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진실의 용기 11, 12강 발제문 (0824) +4
삼월
/ 2017-08-23
/ 조회 1,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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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강》
두 가지 대조적인 견유주의적 인물: 데메트리우스와 페리그리누스
견유주의를 다른 철학적 성찰이나 실천과 구별하는 특이점 혹은 어려움은 동일한 시기에 견유주의라 인정되는 태도와 품행이 무척 다채롭다는 데 있다. 견유주의의 전형으로 예시되는 걸인의 모습 이외에, 견유주의적 삶의 모습이라고 평가되는 두 가지 극단적인 예로 데메트리우스와 페레그리우스를 꼽을 수 있다.
세네카는 데메트리우스를 ‘그의 시대 최고로 주목할 만한 철학적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데메트리우스는 황제 칼리굴라가 하사한 거액을 당돌하게 거절했다. 그는 냉철한 웅변가이지만, 대중선동가는 아니다. 궁중철학자도 아니며 귀족집단에 정치적 조언을 하는 철학적 조언자나 영혼 조력자로 볼 수 있다. 반면에 페레그리우스는 대중운동가이며 과시적·반골적인 방랑자였다. 문화·사회·정치적인 소외계층에게 가르침을 베풀었고, 로마에서 추방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무리의 지도자가 되려했고, 자신의 자살을 거대한 대중축제로 기획하기도 했다.
견유주의의 두 가지 대조적인 표상: 사기꾼으로서, 혹은 철학의 보편자로서 견유주의의 교리적 협소함과 폭넓은 사회적 현존
견유주의 분석이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견유주의에 대한 태도의 모호함에 있다. 견유주의 부흥기인 기원전 1세기부터 3세기에 이르는 4세기 동안에, 견유주의는 폭력성에 대한 맹렬한 비난과 함께 진실의 실천자로서의 찬사를 동시에 받는다. 참된 견유주의에 대한 칭송과 견유주의를 모방하는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비난이 견유주의자들에게 쏟아진다. 디오게네스와 크라테스는 진실한 참된 견유주의자로 칭송되고, 어떤 이들은 견유주의를 사칭하는 천박하고 무지하며 문화가 결핍된 사기꾼으로 불린다.
루키아누스는 견유주의에 적대적이면서도 견유주의자 데모낙스를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루키아누스에 따르면, 데모낙스는 타고난 충동에 의해 본성적으로 철하게 이끌렸다. 데모낙스는 철학과 문학을 육체적 단련과 결합하여 가난과 고통에 맞섰고, 자신의 전 생애를 자유와 파레지아에 바쳤다. 데모낙스의 진실은 과격하지 않았고, 영혼을 치유하는 부드러움을 실천했으며, 부와 명예를 경멸하면서도 도시의 삶에 열심히 참여했다. 율리아누스 황제 역시 디오게네스와 크라테스를 통해 견유주의를 찬미했다. 디오게네스와 크라테스는 말보다 행위를 우선했으며, 가난을 명예로 여겨 최초로 재산상속을 경멸했다고 평가받는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본래적인 견유주의에 경의를 표하면서, 견유주의를 모든 이에게 보편타당한 일종의 보편철학으로 만들었다. 견유주의는 고대적이고 보편적이면서, 지식이나 훈육이 필요 없어 접근이 용이한 철학으로 인식되었다. 이 점에서 견유주의는 기존의 여러 철학들에서 기본적 핵심을 추출한 철학적 융합주의로 이해되기도 한다. 결국 견유주의는 철학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사회에 수용되지 않은 채 방황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삶의 애호자로서의 견유주의적 가르침
견유주의 연구가 어려운 세 번째 이유는 이론적 텍스트가 없기 때문이다. 견유주의는 대중적인 동시에 아주 기초적이고 빈약한 이론적 틀을 가지고 있었다. 엘리트들에게 그것은 단지 철학에 대한 모방처럼 보일 정도였다. 견유주의자들에게 철학적 가르침이란, 개인에게 지적인 동시에 도덕적인 훈련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디오게네스는 교육에 있어 생존을 위한 자립과 무장, 인내와 훈련을 강조하였다. 견유주의자 데메트리우스 역시 소박하고 실천적인 가르침을 강조하였다.
