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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제
요고마고 / 2017-08-30 / 조회 3,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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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1. 시대적 분위기

1935년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 작품」을 쓸 당시, 기술적 복제라는 거대한 흐름이 미술사에서 일으킨 변화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비평가이자 이론가로서 점차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에 경도됐던 발터 벤야민은 1931년 「사진의 짧은 역사」라는 글에서 매체와 사회계층간의 관계를 분석했다. 사진은 부르주아 문화의 일부로 탄생했는데, 초창기에 주고받았던 초상사진은 5분 남짓 소요되는 긴 노출 시간 때문에 사진에는 모델의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과 인상학적 진실성이 반영되어 있었다.

4년 후 벤야민이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에서 사진과 영화의 문제를 다시 다루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계층간의 관계가 아닌 ‘생산방식’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산업화와 더불어 생산 조건이 급변하면서 대량생산이 일반화되었다. 이미지의 세계에 처음 도입된 대량생산 방식은 손으로 그린 그림을 기계로 인쇄했던 석판화이지만, 완벽한 기계 복제 양식이 된 것은 곧이어 등장한 사진이었다. 기계로 제작된 대상에서는 원작의 진품성,아우라가 제거된다. 원작의 유일무이한 현존성은 그것에 담긴 시간과 공간으로 인해 관람자로부터 심리적인 먼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기계 복제에서 그 거리감은 사라진다.

벤야민은 대상의 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에서 동등함을 발견’하려는 지각 작용의 표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진이 예술인가’라고 묻기 전에, 사진의 발명이 예술의 본성 자체를 바꾸어버린 것이 아닌가에 대해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로의 ‘벽 없는 미술관’

앙드레 말로(André Malraux,1901~1976) 역시 원본이 복제되는 과정에서 그 고유성을 잃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원본이 복제방식이라는 양식을 갖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 양식은 사진을 통해 우리가 세계 미술에 대한 정보를 집약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예로서 미술책(art book)은 말로가 ‘벽 없는 미술관’이라고 불렀던 것이기도 하다. 말로가 보기에 미술책의 가치는 기존 엘리트주의적 미술관과 달리 많은 이들에게 예술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미술책의 주된 기능은 예술 작품들을 사진으로 복제해서 열거한 결과 예술 작품이 ‘대상’에서 ‘의미들’로 새롭게 기호화됐다는 사실에 있다. 사진은 비교를 가능하게 하며, 한 작품에만 한정된 관조의 경험을 약화시킨다.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가 입증한 것처럼 한 작품의 의미는 그것이 아닌 것과의 관계를 통해 발생하게 된다. 1922년 전시의 서문에서 말로는 “우리는 비교를 통해서만 감지할 수 있다...그리스 조각의 위대함을 이해하려면 수백의 그리스 조각을 보느니 차라리 그것을 이집트나 아시아의 조각과 비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전 미술의 아름다움은 미술을 제작하거나 경험하는 데 있어 하나의 이상으로 작용해 왔다. 그러나 기술복제시대의 미술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의미의 문제가 된다.

 

뒤샹의 「여행용 가방」

「여행용 가방」은 당시까지 제작된 뒤샹의 작품을 모은 회고전 같은 것이었다. 이 회고전 작품은 외판원이 상품 견본을 넣어 다니는 가방 안에 담겨 있다. 그는 노동 집약적인 콜로타이프 인쇄 방식을 동원해 자신의 작품을 공들여 복제했다. 복제품의 개수는 작품 당 평균 30여개에 달했다. 미술가 자신이 직접 제작했다는 점에서 이 복제품들은 ‘채색 원본(coloriages originaux)’이었다. 일부는 뒤샹의 사인을 포함하고 있거나 공증을 받았다는 점에서 ‘원(原)’본들이었지만, 레디메이드라는 특성상 복제품이기도 했다. 그의 작업은 원작과 복제품을 마주보는 거울의 끝없는 원근법처럼 서로를 위치시켰던 것이다. 그는 진품이라는 미술가의 수작업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벤야민의 견해를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말로가 말한 ‘위대한 창조자’의 영혼을 끝없이 계속되는 강박적인 반복 속에 가둠으로써 말로의 견해 또한 부정했다.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의 말처럼 “뒤샹은 집요하게 지속되는 반복 강박의 형식을 통해서 유기체와 비유기체,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자아를 재현한다. 복제의 행위는 자아를 구성하는 동시에 파괴한다. ……그가 발견했던 자신은 바로 다름 아닌 레디메이드이다.”

