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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프란츠 카프카 - 발제
토라진 / 2017-08-29 / 조회 1,919 

본문

프란츠 카프카

 

1. 삐촘킨

    

빠촘킨 이야기 – 우울증을 앓고 있는 빠촘킨이 서류에 서명을 해야 하는 업무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 슈발킨이라는 하급 서기관은 이 일을 처리한다고 나선다. 슈발킨은 어두컴컴한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빠촘킨에게 다가가 서류를 내민다. 빠촘킨은 아무 말 없이 서류에 서명을 한다. 서명란에는 ‘슈발킨’이라고 적혀 있었다.


 벤야민은 200년 전에 있었던 이 이야기가 카프카에게 있어서 전주곡처럼 보인다고 말한다. ‘카프카의 세계는 곰팡내가 나고 낡고 어두운 관방의 세계, 관료들과 서류함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슈발킨은 카프카 작품에 나오는 K이다. 그리고 빠촘킨은 권력가들이다.
 하지만 이 권력가들은 사위어가며 전락하고 있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것들이 지구와 같은 무게’로 그들을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상적인 무게에 가장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이다. 결국 관리들의 세계와 부친들의 세계는 동일한 세계이다. 그들은 둔감하며 퇴락했고, 더럽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아버지는 기생충처럼 아들에게 의존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아들에게 형벌을 내린다. 원죄에 대한 형벌. 여기서 원죄는 <인간에 의해 저질러진 태고의 불의라는 것으로, 그가 어떤 불의의 희생물이고 또 원죄의 희생물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끊임없이 비난하고 있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이 원죄에 대한 문책은 죄가 된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는다. 따라서 소송은 늘 유보된다. 그로 인해 관리들의 부패가능성은 매수 가능성이 되며, 이것은 유일한 희망이 된다. 
 <죄가 없는데도 심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무지하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도 이러한 재판제도의 특징이다>하고 추측하는 K의 말처럼, 죄를 짓거나, 심판을 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다. 카프카에게 있어 관청과 가정에서의 상황들은 이런 면에서 접촉한다. 가정에서 누군가의 아들로 태어난다는 것은 결국 운명일 테니 말이다.
 관청이 지닌 이런 부도덕적인 성격은 카프카 작품에 나타나는 소녀들의 특징과 같다. ‘그녀들은 마치 침대에서 그렇기 하듯 그들 가정의 품안에서 불륜에 몸을 맡긴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아름답지 않다. 아름다움은 오히려 피고들에게 나타난다.
 피고들에게 나타나는 ‘아름다움’은 ‘무희망성’ 때문이다. 카프카는 그 무희망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신의 언짢은 기분, 기분이 나쁜 날일 따름이야. 희망은 충분히, 무한히 많이 있지. 다만 우리를 위한 희망이 아닐 뿐이지.”
 카프카에게 있어서 희망의 가능성은 ‘조수’라는 인물군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다른 어느 인물군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누구한테도 낯설지 않다. 그들은 이를테면 여러 인물군들 사이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는 사자(使者)들이다.
 또한 카프카는 신화에 굴복하지 않고 신화의 위력들을 이겨낸 승리의 방식으로 희망을 이야기한다. 카프카는 단편 <사이렌들의 침묵>에서 <불충분하고 심지어 유치한 수단들이라 할지라도 구제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 보인다. 사이렌들은 노래 부르지 않고 침묵했다. 비록 오딧세이가 그것을 눈치채고 있었을 지라도 말이다.

 

 ‘카프카의 사이렌들은 침묵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카프카의 경우 음악와 노래는 탈출의 표현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탈출의 보증, 다시 말해 조수들이 자기 집처럼 살고 있는, 저 미숙하면서도 일상적이고, 또 위안을 주면서도 어리석은 중간세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희망에 대한 보증을 뜻하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두려움이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길을 떠나는 소년과 같다.’(70쪽)


2.어린 시절의 사진

 

카프카의 어린 시절의 사진 – 고문실이나 알현실처럼 보이는, 인공적인 장식물의 배경인 곳에서 꽉 낀 옷을 입은 슬픈 눈의 소년이 앉아 있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챙 넓은 모자가 들려 있고, 커다란 귀는 풍경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 보인다.

