓은 품에 안기는 것이고(회귀하는 것이고), 삶이란 또 다른 낯선 떨림(차이 생성의 반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감사, 감사! 사실 삶도 죽음도 없는, 나의 죽음이 아닌 모든 죽음의 의미가 지난 세미나의 화두였던 거 같습니다. 답(해)이 아니라 물음존재라는 나 자신의 위상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의미를 새삼스레 일깨우는군요. 아! 들뢰즈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칸트), 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던졌다고 합니다. 들뢰즈의 객기(?)에 한 표 던집니다. 객기가 아니고서는 삶이 너무 단조롭고 무덤 같은 고요를 견딜 수가 없네요. 우리 모두 객기 부립시다. 고삐 풀린황소처럼! 우주의 품 안에서는 모두가 망아지가 날뛰는 거첨럼, 한바탕 유희이자 잔치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