 

 

2. 아우라

1. 아우라의 특징

벤야민은 아우라에 대하여,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자연적 대상의 분위기)’라고 정의하였다. 키워드는 ①유일무이한 현존성 ②일회적 현존성 ③원본Original ④분위기Aura ⑤진품성 ⑥사물의 권위라고 할 수 있다.

2. 원본과 기술적 복제품의 비교

․ 기술적 복제는 원본에 대해서 수공적 복제보다 더 큰 독자성을 지닌다.

․ 기술적 복제는 원본이 포착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원작의 모상(模相)을 가져올 수 있다.

․ 기술적 복제품은 예술작품의 존속에 아무런 손상을 입히지 않을 수도 있다.

(예 : 영화작품의 자연풍경)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특징인 복제품의 대량생산현재화가 전통적인 것을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고 보았으며, 그러한 동요를 위기이자 변혁으로 보았다. 이는 대중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지어진다. 특히 영화는 대중운동의 강력한 매개체가 된다.

벤야민이 보기에, 아우라의 붕괴는 현대 지각작용의 특징이다. 분위기의 붕괴를 초래하는 사회적 조건으로 ① 대중은 사물을 보다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오고자 하며 ② 대중은 복제를 통해 모든 사물의 일회성을 극복하고 싶어 한다. 둘 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3. 영화

1) 영화배우의 연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배우가 관중이 아닌 카메라 앞에서 자기 자신을 연출해 보이는 일이라는 것이다. 피란델로의 말을 들어보자.

<영화배우는 마치 유배지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는 무대로부터 유배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인격으로부터도 유배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무어라고 꼬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감을 느끼는데, 이러한 공허감이 생겨나는 까닭은 그의 육체가 자기 자신에게서 떠나버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순간적으로 사라지며, 또 그의 실체, 그의 삶, 그의 목소리, 그가 불러일으키는 소음 등도 자신에서 이탈되어 무성의 영상으로 바뀌고, 그런 다음 한순간 스크린에서 명멸하다가 다시 정적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그런 느낌에서 공허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 조그만 기계는 자신의 그림자를 가지고 관중 앞에서 재주를 부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자신은 이 기계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생산과 소비의 분리, 분업화, “부분인간”의 출현 등. 오늘날의 노동과정은 보다 더 세분화되었다. 아이들의 대학입시설명회를 들어보면, 대학을 가는 것도, 간 이후도, 인간이 점점 세분화되는 교육과정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교육은 미세먼지 수준으로 해놓고 정작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은 전체를 아우르는 능력이다.

 

 

감독이 원하는 배우

“영화 촬영을 위하여 촬영장에 나타나는 영화배우의 경우, 감독의 전체 작품 구상을 미리 아는 것은 해로울 뿐이다. 왜냐하면 감독은 개개의 장면에서 연극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연기의 전폭적 자유를 배우에게 부여하지만 극중 인물의 구성은 감독 혼자서만 짜기 때문이다. 만일 영화배우가 자신이 맡은 극중 인물의 역할을 스스로 짜게 되면 감독의 전체 구상에 의하여 극중 인물에게 부여한 상황 속에서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뺏기게 된다. 그리고 배우를 자신이 원하는 마음의 상태로 옮겨 놓아야 하는 감독은 배우에 의해 조금이라도 그 방향이 빗나가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배우를 감독이 요구하는 마음 상태로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는 주어진 외적 상황과 배우의 천성에 달려 있는데, 감독은 바로 이 배우의 천성과 씨름하게 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영화배우는 의도적으로 연기할 수는 없는 심리적 상태에 젖어 있어야만 한다. 인간은 걱정이 있으면 이를 철저히 감출 수 없게 되는데, 영화가 바로 그런 식이어야 한다.

영화배우는 카메라 렌즈 앞에서 그때그때의 극적 분위기에 걸맞는 연기를 확실하고도 직접적으로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감독은 이렇게 촬영된 낱낱의 필름 사본들을 마치 배우가 실제로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것처럼 관찰하면서 작품 속의 사건에 내적 논리성을 부여해 줌으로써 자신의 예술적 목표에 따라 이 조각조각의 필름들을 편집하는 것이다.”