두 가지 길의 주제
서구의 철학적 사유와 영성에는 두 가지 길에 대한 비유가 여러 번 등장한다. 견유주의에도 두 갈래 길에 대한 관념이 있다. 하나는 길고 쉬우며, 담론을 학습함으로로써 덕을 성취하는 길이다. 다른 하나는 짧지만 어렵고 고되며, 무수한 장애물에 직면하는 침묵의 길이다. 이 훈련의 길은 금욕과 가난, 인내를 실천한다. 두 가지 길에 대한 비유를 통해 담론과 훈련은 대립된다. 훈련과 도제를 통해 계승된다는 특이성 때문에 견유주의는 교리보다 도식을 통한 모델·사례·일화·우화를 더 많이 사용한다.
교리의 전통성과 실존의 전통성
예시적 일화를 통한 품행의 도식 전수는 교리적 전통성과 다른 전통성을 창조한다. 교리적 전통성은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중요했으나, 견유주의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다. 견유주의는 교리의 전통성이 아닌 실존의 전통성을 실천했다. 실존의 전통성은 어떤 인물의 삶의 요소와 에피소드를 모방하여 현재에 되살리려고 한다. 교리적 전통이 망각을 넘어(상기想起를 통한 이데아의 복원) 의미를 지속시킨다면, 실존의 전통성은 도덕적 쇠락을 넘어 품행의 힘을 회복시킨다.
철학적 영웅주의, 괴테의 파우스트
실존의 전통성은 어떤 점에서 모든 철학 분파에서 중요하지만, 그것이 교리의 전통과 결합되거나 참조되는 방식은 동일하지 않다. 견유주의처럼 실존의 전통성이 지배적이어서 교리의 전통이 말소되는 상황에서는 철학적 영웅의 형상이라는 것이 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철학적 영웅은 현자나 기독교의 성자, 수덕자와 다르며, 본받음의 대상과 철학적 태도를 위한 실천적 모체를 표상한다. 견유주의는 가장 일반적·기초적·필수적 측면에서 철학적 영웅주의의 한 형식이었다. 철학적 교리가 아닌 실존방식, 스타일과 철학의 문제로서, 견유주의는 윤리학인 동시에 영웅주의의 한 형식으로 또 다른 철학의 역사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낸다. 이 철학의 역사는 19세기 초 철학이 교수과목이 될 때 중지된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철학적 전설에 대한 최후의 표현이다. 철학이 교수과목이 될 때 철학적 삶은 사라진다. 철학적 삶은 정치 영역으로 옮겨가 변형되어 혁명적 삶 속에서 재개될 것이다.
《12강》
진실한 삶의 문제
견유주의는 삶의 형태로 진실을 드러내고 실천하며 생산한다. 그렇다면 진실한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어떻게 무엇이 진실한지를 판정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푸코는 먼저 철학과 영성의 사유 역사에서 ‘진실한 삶’이라는 주제를 일반적 방식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견유주의 이전 그리스 철학에서 ‘진실한 삶’이 이해된 방식을 보는 것이다.
진실의 네 가지 의미: 숨김없음, 순수함, 똑바름(올바름), 변함없음
그리스 사유에서 진실은 네 가지 의미나 형식으로 설명되었다.
1. 숨겨지지 않는 것, 감추지 않는 것. 전적으로 가시화하다, 완전히 보이게 하다.
2. 덧붙여지지 않다, 보충되지 않다, 다른 것과 섞여 있지 않다
3. 똑바르다. 휘거나 왜곡되지 않았다.
4. 어떤 변화도 겪지 않고 존속한다. 동일성을 유지한다. 불변적이며, 타락하지 않는다.
