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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 발제 2017년 8월 29일
뉴미 / 2017-08-29 / 조회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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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업로드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덧_8월 30일 수정본 다시 업로드했어요. (수정된 부분 색표기)

 

1. <언어 기원론>의 위치 >  최초 논쟁과 <언어 기원론> 의 구성

그라마톨로지 2부의 3장에서 데리다는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루소의 저서 ‘언어 기원론’의 문제를 제시하면서 (공식적으로는) 정념, 음성 언어(이하 말), 선율을 선호한 루소가 다시 스스로에 맞서서 욕구(필요)besoin, 문자 언어, 화성을 지지하는 그 애매모호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장에서는 <언어 기원론>의 집필 연대와 루소의 주요 서술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 현전-문자 언어-차이 등에 대한 복잡한 논증이 상세하게 이루어지는데, 그 목적은 대리 보충의 논리를 분석하는데 있다. 데리다의 사유에서 언어의 기원은 단순히 현전에 속한 것이 아니라, 기원적 상태에 놓여 있으며 관계 또는 대리 보충의 상태에 있다. 요컨대, ‘태초에 대리 보충이 있었’다. 루소가 추상적인 문자 언어로 언어의 퇴행을 논할 때, 데리다는 그것이 퇴행이라기보다는 본래부터 존재했던 위기라고 주장한다. 이로부터 데리다가 이끌어내려는 것은 ‘언어의 (하나의) 기원은 애초부터 없다.’ 일 것이다. 

 

데리다는 <언어 기원론> 12-13장 음악의 역사에 대해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루소가 언어의 역사를 고찰하는 이유는(음악의 역사를 고찰하지 않고) 음악의 역사가 언어의 역사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고 믿기 믿고싶기 때문이다. 양자 모두 우리의 정념에 목소리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시작한다. 요컨대 노래정념이라는 공통기원을 갖고 있는데, 음악언어가 공통 기원을 갖는다면 양자는 동일한 운명을 갖는 것이다. 루소에게 음악 퇴행의 역사, 음악의 타락은, 선율이 화성으로 타락하는 역사이다. 데리다가 <언어 기원론>의 내용분석에 앞서 검토하는 것은 <언어 기원론>의 작성 연대이다. 처음 논쟁을 개시한 학자인 에스피나스에 따르면 <언어 기원론>은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작성한 다음에 초안이 작성되었다. 이에 대해 프랑스 문학사의 대가인 랑송은 <언어 기원론>의 원래 제목이 ‘선율 원칙에 관한 시론’이며 그것이 1750년 라모의 ‘화성 원칙의 증명’에 화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1913년 마송이 이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데 <언어 기원론>이 1761년 독립된 단독 논문으로 집필되었다는 마송의 견해는 대부분의 루소 연구가들에 의해서 수용되었다. 데리다는 결정적으로 루소의 몇 몇 표명 중 <고백록>의 중요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설득력이 있는 마송의 ‘1761년’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루소의 <언어 기원론>은 길이가 다른 20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크게 다섯 개의 핵심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1)선율과 화성의 문제, 2)언어의 기원이라는 중요한 문제, 3) 북방과 남방이라는 대립과 분할(남방언어-억양/북방언어-분절), 4)정념과 욕구의 구별 문제, 5)억양과 분절화의 대립 문제이다. 이를 통해서 루소는 언어는 욕구가 아니라 정념에 기원한다는 주장을 펼치지만 데리다에게 있어서 정념과 욕구의 차이는 북방과 남방의 차이처럼 명확하게 구별될 수 없으며, 모든 언어는 정념과 욕구 양자의 흔적을 포함한다. 선율이 화성이고, 남방이 북방이며, 정념이 욕구이며, 언어는 시작부터 늘 분절적이라는 것이다.  

