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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진실의 용기 9~10장 발제 +1
제씨 / 2017-08-20 / 조회 1,171 

본문

푸코 [진실의 용기] 9장

 

<라케스>, 윤리적 파레지아의 전형적 사례

<라케스>는 한편에는 용기에 대한 진실과 진실의 용기의 결합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파레지아의 실천과 자기의 돌봄이라는 거대한 주제와의 결합이 관련되어 있어, 윤리적 파레지아의 전형적 사례이다

 

<라케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비교

<라케스>에서 소크라테스가 솔직한 말하기를 사용하는 대상은 성인, 그것도 나라에서 존경받고 명예를 가진 중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용기를 증명할 수는 있지만 용기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는 없다. 반대로 <알키비아데스>에서는 소크라테스는 파레지아를 청년들 앞에서 펼친다. 이 청년들은 아테네를 통치할 야망에 어울리는 자질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 두 대화를 통해 <라케스>는 우리는 용기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알키비아데스>는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실재인 영혼의 발견으로 끝맺음한다. 하지만 두 대화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 소크라테스의 파레지아가 그들 자기를 설명할 수 있는지 묻는데 사용되고, 둘째, 자기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파레지아는 또한 그들이 그들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이 두 대화의 공통점은 소크라테스는 타인의 돌봄 속에서 자기 돌봄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영혼의 형이상학과 실존의 미학

<알키비아데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질문한다. “당신은 자기를 돌봐야 한다는데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돌보는 것이 뜻하는 건 무엇일까요? 우리가 돌봐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psukhe임을 보여준다. 존재론적으로 육체와 구분된 실재(reality)로서, 돌보아야 할 것으로서의 프시케를 확립하는 것은 진실-말하기의 양식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의 돌봄이라는 근본적이고 반복되는 주제로부터 미래의 형이상학적 담론의 자리, 즉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에 대해 말하고, 품행 규칙과 윤리의 차원에서 그 존재의 확립에 뒤따르는 것에 대해 말하는 형이상학적 담론의 자리를 향해 간다.

 

반면에 <라케스>는 <알키비아데스>와 같이 자기에 대한 삶과 자기의 돌봄에서 시작하지만, 자기 확립은 삶을 통해 설명해야 하는 존재방식, 행위방식으로서의 자기의 발견에 의해 이뤄진다. 설명되어야 하는 것, 이 설명활동의 객체는 바로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bios, 삶으로, 이 실존을 인도하는 방식으로 이끈다.

[알키비아데스-라케스, 프시케 - 비오스, 영혼 - , 영혼의 형이상학 - 실존의 스타일론]

 

실존의 기술과 진실한 담론

진실한 삶/실존의 미학이라는 문제의식의 출현과 관련하여 푸코는 소크라테스에게서 진실 말하기의 구비와 실존의 미학이라는 원칙이 자기의 돌봄 속에서 합쳐지는 계기를 찾아보려 했다. 즉 영혼의 형이상학이라는 경로와 삶의 미학이라는 경로말이다. 이 두 주제는 현실에서 항상 결합된다.

 

실존의 스타일론은 영혼의 형이상학의 실천으로 투사되거나, 적용되거나 귀결될 수 없는 것으로, 이 둘의 관계는 유연하면서 가변적이다. 관련성이 있지만 굉장히 유연해서 동일한 영혼의 형이상학에 결부된 전혀 다른 실존의 스타일이 존재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4세기와 5세기의 기독교 금욕주의의 스타일은 16세기 금욕주의의 스타일과는 전혀 달랐다.

 

견유주의에서 삶의 양식에 관한 진실말하기

견유주의는 삶의 양식과 진실말하기가 직접적이고도 즉각적으로 결합된 철학형식처럼 보인다. 견유주의의 사례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견유주의자의 주된 특성인 파레지아

견유주의자들은 항상 파레지아를 실천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파레지아라는 용어가 견유학파를 위해 따로 마련된 것이 아니고 물론 독점적으로 그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지만, 파레지아가 번번히 견유학파의 특징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것은 사실이다.