 

 벤야민이 카프카의 사진을 거론하면서 보여주고 싶은 것은 소망의 목표에 드러난 비밀들이다. 인디언이 되고 말을 타고 달리고 싶은 소년의 소망. ‘그가 소망의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경주로밖에 없다. 이 경주로는 동시에 극장이기도 한데, 바로 그 점이 하나의 수수께끼를 제공해준다.’(72) 여기서의 극장은 오클러호머의 자연극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누구나, 모든 사람을 필요로 하는 극장을 말한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인물들의 제스쳐들은 극장 위에서 벌어지는 연기동작들과 상통한다. ‘이들 제스쳐들은 처음부터 작가에게 어떤 확실한 상징적 의미를 지녔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작자가 이들 제스쳐로부터 끊임없이 연관관계들을 변화시키고 실험적인 배치를 하면서 그러한 의미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73)
 드라마가 펼쳐지는 열린 세계 속에서는 동물이 마치 인간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동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 순간, 오히려 우리는 인간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인간의 몸짓으로부터 전통적 토대를 탈취해서는 그 토대에서 끝을 모르는 성찰의 대상을 취하’(74)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철학적 성찰은 애매모호하다. 우화들의 전개 방식이 시와 유사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교리와 어떤 관계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교리 그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조직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삶과 노동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 하는 물음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조직이라는 것은 카프카에게 있어서는 운명이다. ‘그는 운명으로서의 조직을 <<소송>>이나 <<성>>에서의 광범위한 관료의 위계질서 속에서뿐만 아니라, 더 구체적으로는 복잡하고 개관할 수 없는 건축 계획들 -[중국의 만리장성] -속에서 마주 대하고 있다.’(76)
 또한 벤야민은 ‘노동의 계획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은 채 그대로 수행되는 경우가 허다했다.’라고 했던 메취니코프의 말을 인용하면서 카프카가 평범한 사람들 축에 속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평범한 사람으로서 ‘카프카는 자신의 이해의 한계에 도달할 때까지 한발 한발 자신을 밀고 나갔다.’(77)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는 신비주의의 유혹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을 위한 비유를 창작해내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카프카의 세계는 하나의 극장이다. 극장에서 일자리를 찾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마지막 도피처, 구원이다. 또한 이 구원은 출구일 수밖에 없다. 그 출구의 방식은 이렇다. <이웃사람들은 눈이 미치는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닭과 개가 짖는 소리를 멀리서도 서로 들을 수가 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매우 늙은 나이에 이르도록 서로 왔다갔다해 보지도 못한 채 죽었다고 한다.> (79)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도달할 수 없지만, 한발한발 자신을 밀고 나가는 방식이다.  이것은 노자의 방식과 일맥상통한다. (<도덕경> 47장 : 문을 나서지 않고도 세상을 알고, 창을 통해 내다보지 않고도 하늘의 방식을 본다./ 멀리 나갈수록 아는 것이 줄어든다. 그러므로 성인은 나가지 않고도 알고, 보지 않고도 꿰뚫고 애쓰지 않고도 성취한다. -발제자 ㈜ )
 결국 카프카는 경계의 지점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극과 희극, 먼 곳과 가까운 곳, 내부자와 외부자 등. 그러나 그는 나아간다. 발자국이 어디에 찍히는지 모른 채로 말이다. 벤야민은 그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며 의문을 갖는다.


 ‘그는 어떤 종교의 창시자가 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있다. 시골의사가 타고 갈 말이 나오는 마굿간, 클람이 시가를 입에 물고서 한 잔의 맥주 앞에 앉아 있는 숨막힐 것만 같은 뒷방, 두드리면 파멸을 몰고 오는 저택의 문, 이러한 것들은 모두 이러한 마을에 속하는 것들이다. 이 마을의 공기 속에는 완성되지 않은 것들과 너무 익어버린 것들이 뒤섞여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 카프카는 이러한 공기를 그의 생애 내내 마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점술가도 아니고 종교의 창시자도 아니다. 그는 어떻게 이러한 공기를 견디어 낼 수 있었을까?’ (80)


3.작은 곱추

 

크누크 함순이 지방 신문의 독자란에 낸 투고 – 자신의 갓난아이를 죽인 어머니에 대한 극형이 선고되지 않은 것을 비판.

