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완전히 다른 세계
기픈옹달
/ 2018-10-02
/ 조회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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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로 하늘로 밀어 올리는 글이 있는가 하면, 어떤 글은 땅으로 땅으로 내리 끄는 글이 있다. 저 하늘 위에 무엇이 있느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하는 말이 다르겠다. 이상, 진리, 보편, 신, 절대자 등등이 있으련만 누구는 ‘문학’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다.
지금은 구체적인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유럽의 어느 철학자가 ‘문학의 공간’이라는 기묘한 표현을 사용하는 걸 읽은 적이 있다. 아마 그쯤 <서유기>도 읽었던듯 싶다. <서유기>는 기묘한 이야기가 가득한 책이다. 헌데 흥미롭게도 어디가나 인간 세상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원숭이들이 모여 사는 수렴동이나, 옥황상제가 있는 천계, 용왕이 있다는 용궁이든 인간 세상의 복사판이 아닌 곳이 없다. 어디든 권력이 있으며, 위계가 있고, 생사의 고민과 유무형의 다툼이 있다. 중국의 책 가운데 <서유기>만큼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는 책이 어디 있으련만, 죄다 이 세상의 복사판이니 과연 ‘순수한 문학의 세계’라는 게 가능키나 할까. 그러니 이 땅의 말썽꾸러기가 천계에서도 말썽꾸러기가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만약 ‘중국 문학’이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바로 이런 특징, 그저 현실의 세계를 오롯이 담아내거나 비틀어버리는 글이 아닐까 생각해보곤 한다. 무릇 글이 추구하는 참됨이란, 뭐 대단한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먹고 마시며 울고 화내는 인간들의 모습 자체가 아닐까. 그런 면에서 루쉰의 글쓰기는 서구 사람의 그것과, 혹은 문학연하는 사람의 그것과는 출발점이 영 다르지 않을까. 어쨌든 그는 문학의 순수성이니 보편이니 하는 것을 그리 믿지 않았으며, 이른바 작품을 써내는 작가 정신도 별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글이 가진 미덕이 있다면, 거꾸로 그의 글이 가진 독소가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이겠다. 그는 아래로 아래로 끌어 내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의 글은 그가 살았던 20세기 중국으로 끌어 들이는 힘이 있다. 전혀 사변적이지도 않고 감상적이지도 않다. 그가 숨쉬며 살았던 20세기 초, 상해의 모습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세계에 갇혀 있지도 않다. 더 내리끌어 그저 그런 인간들이 서로 시샘하고 다투는 야생의 공간을 보여준다. 그래서 결국 저런 다툼은 그때도 지금도 여전히 반복되고, 인간이란 그렇게 고상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어 버린다.
그러나 한층 더 위험한 부분은, 거친 황야같은 가 없는 들판에 내던지는 것도 모자라 끝도 없는 나락으로 자꾸 끌어들이곤 한다는 점이다. 이 무형의 공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잘 가늠이 되지는 않으나, 문득 괴이하거나 섬뜩함을 선사하곤 한다. 어쨌든 그의 글은 단잠을 깨우고, 그것도 모자라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로 이끌며, 나아가 캄캄한 한밤의 아득한 공간, 혹은 한발도 내딛을 수 없는 좁디좁은 철방에 가둬버린다. 이 적막과 시끄러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의 글에서 번갈아가며, 혹은 함께 보이는 기묘한 특징임은 틀림없다.
당시 루쉰을 비판하는 문학가들은 주로 그가 고고하며 도도하지 못함을 탓했던 것으로 보인다. <평화와 전쟁>(!)과 같은 대작을 쓰지도 못하고, 게다가 싱클레어나 톨스토이와 같은 대문호가 되지도 못하며, 그저 말 그대로 잡다한 잡문雜文을 끄적거린다는게 이른바 문학가들의 지적이었다. 그러나 루쉰은 그들의 공격을 그저 흘려보내며 이렇게 응수한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영구적인 것은 없다. 유독 문학에만 신선한 선골仙骨이 있는 듯이 말하는 것은 꿈꾸는 사람들의 잠꼬대이다.” - <독서잡기>
이러한 인식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데에서 출발한다. 세계는 본디 갈래갈래 나뉘어 있다. 한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세계는 나뉘어 있다. 국경보다 단단한 벽이 있다. 그는 바르뷔스의 <본국어와 모국어>라는 글에서 이 단절을 읽어낸다. 그가 이 글을 빌려 소개하는 사건은 이렇다. 프랑스의 한 부유한 집에서 사경을 헤매는 병사 셋을 초대했다. 한 공간에 있었으나 그 부유한 집의 소녀와 프랑스 병사들은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그 소녀에게는 병사들이, 병사들에게는 소녀와 부잣집이, 서로 낯설었다. 특히 병사들은 그 집에서 ‘뼈가 쑤실 정도로 조심해야 함을 느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을 발견할 뿐이다.