“(연극에서)배우는 영감의 순간에 관객들과 맺는 교감의 행복을 만끽하는 자이다. 배우가 관객들과 교감하면서 하나가 되는 순간보다 더 중요하고 더 지고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 순간에 배우와 관객은 그들의 교감을 통해서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다. 연극 공연은 오직 배우가 창조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동안에만 가능한 것이며 배우가 무대에 존재함으로써만이 가능하고 배우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생동하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배우가 감정 구축과 악센트와 힘의 배분 그리고 억양의 조절 등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왜냐하면 영화배우는 영화를 이루는 조각조각의 장면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영화는 이런 조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작품을 이루기 때문이다. 영화배우의 유일한 과제는 인간으로서 생기 있게 사는 것과 감독을 신뢰하는 일이다.”

순간이라는 일회성에 스포일러가 되지 않도록

“나는 여배우에게 작품의 주제를 말해 주지 않았다. 그녀가 이 장면을 의식적으로 연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이 장면에서 여주인공 역할의 모델이었고 자신의 운명을 예측하지 못했던 나의 어머니가, 그 당시 처했던 심정에 사로잡혀야 마땅한 것이다. 만일 여배우가 남편과의 관계가 추후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 이 장면에서 다르게 연기했을 것이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랬을 경우 여배우의 연기는 달랐을 뿐만 아니라 솔직하지도 않고 예비 정보 때문에 왜곡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녀는 담담하고 무의식적으로, 의도적이지 않게......마지막 한 가닥의 기대를-남편이 돌아오리라는- 버리지 않은 채 연기하였고, 우리들은 이 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우리들은 영화에서 오직 이러한 순간들의 일회성(一回性)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여배우는 칠흑 같은 어둠에 싸인 자신의 삶의 비밀스런 한 구석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가 자신의 심리적 ․ 육체적 상태와 감성적 ․ 지성적 상태에 걸맞게 오직 자기 자신의 독특한 영적(靈的) 상태를 자신의 독특한 형식에 담아 표현하는 것이다.”

『봉인된 시간』, 「영화배우에 대하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영화로부터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적 업적이 영화가 전통적인 예술관에 대한 혁명적인 비판을 촉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러시아 영화에서 보였던 일부의 배우가 보여준, 즉 자기 자신을 연출하는 민중 말이다. 그러나 그 당시 이루어지고 있던 그 분야의 연구나 서구영화산업은 여기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았다. 서구의 영화산업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스펙터클이나 엉뚱한 상상력을 부채질하는 데 주로 관심을 가졌다.

2) 영상

화가와 카메라맨

벤야민의 글을 읽을수록 진실성은 도구나 형식의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화가와 카메라맨을 마술사와 외과의사로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외과의사는 마술사와는 극단적으로 대조가 되는 사람이다. 손을 얹어 환자를 낫게 하는 마술사의 태도는 환자의 몸에 깊숙이 손을 대는 외과의사의 태도와는 다르다. 마술사는 자신과 환자와의 자연스러운 거리를 유지한다. 그러나 외과의사는 환자의 내부에 깊숙이 들어감으로써 환자와의 거리를 크게 좁힌다. 마술사와 정반대의 태도이다. 외과의사는 마술사와는 달리 결정적인 순간에 그의 환자를 인간 대 인간으로 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수술을 통하여 그의 내부로 파고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마술사와 외과의사의 관계는 화가와 카메라맨의 관계와 같다. 화가는 주어진 대상으로부터 자연스러운 거리를 유지하는 데 반해 카메라맨은 작업할 때 주어진 대상의 조직에까지 깊숙이 침투한다. 그 결과, 화가의 영상은 하나의 전체적 영상이 나오지만, 카메라맨의 영상은 여러 개로 쪼개어져 있는 단편적 영상들로서, 이 단편적 영상들은 새로운 법칙에 의해 다시 조립된다. 카메라를 집중적으로 침투시키는 작업을 바탕으로 얻은 영상이기 때문에 영화는 그 무엇보다도 현실적으로 와 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3) 관객(혹은 대중)

대중의 변화

기존의 회화는 한 사람 내지 극소수의 사람에 의해 감상되어 왔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영화관에서는 개개인의 반응이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처음부터 집단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개별적 반응들은 밖으로 표현됨과 동시에 또한 상호 견제를 하게 된다.

인간의 지각능력 심화

영화는 결과적으로 지각능력의 심화를 가져다주었다. 영화는 사물을 확대(클로즈업)하여 보여주고, 우리에게 익숙한 사물의 숨겨진 세부적 사항에 초점을 맞추고, 카메라의 뛰어난 사물파악 능력에 의해 진부한 주위환경을 천착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필연성에 대한 인식을 증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난 공간을 확보해 주고 있는 것이다.