 

 벤야민은 위의 이야기를 빗대 카프카의 소설 [중국의 만리장성]에 대한 해석이 소홀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카프카를 분석하는 두 가지 방법, 즉 심리 분석적 방법과 신학적 방법이 본질을 흐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방법들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는 전세(前世)적 힘(vorweltlich)의 개념을 끌어온다. 하지만 카프카는 그 힘들의 정체를 몰랐으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랐다고 점을 분명히 한다. 카프카는 단지 전세(傳世)가 죄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미래를 보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소송>>에서의 지연은 피고에게는 미래적인 희망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연의 방식은 ‘수치감’을 드러내는 제스쳐로 드러난다. 그런데 이 수치감은 사회적 요구에 의해서 발생한다. 즉 가족의 명령에 따라 견디어야하는 현실이 있는 것이다. 결국 카프카는 그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인류 태초의 시간을 넘어서는 진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소설들이 움직이고 있는 곳은 늪의 세계였다.’(84) 그의 작품에서 인물은 망각을 통해 현실성을 획득하기도 하며 경험들이 흔들리며 표현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벤야민은 카프카의 기술을 비로소 파악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카프카의 인물들은 그 얘기가 지극히 중요하거나 놀라운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가는 말로 얘기하며, 마치 그가 그것을 오래 전부터 줄곧 알고 있어야 했던 것처럼 얘기한다. 그리고 마치 새로운 내용은 아무 것도 없다는 듯이, 또 잊어 버렸던 것을 기억해 내도록 주인공에게 슬쩍 요구하는 것처럼 얘기한다.’(86) 그가 잊어 버렸던 것, 그 망각을 카프카는 그의 주인공들, 특히 동물들에게서 엿들으려 했다. 사색을 가장 많이 하는 종족으로서의 동물들. 그들의 사고 속에는 불안이 있다. ‘불안이 상황을 망치지만 그 불안이야말로 그러한 상황에서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87)
 카프카의 단편들에서 가장 많은 나오는 제스쳐는 머리를 가슴 깊숙이 파묻는 제스쳐이다. 법관들은 피로하기 때문에, 수위는 소음 때문에 등을 구부린다. 부담이 지워진 등. (이것은 오드라데크의 기형적 형태와 닮아 있다.) ‘여기서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은 망각, 즉 잠자는 사람의 망각과 일치된다. 그리고 이것은 <작은 곱추>라는 민요에서처럼, ’폭력으로서 세계를 변경시키려고 하지 않고, 다만 세계를 조금 잡게 될 그런 메시아가 오면 곱추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89)
 그렇다면 그가 메시아를 향해 손을 모으며 드린 기도는 어떤 것이었을까? 벤야민은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그는 여전히 말로브랑쉬가 <영혼의 자연적인 기도>라고 일컬었던 것, 즉 주의력을 최고도로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피조물들을, 마치 성인들이 그들의 기도 속에 그렇게 하듯이, 이러한 주의력 속에 포용하였던 것이다.’(90)

 

4. 산초 판사

 

마을에 한 뜨네기의 이야기 – “나는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이 되고 싶소. 잠을 자고 있는데 적이 침입해 내의 차림으로 도망갔다가 다시 이곳, 당신네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이곳에 안전하게 도착했으면 하오.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외다.” “그러면 당신은 그런 소원에서 무엇을 바라는 것이요?” “결국 내가 바라는 것은 내의 한 벌입니다.” 

 

 카프카의 인물들 중에서는 독특한 방식으로 인생의 짧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인물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결코 지칠 줄 모르는 조수들과 비슷하다. 또한 그들은 학생들과도 닮아 있다. ‘단식광대는 단신을 하고, 문지기는 침묵을 지키며, 학생들은 깨어 있다. 이처럼 카프카에게 있어서는 금욕의 커다란 규율들이 은밀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규율들이 성취하는 최대의 성과가 공부이다. 그러한 공부들은 무엇인가를 유용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無에 아주 가까운 것이다. 다시 말해 道에 가까운 것이다.’(92) 또한 공부는 망각을 막아내는 안간힘이기도 하다. 위의 이야기에서의 ‘내의 한 벌’은 아마도 이런 공부 방식의 한 예일 수 있을 것이다.
 <새 변호사>에서의 부세팔루스의 공부는 가장 적절한 예일 것이다. 법학자로서 부세팔루스에게 있어서 공부는 신화에 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근원에 충실할 뿐이다. ‘단지 연구되기만 하고 실행되는 않은 법, 바로 이 법이 정의로 나아가는 문’(95)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벤야민은 <<돈키호테>>의 산초판사가 자유로운 몸이 되었어도 돈키호테를 따라 출정하는 이야기를 끌어들이며 이렇게 맺는다.

 

 ‘차분한 바보이고 서투른 조수였던 산초 판사는 자신의 주인을 자기보다 먼저 떠나보냈다. 부세팔루스는 그의 주위 사람들보다 더 오래 살았다. 단지 등에서 짐만 벗겨진다면 짐이 벗겨진 그 등이 사람의 등이냐 말의 등이냐 하는 물음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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