“‘이 세상엔 두 가지 세계가 있다. 하나는 전쟁의 세계요, 다른 하나는 금고金庫의 철문 같은 대문이 있고 예배당과 같이 정갈한 부엌이 있으며 아름다운 저택이 있는 세계다. 완전히 다른 나라다.’” - <독서잡기(2)>
이 완전히 다른 세계는 루쉰의 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중국과 서양, 문언과 백화, 봉건과 진보, 남성과 여성 등등. 루쉰의 말처럼 이 단절은 어디서나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모든 존재와 존재 사이에 있는 실존적 문제 따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부잣집의 여유와 병사들의 치열함 사이에 있는 실제적이고도 경험적인 격차를 말하는 것이겠다. 이는 위의 병사들처럼 ‘뼈가 쑤실 정도’의 불편함을 느껴본 사람만이 아는 게 아닐까. 공기는 물론 언어, 표정, 손짓 하나하나가 어색한 공간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것이다.
흥미롭게도 루쉰은 중국인에게 이 격차,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만나는 순간의 낯설음을 극복하는 지혜가 있다고 칭송한다. 그것은 제 3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중국인들은 아주 총명하다. 일찌감치 이럴 때 임기응변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을 발명해 놓았다. 즉 ‘오늘 날씨가 ....... 하하하!’다. 만일 연회 자리일 경우는 토론을 피하고 그저 가위바위보 게임만 하면 된다.” -<독서잡기(2)>
그의 다른 글 <입론>에서 이야기했던 것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도, 그렇다고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닌 또 다른 말. 이것은 총명한 방법도, 바보같은 방법도 아니라 어디가나 볼 수 있는 일상적인 방법이다. 누구나 알고 누구나 매일 하는. 따져보면 명절, 피붙이들이 모여 나누는 대화의 태반이 이것 아닌가. 명절날 오랜만에 친척들이 모이면 서둘러 TV를 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니면 화투판을 깔거나.
루쉰의 말을 빌리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는 비평가의 망치를 들고, 하나씩 부숴보는 사람이다. 깨지는 것은 깨지는 대로 깨지지 않는 것은 깨지지 않는 대로. 이 비평가는 웃음을 흘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수작을 걸지도 않는다. 냉조열풍冷嘲热讽. 차가운 조소와 신랄한 풍자가 그의 무기이다.
“아폴리네르 공작이 노래하길, 공작이 꼬리를 들어 올리면 앞은 아주 휘황찬란하지만 뒤쪽의 항문도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그러므로 비평가의 비평이란 것이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비평가가 이때 꼬리를 들어 올리면 그의 똥구멍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런데도 그는 왜 또 하려 하는가? 그것의 정면은 여전히 휘황찬란한 모습의 깃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공작이 아니고 고작 오리나 거위 종류라면 생각을 좀 해보아야 한다. 꼬리를 들어 올리면 드러나는 것이 무엇뿐인가를!” - <상인의 비평>
<꽃테문학>이라는 제목처럼 그는 자신을 향한 비판을 그대로 받아낸다. 매판 문인이라는 손가락질 까지도. 그렇다고 자신을 향한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은 아니다. 어쨌든 그는 받아치지 않는다. 자신의 순수함이나 진솔함 따위를 변호하는데 힘을 들이지 않는다. 이 집요한 싸움꾼은 자신에게 던져진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자신을 노린, 암전을 날린 그 상대를 향해 다시 창을 날릴 뿐이다.
인상깊은 것은 그가 모든 인간의 불행한 현실로, 늘 굶주리게 된다는 사실을 짚어냈다는 점이다. 늘 인간은 굶주린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모두 밥벌이의 현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누구의 밥벌이는 손쉽고 누구의 밥벌이는 고달프다는 데 있다. 나아가 비극은 손쉬운 법벌이의 삶이 고달픈 밥벌이의 삶을 미화하는 데 있다. 오래된 중국 전통의 기술을 예로 들자면 ‘안빈낙도법’이라 하겠다. 네 현실을 만족하고 삶을 즐기라는 말. 자기 일에 흥미를 가지라는 말. 지당하고 옳은 말이다. 허나 밥벌이에 흥미를 가지려면 좀 수월한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당연하다. 일리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좀 가벼운 직업이어야 하리라. 석탄을 캐거나 인분을 퍼내는 그런 일은 고사하고 최소 매일 열 시간 일해야 하는 상하이 공장 노동자들은 저녁이 되면 과로로 기진맥진하게 된다. 사고를 당하는 것도 대개 이 시간이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으니 자기 몸도 못 돌보는데 어떻게 일에 흥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가 흥미를 목숨보다 더 중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만일 그들에게 이에 대해 물어본다면 내 생각에 분명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하라. 흥미를 유발하는 일이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다라고.” - <안빈낙도법>
그는 현실, 지금 발 딛고 살아가는 사회에 그의 출발점을 둔다. 공론, 빙빙도는 말, 힘없는 언어는 이 현실에 쉬이 깨지기 마련이다. 동정심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이 야생의 벌판, 인간 세계의 불행이 있다면 약육강식이 아니라, 이 현실을 덮어두는 헛된 소리들이 끊임없이 재생산 된다는 점이겠다. 그러나 루쉰은 이 야생의 벌판을, 황량한 세계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이다.
“현실이란 한 치의 동정심도 없는 냉정한 것이니 이런 헛된 공론은 산산히 부숴 버릴 수 있다. 명백하고 현저하게 드러나 있는 현실이 말하고 있다. 내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사실은 더 이상은 제발 ‘공자 왈 맹자 왈’ 공리공담 놀이를 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영원히 쓸데없는 것이므로.” - <안빈낙도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