 

2. 모방 > 음정과 대리보충

루소는 언어 이전에 음악이란 없으며(음악은 소리가 아니라 목소리로부터 태어난다), 노래에 고유한 양태를 부여하고자, 기원으로 삼고자 하지만 노래가 ‘인간의 목소리를 변형시킨 일종의 수정’ 이라는 당혹감에 처하게 되자 ‘영속성’과 ‘(인간 정열의) 모방으로서의 선율’라는 애매한 기준을 제시한다. 목소리의 음정 체계와 음악의 음정 체계 차이와 ‘시원적 목소리’를 함께 남겨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모방들 가운데 가장 흥미있는 것은 인간 정열모방이고, 모든 모방 방식들 가운데 가장 유쾌한 것은 노래이다’  모방과 모방되는 것의 통일성, 목소리와 노래의 통일성이 이상적인 한계로서의 통일성 즉, 자연(의 목소리)이 되는 것이다(이 통일성이 성취되면 모방은 불필요하다). 데리다는 루소의 이러한 자연에 대한 고고학적-목적론적 정의가 여러 담론들의 황폐화를 야기시킨다고 말한다.

 

루소의 텍스트는 기원을 태초의 타락으로서, 종말의 시작으로서 기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타락이 최초 생성 속에는 지시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악’이 훌륭한 기원에 초과하여 온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뒤틀려 있다. 노래와 말이 동일한 출생증명서, 동일한 정열를 지니고 태어났고 최초에는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말이다. 노래와 말의 분리 즉, 음악의 생성은 ‘대리 보충’의 개념을 불러온다. 표기는 본질적으로 ‘악’이고 또한 대리 보충이다. 루소는 언어의 재앙적인 ‘완벽 추구’로 인해 일어난 (불행한) 타락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자연, 혹은 기원으로 부터 멀어진 음악을 교체-대체물의 생산, 망각-에너지의 손실(소멸)로 기술한다. 그렇게 선율의 자리에 화성이, 악센트의 자리에는 음정이 대체물(대리 보충)로 자리하게 된다.

 

2. 모방 > 판화와 형식주의의 애매함

어떤 이유에서 대리 보충이라는 대체가 숙명이 되었나? 대리 보충을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균열은 무엇인가? 루소의 <음악 사전>에서 ‘음정’ 은 마치 ‘문자’처럼, 근원적 부수물이며 본질적인 우발성의 사건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루소는 선율의 ‘공간화’가 말과 노래의 가능성을 보장한다고, 대리 보충이 근원적이고 필연적이라고 말하면서도 공간을 그저 단순한 바깥으로, ‘공간화’를 하나의 재앙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언어 기원론>을 지배하는 대립 체계(예속과 자유, 북쪽과 남쪽, 분절과 악센트, 자음과 모음, 수도와 지방)를 통해서 루소가 언어의 역사를 고발하는 기묘한 태도를 인지할 수 있는데, 이는 음악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로 선율과 화성이라는 이항 대립구도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좋은 선율과 나쁜 선율을 나누는데까지 이르게 된다.  

 

루소의 음악의 기원에 관한 규정과 기준들의 애매모호함은 그 모순이나 불순이 명시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채로 밀수꾼처럼 은밀히 지속된다. 그에 따르면 모방 예술의 본질이며, 모방은 현전을 이중화하고, 현전을 대리 보충하면서 현전에 첨가된다. 노래의 가능성, 동물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모방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는 모방을 단지 대리 보충하는 복제물로서만 칭송하기 때문에 그 칭송은 또한 비판으로 급선회 할 수 있다. 의미 작용이 일종의 모방이라는 점에 근거하여 데리다는 <에밀>을 분석하고 루소의 망설임과 애매성(기호의 위상)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357p

 

모방으로부터 탄생한 판화 예술 -판화에 적합한 윤곽선, 즉 기억될 수 있는 윤곽선, 모방되는 선-은 공간 예술이자 시간 예술이다. (루소가 비난했던 철학자들의 개념) 예술의 고유성이 모방과 형태(형식)이라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 루소가 데생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방의 조건이다. 색깔은 자연을, 데생은 예술-모방을 의미한다. 음악을 예술-모방으로 만드는 것은 선율이다. 이항의 대립 구도에 따라 루소는 나쁜 형식과 좋은 형식, 죽음의 형식과 삶의 형식, 화성적 형식과 선율적 형식, 내용 없는 형식과 모방적 내용을 지닌 형식, 의미로 충만한 형식과  공허한 추상화를 대립시키면서 기존 형식주의에 저항한다.  루소에게 나쁜 선율이란 화성과 소통하는 것이다. 그가 좋은 선율과 나쁜 선율을 열심히 나누고 있지만 데리다는 그의 선율 vs 화성의 이분법적 논지와 그 기준의 애매모호함을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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