 

1. 디오게네스가 인간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의 대답으로 파레지아라고 했다. 실존의 아름다움이라는 주제, 한 사람의 실존에 부여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형식이라는 주제와 파레지아의 실천, 자유롭게 말하기라는 주제가 여기서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2. 에펙테토스는 견유주의자는 아니지만, 자기 자신의 모습인 견우주의자의 초상을 묘사했다. 에픽테토스는 견유주의자의 역할이 정탐꾼, 정찰병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kataskopos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적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가능한 드러나지 않게 관찰하기 위해 본대에 앞서 보내지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들은 돌아와서 두려움에 떨지 말고, 진실을 외쳐야 한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진실말하기를 수행하기,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고 진실을 알린다는 파레지아의 정확한 의미를 볼 수 있다.

 

3. 루키아누스의 연설에서 견유주의와 파레지아의 실천이 결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루키아누스는 견유주의자들에게 비판적이었지만, 아테네의 견유주의를 대표했던 데모낙스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었다. 데모낙스는 아테네 여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고, 엘레우시스 제전에 입문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불경죄로 고발당한다. 그는 인간에 대한 그의 의무, 인간에 대한 그의 유익한 역할을 에레우시스 제전에 관한 모든 가능한 진실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파레지아를 전제한다. 그래서 제전에 참여하는 것은 침묵에의 약속을 수반하기에, 제의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견유주의자는 실제 프로페테 파레지아스(솔직한 말하기의 선지자)로 제시된다.

 

진실말하기와 삶의 양식간의 관계에 대한 규정 : 수단의 기능, 축소의 기능, 그리고 검증의 기능

견유학파에서 진실말하기와 삶의 방식 사이의 관계는 (소크라테스식)보다 더 복잡하고 정교하다. 무엇보다도, 견유적 삶의 양식은 단지 소크라테스가 소유했음을 증명했던 절제, 용기, 그리고 지혜와 같은 덕성들을 실행하고 드러내 보이는 삶이 아닙니다. 견유주의에서 파레지아의 정당성, 지지대, 프레임으로 기능하는 삶의 양식(지팡이, 거지꼴의 배낭, 가난, 구걸)은 지극히 엄밀하고 양식화된 행동양식, 고도로 식별가능한 행동양식으로 다음과 같이 특징지어진다.

 

첫 번째로, 그것은 진실말하기가 가능한 조건으로 기능하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가진다. 에픽테토스의 텍스트에서 견유주의자는 정찰병의 역할을 한다. 정찰대가 되어 인류에게 진실을 말하려면 어떤 애착도 갖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에픽테토스는 견유주의자는 가족을 가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인류가 그의 가족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 정찰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는 진실로 모든 애착에서 자유로워야 하며, 삶의 양식은 파레지아의 수행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두 번째로 본성이나 이성에 기반을 두지 않은 모든 무의미한 의무들을 최대한 축소하는 기능이다. 무의미한 관습과 불필요한 견해들의 축소로서 이런 삶의 양식은 분명히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와 견해를 전면적으로 벌거벗는 것이다.

 

세 번째로 견유학파의 독특한 삶의 양식에는 진실의 검증기능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벌거벗음 속에서 이것은 인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거나, 가장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본질을 구성하는 것들을 폭로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삶의 양식은 자기 독립성과 근본적인 자유 안에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 결국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간명하게 보여준다.

 

* 정리: 견유주의는 어떤 유형의 담론과 그 담화에서 말해진 원칙에 부합하는 삶 사이의 조응, 조화, 내지 호모포니의 확립에 내지 결합에 만족하지 않는다. 견유주의는 삶의 양식과 진실을 보다 긴밀하고 엄격한 방식으로 결합한다. 그것은 존재양식을 진실말하기의 본질적인 조건으로 만든다. 그것은 존재형태를 진실말하기의 공간을 만드는 축소의 실천으로 만든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존재형태를 한 사람의 행동, 한 사람의 몸, 그 사람이 옷 입는 방식, 삶과 자기의 지도방식에서 진실 자체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만든다. 짧게 말해, 견유주의는 삶, 존재, 비오스를 진실말하기라고 부를 수 있는 진실의 현현으로 만든다.

