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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발제]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5장 종교에 대해
케테르 / 2018-10-05 / 조회 1,700 

본문

[선우 님이 지난 주에 15장에 대해 따로 발제를 하라고 엄명하여서 정리해둔 것을 올립니다. 오늘 제가 지각 했고 세미나 흐름을 위해서 여기에서 발제합니다. 본문 중심으로, 약간의 다른 정보를 가미한 정도로만 정리했음]



15장 정리발제 : 금욕적 이상과 종교의 본질 

 

이 장에서는 앞선 장들(1-10장, 14장)에서 다룬 원한과 가책에 이어 ‘금욕적 이상’에 대해 다룬다. 니체는 이를 세번째 단계라고 부른다. 원한 - 가책 - 금욕적 이상으로 이어지는 주제들은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서 다룬 핵심 내용이다.

 

1. 

니체는 종교를 두 유형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때로는 여러 유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각주 94를 보면 ‘강자들의 종교’(선악을 넘어), 허무주의적이고 반응적인 종교에 대립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종교(권력의지, 안티그리스도), 종교로서의 이교의 긍정적 의미(선악을 넘어), 그리스 신들의 적극적 의미(도덕의 계보학), 허무주의적 종교이지만 복수심이나 잘못의 감정이 없는 불교(안티그리스도), 예수의 개인적 유형, 원한, 가책, 원죄의 관념의 부재(안티그리스도), 결국 도덕적인 신만이 반박된다(권력의지)’ 등에 대해 니체가 언급한 바 있다. 이를 통해 보건데 니체는 ‘신’ 개념이나 종교 자체를 부정하기보다는 그 힘의 관계에 주목하였으며, 특히 도덕적 종교에 대해 비판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니체가 긍정한 종교는 강자들의 종교,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종교, 디오니소스적인 종교, 원한이나 가책의 개념이 없는 종교로 요약할 수 있다.

 

2.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는 종교에 대한 니체의 기본 관점을 요약한다. “그 점에서 종교는 본질적으로 원한과 가책과 관계가 없을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신이다.  … 니체는 끊임없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신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종교들이 있음을 말한다”(252). 니체는 종교를 독점(장악)할 수 있는 다양한 힘들에 의해서 종교의 다수의(여러) 의미를 평가한다. 니체가 말하는 강자의 종교가 있다. 예수를 종교의 개인적 유형으로 고려한다면, 예수가 원한과 가책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는 복음(즐거운 소식)에 의해 정의되고, 기독교가 예수의 것이 아닌 종교인 것처럼 그는 기독교의 것이 아닌 삶을 소개한다(252). 즉 니체는 예수 자체를 비난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니체는 예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예수를  유일한, 즉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독교인’이라고 말한 바가 있다. 니체는 바울이 예수와 달리 원한과 가책의 종교인 기독교를 만든 자라고 보고 있다.

 

3.

니체는 바람직한 유형학을 제시한다. 그 유형학은 ‘다음의 원칙, 즉 우월한 단계나 힘들의 유사성을 고려하는 유형학’이다. 모든 것 속에서 우월한 단계들만이 중요하다. 종교는 그것을 독점할 수 있는 힘들이 존재하는 만큼의 의미를 갖는다(253).

 

그러나 종교 자체는 그것을 독점하거나 그것 자체가 독점하는 힘들과 다소 큰 유사성이 있는 힘이다. 종교가 ‘다른 본성의 힘들’로 간주되는 동안, 그것은 그것이 수단이기를 중단할 자신의 우월한 단계 - 유일하고 중요한 것 - 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와 반대로, 그것이 ‘동일한 본성의 힘들’에 의해 정복될 때, 혹은 그것이 성장하면서 그 힘들을 독점하고 어린 시절 동안 그것을 지배한 그 힘들의 굴레를 뒤흔들어 놓을 때, 그 때 그것은 자신의 우월한 단계와 더불어 자기 자신의 본질을 발견한다.

 

즉 니체는 종교의 어떤 우월한 단계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원한과 가책을 넘어서는 어떤 단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의 맥락에서는 금욕적 이상을 말한다.