플라톤에서 진실한 사랑의 네 가지 의미
진실의 개념은 로고스와는 다른 것, 이를 테면 사랑에도 적용된다. 서구문화에서 ‘진실한 사랑’에 대한 묘사는 매우 중요하다. 진실한 사랑에는 위에서 말한 네 가지 가치들이 그대로 적용된다. 플라톤의 철학(과 여기에 영향 받은 기독교 영성, 신비주의 영역들)에서 진실한 사랑은 진실한 삶의 대표적 형식이다. 플라톤 이래 진실한 사랑과 진실한 삶은 전통적으로 함께 했다.
플라톤에서 진실한 삶의 네 가지 의미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진실한 삶에 대한 플라톤의 철학적 정의가 아니다. 오히려 일상적 의미를 지닌 플라톤의 텍스트 안에서 진실한 삶에 대한 관념을 찾아보려고 한다. <작은 히피아스>라는 대화편에 소크라테스가 <일리아드>를 인용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여기서 진실한 사람은 돌려 말하지 않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국가>에서는 진실한 존재방식이 신의 실존에 비유된다. 결국 진실한 삶의 단순성은 이렇게 정의된다. 어떤 변화도 없는 것, 일어난 일과 담론·환영·기호들 간의 단절이나 불일치에 의해 야기되는 기만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
여기에 세 가지 가치들이 비슷하게 보태어진다. 다중의 욕망과 충동에 시달리지 않는 삶. 올바른 삶의 규칙으로서 노모스에 따르는 삶. 어그러짐과 변화, 타락, 몰락을 겪지 않고, 존재의 동일성 안에 변화 없이 남아있는 삶. 푸코는 여기서 플라톤 텍스트를 분석함에 있어 일부러 철학적 정교화에 초점을 두고 탐색하지 않았다. 플라톤이 실존적 교훈으로 쉽게 풀어 남긴 이야기들과 견유주의적 실존방식을 비교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나아가 그 차이를 부각시켜 견유주의적 삶의 특징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까지.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물론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다!)
디오게네스의 모토: “통화의 가치를 바꿔라”
이제 남은 것은 견유주의가 진실한 삶이라는 개념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디오게네스의 삶의 출발점에 대한 암시적 에피소드가 있다. 디오게네스는 화폐교환자의 아들이라고 전해지는데, 화폐횡령 또는 화폐위조를 하여 추방되었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신탁을 받았다면, 디오게네스는 ‘통화의 가치를 바꾸라’는 신탁을 받았다. 소크라테스와 디오게네스의 일화는 대칭성과 근접성을 동시에 가진다.
이제 주목할 것은 통화의 의미이다. 통화는 관습, 규칙, 법과 연관되어 있다. 통화의 가치를 변경·개조한다는 것은 통화의 재질을 바꾸는 아니라, 더 적합한 무엇인가를 새겨 넣는 일이다. 진실한 삶이라는 주제를 끝까지 밀어붙일 때 전통적으로 진실한 삶으로 인정된 것과 정반대편에 있는 삶이 드러난다. 견유주의는 진실한 삶의 찡그림이다. 진실한 삶이라는 주제를 파괴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 진실한 삶이라는 주제를 외부로 확장시킨다. 중요한 것은 가치의 단절이 아니라 가치의 전도이다.
발제 끄읏! 내일 봐유~~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으허헝헝헝 삼월뽕
소리님의 댓글
소리
오 역시 삼월~ 이번 세미나도 기대된다!! 본격적인 디오게네스에 대한 얘기와 삼월의 깔쌈한 정리~!
세미나가 기대되는군요. 고생했어요. 목요일에 봐요! 아 내일이네. 곧 봐요~
빙꼬뼝님의 댓글
빙꼬뼝
동어반복 같은 진실의 용기 내용들...
언제나 멋진 발제.
맛있는 저녁과 푸코!
나중에 봐요~
요고마고님의 댓글
요고마고발제에도 업자가 있더군요.. 삼월님. ㅋㅋ 감사히 들었습니다!