 

진실극장으로서의 삶

막시무스와 그레고리의 예 p205

견유주의에서 표명된 것은 즉각적이고, 두드러지며, 거리낌 없는 진실 표명으로서의 삶입니다. 혹은, 삶의 수련, 금욕, 발가벗김으로서의 진실입니다. 기원전 4세기 헬레니즘시대에 출현하여 로마제국 말기까지 혹은 한참 이후까지 견유주의는 삶을 통해, 삶 속에서 진실의 스캔들을 실천해왔습니다. 이것이 견유주의의 핵심입니다. 삶 속에서, 삶을 통해 진실의 스캔들을 실천하는 것,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견유주의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막시무스와 그레고리(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막시무스는 일정 기간 사막에서 고행했으며, 금욕주의로 명성이 높아 알렉산드리아 주교의 관심을 받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었다. 처음에 그레고리는 그를 환영했지만, 후에 두 사람사이에 폭력적 갈등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막시무스를 철학적 영웅으로, 진정한 견유주의자로 표현했다.

“ 내게는 당신(막시무스)이 개와 비슷합니다. 당신이 경솔해서가 아니라, 파레지아 때문이지요. 탐욕스러워서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살기 때문이지요. 짖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이 노예가 되지 않게 경계를 서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완벽한 철학자요, 순교자요, 진실의 목격자입니다”

- 이는 그 삶의 방식, 개와 같은 삶, 금욕주의에 몸을 담기 시작한 순간부터 현재까지, 그의 몸, 그의 삶, 그의 행동, 그의 검소함, 금욕이 진실의 산 증거임을 멈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는 고통받고 참아내고 궁핍함으로써, 진실이 그의 삶에서 실존에서 몸에서 드러나게 한다.

 

푸코 [진실의 용기] 10장

 

견유주의는 고대철학에서 주변적일 뿐만 아니라 하찮은 것처럼 보여왔다. 첫 번째 이유는 고대사회에서 견유주의에 대해 한편으로 경멸하고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견유주의의 핵심을 건져낼 만한 것으로 찬미하는 모호한 태도를 취해왔다. 두 번째는 고대 사회의 철학은 (플로톤, 아리스토텔레스..) 강력하고 특화된 이론적 핵심을 서구사유에 물려주었지만, 견유주의는 이론적 체계가 미약했기에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견유주의가 스토아주의나 에피쿠로스주의처럼 이론보다는 태도, 내지 존재방식으로 전수되고 지속되고 실천되어 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고대사회로부터 현재까지 걸친 견유주의의 역사를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견유주의에 대한 텍스트는 거의 현존하지 않지 않지만 참조할 만한 3개의 텍스트가 있다.

- 틸리히의 텍스트(1935) : 키니스무스(Kynismus)와 지니스무스(Zynismus)를 구별한다. 키니스무스는 고대 견유주의를 지칭하는데, 자연과 이성에 입각해서 당대 문화에 가한 견유주의자들의 비판을 말한다. 그로부터 유래한 지니스무스는 자신의 창조자가 되려는 용기이다.

- 하인리히 <파르메니데스와 요나> (1966) : 고대 견유주의의 핵심은 동물로서의 자기에 대한 확신이다. 지니스무스도 자기 확신의 형식이지만, 부조리와 보편적인 의미 부재에 직면해서, 그와 대응해서 일어난 것이다.