클로즈업된 촬영 속에서 공간은 확대되고 고속도 촬영 속에서 움직임 또한 연장되었다. 확대촬영은 불분명한 것들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주고, 물질의 전혀 새로운 구조를 밖으로 드러내어 보여 준다. 육안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성질의 것을 카메라는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충동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된 것처럼 우리는 카메라를 통하여 비로소 시각의 무의식적 세계를 알게 된 것이다.

벤야민은 인간의 지각능력의 심화를 가져왔다고 보는데, 과연 그러한가?

대중들이 영화에서 찾는 것, 충격

다다이스트들은 회화나 문학의 수단을 통하여 충격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그들은 작품의 분위기를 가차 없이 파괴해 버리고, 생산 수단의 힘을 빌어 그들의 작품에다 복제의 낙인을 찍음으로써 공적인 불쾌감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퇴폐에 맞서기 위한 일종의 폭탄이 되고자 하였던 것이다. 야만적 에너지로 충만한 예술운동이었던 다다이즘처럼 오늘날의 대중들이 영화에서 찾는 것은 충격효과이다.

때때로 영화의 장면은 눈에 들어오자마자 곧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 버린다. 뒤아멜 Duhamel은 이러한 사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히 언급하였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내가 생각하고자 하는 바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움직이는 영상들이 내 사고의 자리에 대신 들어앉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영상을 보는 사람의 연상의 흐름은 끊임없는 영상의 변화로 인하여 곧 중단되어 버린다. 영화의 충격효과는 바로 이러한 데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벤야민은 영화가 그 기술적 구조의 힘을 빌어 분위기라는 포장으로부터 해방시킨다고 보았다.

 

 

4. 정신분산으로서의 오락 & 정신집중

대중은, 예술작품을 대하는 일체의 전통적 태도가 새로운 모습을 하고 다시 태어나는 모태이다. 양은 질로 바뀌었다. 예술에 참여하는 대중의 수적 증가는 참여하는 방식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대규모적 참여가 저 악명 높은 모습을 하고 처음 등장했다는 사실을 두고 관찰자들이 상황을 잘못 판단해서는 안 된다.

뒤아멜의 과격한 발언, 즉 예술은 정신 집중을 요구하는 데 반해 대중은 정신분산(오락)을 원한다는 식의 얘기는 늘 있어왔던 상투적인 얘기라고 벤야민은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신분산으로서의 오락 Zertreuung과 정신집중 Sammlung에 대해 언급한다. 예술작품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하는 사람은 그 작품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옛날 중국의 전설에 어떤 화가가 자기가 완성한 그림을 보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는 식으로 예술작품 앞에서 정신집중하는 사람은 그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 이에 반해 정신이 산만한 대중은 예술작품이 자신들 속으로 빠져들어 오게끔 한다. 이러한 사정을 잘 보여 주는 것이 건축물이라고 그는 말했다. 특히 로마의 건축은 벤야민이 말하는 오락적 ․ 집단적 방식으로 그 수용이 이루어지는 예술작품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 제정기 건축물을 통해 정신분산으로서의 오락이 갖는 긍정적 측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건축도 중요한 통치수단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주택이라고 불리는 그의 황궁을 보면 웬만한 귀족의 주택보다도 소박하고 규모도 작았다. 이 주택은 팔라틴(팔라티노 언덕)이라는 로마 황궁단지의 시작을 알리는 건물이지만 이후 황제들의 화려한 황궁들에 비하면 너무 검소하고 소박해서 그의 생활이 얼마나 극기적이었는지를 잘 알게 해준다. 무엇보다 포룸 로마눔을 대거 정비하고 확장했다. 일상 시민활동을 위한 면적 확장에 더해 여러 신전을 세움으로써 로마 시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네로를 겪은 뒤 로마는 플라비우스 왕조로 넘어가는데 이 시기 동안은 로마 제국의 집단적 정체성이 확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을 대표하는 건물이 콜로세움이다. 베스파시아누스 때 짓기 시작해서 티투스 때 완공했으며 로마의 원형극장, 나아가 로마건축 전체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검투사 시합 같은 부정적 놀이에서 각종 정치집회와 문화행사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집단욕망이 공공사의 형식으로 분출되는 통로였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콜로세움은 여전히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의 관점에서 보면 대제국 로마의 거대 욕망이 자칫 개인사로 변질되어 타락할 위험성을 공공사로 바꿔 표출시키는 순기능도 가졌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콜로세움을 지은 뒤 로마제국은 2세기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네이버캐스트] 건축문화사, 「로마 건축과 동서양 정치·문화」, 『로마 제정기 건축』