 

들뢰즈는 종교가 ‘다른 본성의 힘들’에 의해 종속되어 자신의 가면을 스스로 벗을 수 없는 상태’가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그 예를 ‘철학자들의 손 안에 있는 [선택과 교육의 방법]으로서의 종교’를 예로 든다(253). 여기 철학자는 아마 형이상학적인 철학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고, 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신학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신학 체계의 정초를 만든 사도 바울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종교가 [스스로 주권자로서 행동]할 수 있을 때, 생존하기 위해 어떤 가면을 다른 힘에세거 빌릴 때 자기 자신의 본질을 발견한다(253). 그래서 니체에 의하면, 종교는 가책, 원한 쌍방 모두에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가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려된 원한과 가책’은 종교의 요소들을 적극적인 힘들이 그것들을 꽉 움켜쥐고 있는 굴레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그것들을 탈취하는 반응적 힘들을 표상한다. 그것들의 ‘형식적 상태에서 원한과 가책’은 종교 자체가 정복하고 새로운 주권을 발휘하면서 발전시키는 반응적 힘들을 표상한다. 원한과 가책, 종교 자체의 우월한 단계들이 그와 같다.

 

여기서 ‘가공되지 않은 상태’란 원한이 가책으로 내면화되지 않은, 즉 가공되지 않은 질료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형식적 상태’란 가책과 고통을 내면화하고 감각화하고 정신화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230 참고).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의 고안자는 예수가 아니라, 가책의 인간, 원한의 인간인 성 바울이다.”(254)

 

4.

종교는 단지 어떤 ‘힘’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종교는 어떤 ‘의지’에 의해서 즉 반응적 힘들을 승리로 이끄는 의지에 의해 생기를 얻어 그것의 우월한 단계로 나아간다. 원한과 가책을 넘어서 니체는 세번째 단계인 금욕적 이상을 다룬다. 금욕적 이상은 원한과 가책의 복합체를 가리킨다. 그것은 원한과 가책을 서로 교차시키며, 서로의 의해 강화시킨다. 원한의 질병과 가책의 고통이 견딜만한 것이 되고 게다가 조직되고 파급되는 수단들의 전체를 표현한다. 금욕적인 사제가 바로 그것이다. 금욕적인 사제는 정원사인 동시에 사육자, 양치기, 의사이다.

 

결국 그것의 가장 심오한 의미는 금욕적 이상이 반응적 힘들을 승리하게 만드는 의지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금욕적 이상은 하나의 의지를 표현한다.]

반응적 힘들은 투영을 발전시키고 필요한 허구들을 조직하는 의지가 없이 결코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저 세상이라는 허구이다. 이로서 “삶과 삶 속의 모든 적극적인 것을 비하하게 하는 것이고, 세계는 외관이나 무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255)

반대로, 무의 의지는 반응적 힘들이 필요하다. 그것은 반응적 형태 아래서만 삶을 감당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삶이 모순되고, 분인되고, 무화’되어야만 하는’ 그 수단으로서 반응적 삶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금욕적 이상의 의미는, 허무주의(니힐리즘)와 반응적 힘들의 유사성을 표현하고, 허무주의를 반응적 힘들의 동력으로 표현하는 것에 있다.

 

[이 장에서 핵심적인 것은 금욕적 이상이 사제적 이상과 동일한 것이며(금욕적 사제), 그 이상은 삶에의 의지가 아니라, 무에의 의지라는 것이다. 니체는 무에의 의지로서의 금욕적 이상은 종교 영역만이 아니라 서양의 철학과 학문과 예술 일반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도덕의 계보’에서 금욕적 철학, 금욕적 학문 등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요약]

1. 니체는 종교에 대해 다양한 유형을 말하고 있다.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종교를 말한다. 디오니소스적 종교.

 

2. 니체는 종교를 독점(장악)할 수 있는 다양한 힘들에 의해서 종교의  의미를 평가한다.

 

3. 기독교를 만든 자는 예수가 아니라 바울이다. 그는 증오와 원한의 인간이다.

 

4. 금욕적 이상은 원한과 가책의 복합체이자 종교의 우월한 단계, 세번째 단계이다. 이는 어떤 의지를 표현한다. 그 의지는 허구를 조직하는 의지, 무의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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