- 라인하르트 겔렌 <도덕과 초도덕> : 시니시즘을 개인주의의 형식, 자기 확신의 형식으로 정의

- 이 3가지 텍스트는 고대견유주의에 대해서 긍정적 가치를, 현대 시니시즘에 대해서 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또한 견유주의는 개인주의, 자기 확신, 특정한 실존의 강화,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실존, 극단적 특이성 속에 있는 실존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견유주의의 핵심은 개인주의보다 진실의 스캔들로서의 실존형식에 있다. 긴 유럽의 역사속에서 처음에는 고대 기독교에서, 근대세계에서 견유주의적 도식과 견유주의적 실존의 양식을 실어나른 3가지 요인(종교적, 정치적, 미학적)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기독교 문화 자체, 기독교적 금욕의 실천과 제도들이다.

예를 들면 디오게네스의 견유주의를 가리키는 ‘개’라는 단어와 함께 견유주의자들의 주제, 태도, 행동양식 등을 중세의 수많은 영성운동속에서 볼 수 있다. 탁발수도 교단, 즉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거지처럼 헐벗은 옷차림을 하고 맨발로 다니며 사람들에게 자신의 구원을 돌보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견유주의적인 행동 양태를 취한다. 즉 기독교 금욕주의와 수도원 생활이라는 매개자를 통해 견유주의적 삶의 방식이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는 것을 볼 수있다.

 

두 번째는 견유주의는 19세기 내내 혁명운동들이 취한 혁명적 실천과 형식의 일부로 기능했다. 종교적 실천이나 제도가 아니라 정치적 실천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혁명적 활동으로서의 삶, 혹은 삶으로서의 혁명적 활동을 정의하고 묘사하고 조직하고 규제하는 방식을 전투주의(militantism)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전투주의는 20세기 유럽에서 3 가지 거대한 형식(혁명적 삶, 합법적인 조직화, 그리고 삶을 통한 증거<삶 자체로 진실한 삶을 증언하기>)을 갖췄다. 이 3가지는 차례로 우위를 점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비밀조직은 19세기 초반의 혁명운동을 지배했고, 조직화 측면은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정당과 노동조합의 제도화 속에서, 삶을 통한 증언의 측면은 19세기 중반에 우위를 점한다. 러시아 니힐리즘 이후 아메리카 무정부주의, 테러리즘, 자살 폭탄테러까지 삶의 실천으로서 무정부주의와 테러리즘의 문제가 진실한 삶의 근본 원리의 극단적 형식을 취한다.

 

세 번째는 근대예술은 과거에도, 지금도, 우리에게 견유주의적 존재양식, 삶의 스타일과 진실표명을 연결하는 원칙을 전달하는 매체이다. 예전부터 예술가는 통상적으로 특이한 삶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동안 예술가의 삶이 자신의 작품을 창조할 정도로 특이해야 할 뿐 아니라, 어떤 점에서 자신의 진실속에 있는 예술 자체를 드러내야 한다는 근대적인 관념이 나타났다. 이는 예술적 삶이 진실한 삶의 형식을 취할 수 있고, 거꾸로 그런 삶에서 비롯된 모든 작품은 진실로 예술에 속한다는 걸 보장한다는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19세기 중반부터 예술은 더 이상 모방이 아니라, 실존의 벌거벗음, 폭로, 발굴, 그 근저로의 환원으로서의 예술적 실천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두드러졌다. 예술(보들레르, 플로베르, 모네)은 한 문화 안에서 어던 권리도 없고 표현가능성도 없는 것, 문화의 지하에, 문화의 바닥에 있는 것이 난입하는 장으로 형성된다. 그런점에서 근대예술의 반-플라톤주의라는게 존재한다. 그리고 모든 에술적 형식 안에는 모든 확립된 예술에 대한 지속적인 견유주의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을 반-아리스토텔레스적 성격이라 부를 수 있다.

 

반-플라톤주의 근대에술과 반-아리스토텔레스주의 근대예술은 실존의 근저를 발가벗기는 것이며 제도화된 예술의 모든 형식에 대한 끝없는 거절과 거부로 반-문화의 기능을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의해 문화적 통념이 야만적 진실 속에 있는 예술의 용기에 의해 반박된다. 그렇기에 근대예술은 문화 속에 있는 견유주의라고 할 수 있다.

 

댓글목록

소리님의 댓글

소리

발제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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