오락으로 정신이 산만해진 사람도 익숙해질 수가 있다. 아니 어떤 과제를 정신분산적 오락 속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능력 자체가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일이 이미 하나의 습관이 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예술이 제공해 주게 될 정신분산적 오락을 통해서 우리는 지각이 당면하고 있는 새로운 과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는가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또 개개의 인간들은 그러한 과제를 회피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술은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바로 그곳에서 예술의 가장 어렵고 가장 중요한 과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은 오늘날 이러한 과제를 영화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충격효과라는 면에서 영화는 이러한 수용방식, 즉 정신분산적 오락이라는 측면에 잘 부응하고 있다. 영화는, 관중으로 하여금 비단 비평적 태도를 갖게 함으로써만이 아니라 그와 아울러 이러한 영화관에서의 관중의 비평적 태도가 주의력을 포함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종교의식적 가치를 뒷면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관중은 시험관(試驗官)과 같은 역할을 하지만, 그러나 그는 정신이 산만한 시험관인 것이다.

 

 

5. 기술복제시대의 전쟁 미학

생산력의 자연스러운 이용이 소유질서에 의해 저지당할 때는 기술적 수단과 속도 및 에너지 자원의 증대는 불가피하게 생산력의 부자연스러운 이용으로 치닫는 수밖에 없을 것이고, 또 이러한 필연성의 마지막 출구가 바로 전쟁이다. 전쟁의 파괴성은, 사회가 기술을 사회의 유기적 일부로 병합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으며, 또 기술이 사회의 근원적인 에너지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제국주의적 전쟁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제국주의적 전쟁은 일종의 기술의 반란이다. 강의 흐름이 나아갈 운하를 파는 대신 기술은 인간의 흐름을 전쟁의 참호 속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고, 또 비행기를 통해 씨를 뿌리는 대신 화염폭탄을 도시에 뿌리고 있으며, 그리고 가스 전쟁 속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분위기를 없애는 수단을 발견하였다. 벤야민은 자기로부터 소외된 인류가 전쟁을 통해 스스로의 파괴를 최고의 미적 쾌락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나가며

우리 각자의 삶이 갖는 일회성(아우라)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우리는 삶의 순간마다 초보일 수밖에 없고, 초보여야만 한다. 그것이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 즉 그 사람의 고유한 아우라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초보임을 감추는데 너무도 익숙해져 버려서 아예 그 감각이 무엇인지 잊고 사는 듯하다. 순간을 초보로 겪어낸다는 것에 대해 벤야민의 글이 보충될 것 같아 여기에 옮긴다.

“여자 점쟁이에게 미래에 대해 묻는 사람은 다가올 사건들에 대해 내면에서 예감하고 있는 것, 그러한 여자들에게서 듣게 될 것보다 천 배나 더 정확하게 예감하고 있는 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포기해버리게 된다. 그가 여자 점쟁이에게 가는 것은 호기심보다는 태만에 이끌려서이며, 그러한 사람이 자기 운명이 밝혀지는 것을 지켜볼 때 보여주는 순종적인 둔감함보다 더 용감한 자가 미래에 손을 댈 때의 과감하고도 민첩한 손놀림과 닮지 않은 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임기응변은 미래의 정수(精髓) 자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 진행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지각하는 것이 저 먼 미래를 예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책 속에서 추억은 마치 자외선처럼 본문의 난외에 예언으로서 적혀 있던 보이지 않는 글자를 각자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것의 의도를 곡해해 아직 살지 않은 삶을 트럼프나 심령이나 별에게 인도해버려 결국 삶이 순식간에 탕진되고 오용된 후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오게 만든다면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몸으로부터 온전히 자기 힘으로 능숙하게 운명과 겨루어 승리할 수 있는 힘을 속여서 빼앗아버린다면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미래의 위협을 충실한 ‘지금(Jetzt)’으로 전환시키는 것, 이 유일하게 바람직한 텔레파시적 기적은 신체적인 임기응변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일방통행로』, 「마담 마리안느, 좌측 두 번째 통로」, 발터 벤야민

【참고문헌】

『벤야민의 문예이론』, 『일방통행로』, 『봉인된 시간』, 『1900년 이후의 미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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