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그라마톨로지] 2부 자연, 문화, 에크리튀르(PP.150∼178)
안지영
/ 2017-08-20
/ 조회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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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미나에서는 제2부 제2장 ‘이 위험한 대리보충’ 부분을 논의하였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1장에서의 레비스트로스에 이어 루소의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데리다가 본격적으로 대리보충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루소는 자기 모순적인 행위를 말하고 썼다는 점에서 데리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분석하기 좋은 텍스트를 제공합니다. 유명한 ‘텍스트 바깥은 없다’는 구절이 이 부분에 등장하기도 합니다. 쟁점을 중심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우선 데리다는 루소의 모순성을 이야기하면서도 루소와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이는 에크리튀르에 대한 루소의 태도를 암시합니다. 루소는 문자언어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신뢰하지 않고 얼른 추방해버리려고 한 것이지요. 그는 문자 언어를 현전의 파괴이자 음성언어의 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에크리튀르를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숨기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와 관련해 대리보충이라는 말 자체가 양가적이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의 대리보충의 역할을 한다는 것과 관련해서 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데리다가 문자는 “음성언어가 사실상 부재할 때 그것을 현전하게 하기 위한 일종의 인위적이고 교활한 술책이다. 그것은 언어의 자연적 운명에 가한 폭력이다”(256)는 구절과 관련해 이를 생각해보면, 음성언어는 현전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자언어의 대리보충을 필요로 하고, 또 문자언어는 이를 통해 음성언어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상황이 제시됨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를 플라톤의 파르마콘(약/독)과 관련지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리보충은 첨가되는 것이고 잉여물이며 다른 충만함을 풍요롭게 해 주는 충만함이고 현전의 과잉이다. 그것은 현전을 겸하고 축적한다.”(257)
다만 대리보충을 형이상학의 역사에서 폄하해온 입장이 루소에게도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성의 문제, 자연법의 문제, 교육의 문제 등으로 이어집니다. 가령 이는 건강하지 않은 어머니를 예외적인 형상으로, 유모를 그에 대한 대리보충으로 치부합니다. 이는 건강한 어머니라는 본질을 가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데리다는 건강한 유모와 같은 대리보충이 어머니의 지위를 위협할 수도 있는 것처럼 문자언어를 위험한 것이자 유혹적인 것으로 여기는 루소의 모순된 의식을 분석합니다.
이는 욕망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시사점을 줍니다. 루소에게는 자위가 악덕과 타락의 모델로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포기할 수가 없게 됩니다. 루소가 자위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그것의 유혹성을 동시에 고백하는 까닭은 이 때문입니다. 데리다는 이를 통해 주체가 자신의 몸을 만지면서 만짐을 당하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완전히 수동적이지도 능동적이지도 않은 어떤 지점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역시 이중의 작용을 합니다. 현전에 다가가면 그것은 ‘순수한 폭력’(죽음)일 뿐이며 오히려 대리보충을 통해 현전과 관계를 맺으면서도 그것과 분리하여 주체를 현전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호의 대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 현전을 얻게 해 주면서, 현전을 거리를 두고 유지하며 제어한다. 왜냐하면 이 현전은 욕망되면서 동시에 두렵기 때문이다. 대리보충은 금지를 위반하며 동시에 준수한다. 이것이 또한 음성언어의 대리보충으로서의 문자언어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276)
더불어 유명하기도 하고 논란도 많은 문장, “텍스트 밖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라는 문장에 대한 해석들이 이어졌습니다. 텍스트 ‘바깥’이라고 이야기되어 왔던 부분 역시도 텍스트라고 본 데리다의 입장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 혹은 회의입니다. 그러니까 데리다가 모든 것을 에크리튀르로 환원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의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일반과학으로서의 후설의 ‘현상학’과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데리다가 차연을 통해 기원으로 자리 잡은 현전에 대해 거리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에크리튀르를 모든 현상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고민이 더 필요하리라는 것입니다. 특히나 심급들의 이질성과 그것들이 접합되어 있는 것에 대해 연구하는 역사과학을 상정했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던 알튀세르의 기획과 대비해서 말입니다.
“책읽기가 텍스트를 중복하는 데 만족하지 않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텍스트를 그것과는 다른 무엇으로 방향 지워서, 즉 텍스트 밖의 어떤 지시체나 텍스트를 벗어나 어떤 기의로 방향 지워서 위반하는 것이 합당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하나의 예에 대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하는 방법론적 고찰들은 우리가 위에서 지시체나 초월적 기의의 부재와 관련하여 개발한 일반적 명제들에 종속적이다. 텍스트 밖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뼈와 살이 있는’ 이들 존재들의 이른바 실제적 삶이라는 것 속에는 글쓰기밖에 없다는 것이다.”(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